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포럼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찰> 북 토크 콘서트
▲(왼쪽부터)패널 김경숙 박사, 이해완 교수, 전우택 교수, 사회 백광훈 원장. ⓒ김신의 기자
한반도평화연구원, 문화선교연구원이 15일 밤 기독교 영화관 필름포럼 카페에서 책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찰>에 대한 북 토크 콘서트를 진행했다.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찰>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평화와 통일에 대해 지속적으로 논의한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연구프로젝트로, 한반도평화연구원(윤덕룡 원장)은 그간 <통일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북핵문제와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경제협력 정책과 실천과제> 등 현재까지 총 14권의 연구단행본을 발간해 왔다.

이번 콘서트에는 백광훈 원장(문화선교연구원)이 사회를 맡고, 저자인 전우택 교수(연세대 의과대학, 대표편저자), 이해완 교수(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김경숙 박사(한동대 통일과평화연구소)가 패널로 참석했다.

이날 전우택 교수는 “용서와 화해는 기독교적으로 너무나 중요하지만 또한 어려운 주제다. 값싼 용서를 남발하는 일부 문화, 그리고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지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 책은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저자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경숙 박사
▲탈북민 목사인 김경숙 박사(한동대 통일과평화연구소,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역학 석사, 연세대학교 상담 코칭학 박사). ⓒ김신의 기자
탈북민인 김경숙 박사는 “북한 사람들은 용서에 대한 생각을 해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개념이 있다. 북한 체제 하에서 이루어진 용서들이 있다”며 ‘북한에서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성찰’을 살폈다.

김 박사는 “태생적으로 최고 존엄을 신격화 하는 북한에서 이에 반하는 모든 세력은 용서할 수 없는 절대 악이고 복수로 일관해야 할 대상이다. 용서는 반동 행위와 같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수령의 자비로서의 용서가 있다. 낙인 찍힌 사람에게 표창을 하거나, 더 큰 죄를 짓기 전에 비판하는 것, 책벌 등이 바로 수령의 자비로서의 용서”라고 했다.

김 박사는 “또 묵인과 망각이란 용서가 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것으로 도덕 불감증에 빠지고, 계속 반복적으로 피해가 발생한다”고 했고 “1990년대를 기점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불법, 뇌물을 주고 사는 용서의 개념이 있다. 살인자도 돈만 있으면 용서가 되고 덮어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가 아니라 가해자와 공권력의 중요 위치에 있는 사람 사이에서의 용서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2차 3차 가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것이 북한에서 지금 통용되는 용서의 개념”이라고 했다.

또 ‘정치적 용서’에 대해 언급했다. 김 박사는 “북한에서의 용서란 철저히 북한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는 도구”라며 다음과 같이 북한 체제 아래서 세 차례에 걸쳐 사용된 용서를 전했다.

김 박사는 “첫 번째 용서는 해방 직후, 독재 권력을 수립할 때였다. ‘당과 수령은 양심적 유산 계급을 용서하겠다. 또 자녀들에게도 부모의 과거를 묻지 않겠다’고 하면서 지주 자본가, 유산 계급들의 땅과 공장을 몰수했다. 그 후손들은 차별하고 교육, 복지, 취업 등 불이익을 당했다. 두 번째는 한국 전쟁 후 전후 복구 건설 시기 때였다. 미군과 한국군에서 교육한 자들, 월남자 가족을 적폐하고자 ‘자수한 사람은 용서할 것’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이 자수했다. 그렇지만 자수한 많은 이들이 단증과 직위를 빼앗기고 시골로 추방당했다. 자손들까지도 출신 신분이 ‘적대’라는 이유로 대를 이어가고 있다. 세 번째 용서는 탈북자였다. 많은 탈북자를 처벌할 수가 없자 ‘살기 위해 강을 건넌 생계형’이라고 정의하고 용서해서 사회에 복귀시키라고 했다. 내부를 정비하기 위한 선전 수단의 이용으로, 대표적으로 한국 매체에 나온 임지현이란 분이 있다”고 했다.

이해완 교수
▲이해완 교수(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前 서울고등법원 판사). ⓒ김신의 기자
저서 중 ‘용서와 화해, 그 불가능에서 가능성으로 가는 길’의 주제를 다룬 이해완 교수는 “정의와 용서가 충돌하는 부분, 무조건적 용서가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는지 탐구했다. 이를 위해서 용서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악과 죄에 대한 사면을 포함하는지, 형사적 처벌의 면제를 포함하는지 여부는 학자와 나라마다 다르다”며 용서의 정의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무조건적 용서는 윤리적으로 적절하고 정당하다. 용서는 공평을 넘어 수직적, 영적인 초월의 윤리, 합리적인 공평을 넘어서는 선물과 같은 것”이라며 “성서적으로 정의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한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 사랑을 말하기에 용서도 이처럼 정의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계산을 뛰어넘은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적 차원의 용서에 대해선 “용서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과 문화, 종교, 형사처벌의 면제, 축소 또는 완화 등 개인의 내면과 다른 고려 요소와 한계를 갖는다”며 “공적 영역에서 용서를 반대하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역사를 비참하게 하는 것이다. 한 번 전쟁한 나라는 평생 원수여야 한다. 공적 차원에서도 용서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좋은 리더십과 지혜로운 판단, 국민들의 의식, 문화라는 토양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