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음’이 ‘거듭난 영혼’의 좌소이지만, 영적으로 죽은 미중생(未重生, non-regeneration)자들의 ‘마음’은 단지 ‘비물질 육체(nonmaterial-flesh)’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미중생자의 ‘마음의 생각’을 ‘육체의 생각(the carnal mind-KJV, the mind set on the flesh-NASB, 롬 8:7, KJV)’이라며 미중생자의 마음을 육체와 동일시했습니다.

이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유물론자들이나 거듭남을 인정하지 않는 행동주의 교육학자들이 인간의 ‘마음’을 육체의 부속물로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그들은 ‘마음의 생각’을 단지 물질이라는 뇌의 활동으로 보고, 뇌라는 물질이 소멸되면 육체의 부속물인 마음도 함께 소멸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비물질 육체(nonmaterial-flesh)’인 미중생자의 마음은, 그가 아무리 그것을 갈고 닦아 청결하게 해도 단지 육체를 갈고 닦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 수양(修養), 독서, 예술 감상 심지어 종교까지도 ‘비물질 육체’인 마음을 고양시키는 수단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비물질 육체’를 수양하고 가꾸는 것이 종종 ‘영혼 가꿈(spirit care)’으로 오인됩니다. 이는 주로, 영혼은 인정하지만 성령과 영적 실체를 알지 못하는 여타의 종교인들, 종교다원주의 교인들이 그러합니다.

마음 수양을 통한 청심(淸心)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이 깨끗해졌고, 자기의 영성이 상당한 영적 경지에 도달했고, 심지어 구원받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까지 합니다. 특히 종교다원주의 교인들은 수양(修養)으로 ‘고양된 마음(lifted mind)을 마치 성령의 역사로 된 '영혼 고양(soul-lifting)’으로 오해합니다.

8복의 '마음 청결'은 마음 수양이나 종교 행위의 결과가 아닌,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성령 역사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중생(重生, regeneration)이 마음을 청결케 합니다(골 2:13). 성경은 죽음을 부정하다고 규정하며(민 9:10) 죽음에서 살아나는 중생을 거룩하다(씻음)고 봅니다(딛 3:5).

중생은 ‘죽은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살아난다’는 뜻도 있고 ‘죄를 씻는다’는 뜻도 있는데, 둘은 동일 개념입니다. 죄를 씻음으로 죽음(롬 6:24)에서 중생하여 하나님을 향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죄는 ‘죽음, 소경 됨, 더러움’의 3중 결과를 낳았고, 중생이 ‘삶, 개안(開眼), 청결’의 3중 결과를 낳았습니다.

◈마음 청결의 목적은 하나님을 뵙기 위함

마음의 청결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합니다. 먼저, 죄로 죽은 영혼이 중생하여, 하나님을 향해 눈이 열림으로서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한 말씀에서도 ‘거듭남’과 ‘봄(see)’이 연결됩니다. 곧 중생의 목적이 보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마음 청결은 여타의 종교처럼 청심(淸心, 마음 정화)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보는데 있습니다.

성경이 죄와 소경을 연관지은 것은 같은 맥락입니다. 죄 사함 받아 중생하면 눈이 뜨인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 보고 소경이라고 한 것은 그들이 죄 사함을 받아 중생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죽었다는 말이 ‘소경 됐다’는 말이듯, 살아났다는 말은 ‘보게 됐다’는 뜻입니다. 소경됨은 죄로 죽은 결과입니다. 의사들이 환자에 대해 최종적인 사망 선고를 할 때, 눈 동공(瞳孔) 이 풀리고 심정지(心停止)가 일어난 것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마음의 청결로 하나님을 보는 두 번째 이유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은 죄를 없이함으로써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린다고 했습니다(사 59:2). ‘에바다’ 라는 CCM도 그것을 노래했습니다.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뜨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뜨게 하소서.’

인간이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된 것은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막은 결과이기에, 죄 사함을 받아 마음이 청결케 되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도 마음 청결의 목적이 마음 수양가들이 청심(淸心)을 즐기려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을 보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마음을 청결케 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중생(重生)은 오직 대속 신앙을 통해서 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이 떼어주시는 떡을 먹은 후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 본 것은(눅 24:30-31),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요 6:54) 대속 신앙이 눈을 열어 하나님을 보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을 때, 죄로 죽은 영혼이 중생하고 하나님과 그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담이 무너지니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내 기쁨 한량없도다’라는 찬송 가사 그대로입니다. 신앙이 있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고 긴가민가 하는 것은 대속 신앙으로 중생을 입지 못한 때문입니다.

신학 지식을 많이 가진 신학 박사라고 해서, 다 하나님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무식한 촌로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대속 신앙으로 중생하면 하나님을 밝히 봅니다.

◈하나님을 뵙는 축복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얻는 복이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세속적 신자들에게는 별로 인기 없는 주제이지만, 타락 전 아담과 하와의 지복(至福)이 하나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에덴에서의 그들의 일용 양식은 빵이 아닌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떡으로만 사는 타락한 오늘의 인간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빵보다는 하나님의 얼굴로 만족했습니다(시 17:15).

범죄 후 인간에게 닥친 심판은 하나님 면전에서의 추방이었습니다(창 3:23). 이는 인간 지복의 상실이었습니다. 영원한 지옥 멸망도 다른 것이 아닌,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는 것(살후 1:9)’입니다.

지옥 멸망에서의 구원 역시,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됐던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과 ‘하나님 얼굴 대면’을 동일시합니다. “주의 얼굴빛을 비추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 80:3, 7)”.

칭의의 결과인 하나님과의 화평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천국에서 성도가 받을 분깃 역시 오직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우리가 애송하는 많은 찬송시들이 천국에서 주의 얼굴을 뵙는 기쁨에 대한 것입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 찬란하게 뵈는 집. 예루살렘 새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빛난 하늘 그 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한량없는 영광중에 주의 얼굴 뵈오리(찬 541장)”,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꿈 이루어 주옵소서. 밤과 아침에 계시로 보여 주사 항상 은혜를 주옵소서.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나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 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 뵈오리라(찬 542장)”.

다윗은 금생에서 자기 분깃을 다 받아 누린 불신자에게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후(시 17:14),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얼굴로 만족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다윗에게 있어, 칭의 받은 ‘금생(今生)’이나 사후의 ‘내생(來生)’에서의 그의 만족은 오직 주의 얼굴이며, 그에게서 주의 얼굴이 가려지는 것은 근심의 원천이며, 지옥 형벌임을 고백합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7)”,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시 143:7)”.

성도가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6)”라는 별명을 가진 것은 괜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마음 청결’에는 차별이 없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마음 청결이 오직 ‘믿음의 의(義)’로만 되기 때문입니다(롬 3:22). 만일 ‘마음 청결’이 인간의 수양이나 노력으로 된다면, 참선과 성화의 정도에 따라 신급(信級)이 달라지는 불교나 천주교처럼, 마음 청결의 순도(純度)에도 차등이 질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의(義)’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아브라함이나 삭개오나, 바울이나 십자가 강도나, 혹은 50년을 믿었거나 금방 믿었거나 차별이 없기에(롬 3:2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의 ‘마음 청결’도 차별이 없습니다.

마음 청결의 차이가 없으니 하나님을 뵙는데도 누가 더 깊이, 더 많이 하나님을 뵙느냐의 차이가 없습니다. 50년을 교회에 다녔어도 믿음으로 칭의와 중생을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을 뵙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 바로 복음을 믿어 중생했다면 그는 지성소(至聖所, the most holy house)로 직행하며 그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출 25:22).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