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영적인 통한(痛恨)

‘애통(哀痛, mourn)’은 죽음에서 연유한 단어입니다. 원래 누가 죽었을 때 갖는 슬픔을 애통(mourn)이라고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해 갖는 통한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즉음을 자기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벌레보다 못한 나같은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을 생각할 때(사 53:5) 일어나는 통렬한(bitter)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애통은 단순한 인간의 감정을 넘은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다만 한 인간의 고난과 죽음이었다면 인간의 마음, 감정, 지성만으로도 공감할 수 있으나, 그의 죽음은 사람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아들의 죽음이기에 단순히 인간적 감정과 지성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힘겹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인간적인 연민으로 우는 여자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고 하신 말씀에는, ‘나를 인간적인 연민으로 동정하지 말라’는 뜻이 함의돼 있습니다.

오늘 기독교 영화들에서, 예수로 분장한 잘 생긴 배우가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달리는 연출 장면을 보며 관객들이 훔치는 눈물도 그런 류이며, 그런 연민의 눈물은 기독교와 무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서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고통을 보며 생기는 ‘애통’만이 진정한 영적인 감정이며, 이는 오직 거듭난 성도들의 몫입니다.

예수가 사람이면서 하나님 되심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지듯, 사람이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성령으로만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고 한 것도 하나님 아들의 대속의 죽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지고 인간 지성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애통’은 정확히 말하면, 내 거듭난 영이 하나님의 사정을 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는 것이며, 반드시 인간적인 감정 예컨대, 슬픔이나 눈물을 수반하지는 않습니다.

“구원의 기쁨(벧전 1:8)”, “평강(빌 4:7)”, “성령의 기쁨(살전 1:6)”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an inexpressible and glorious joy)’이고, ‘모든 지각을 뛰어넘는(transcends all understanding)’ 평강이고, ‘환난 가운데서(in spite of severe suffering)’ 경험되는 초월적인 기쁨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과 육 사이에서 경험하는 통한(痛恨)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법적으로 주님의 피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았기에,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죄에 노출돼 있고 그의 육신의 연약성으로 인해 여전히 범법하며, 그로 인해 회오(悔悟, repentance)의 마음을 갖는데 그것이 곧 통한입니다. 루터가 말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 된”자가 갖는 복합적인 감정입니다.

몸이 구속을 받는(롬 8:23) 그날까지 그런 ‘확신’과 ‘회오(悔悟)’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순환의 족쇄로 남을 것입니다. 다음의 사도 바울이 탄식에도 그런 안타까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1-24).”

‘애통’은 율법주의자들이 율법 조문을 어겼을 때 갖는 비인격적인 죄의식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저버리고 어그러진 길을 간 것에 대한 인격적인 통한(痛恨, bitter grief)입니다. 말하자면 이는 죄인이 판사 앞에서 갖는 두려운 정죄 의식이라기보다, 자식이 사랑하는 부모에게 불효하여 갖는 회한(悔恨, contrition) 같은 것입니다.

다윗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짓고 탄식 속에서(groaning)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셨던 통한의 눈물(시 6:6)이나,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닭 우는 소릴 듣고 했던 베드로의 통곡은(wept bitterly, 마 26:75) 단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율법적인 두려움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미 앞서도 언급했듯, 이 ‘애통’은 자신의 통한이라기보다는 성도 안에 거하는 성령의 한탄입니다(grieve, 엡 4:30).

◈분수 있는 건강한 죄의 통한(痛恨)

죄의식에도 건강한 죄의식이 있고 그렇지 못한 죄의식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깊은 죄의식만 가지면 경건한 신앙인 양 생각하는 풍조가 있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이런 경향은 과거 일부 청교도들 가운데도 있었고(그들은 이런 깊은 죄의식에 도달하지 않은 자는 거듭나지 못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런 지나친 죄의식으로 인해 정신병에 걸리는 이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는 도를 넘은 부적절한 죄의식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마치 죄를 지을 수 없는 자가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는 분수를 넘은 죄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는 죄를 남용하는 무율법주의자들보다 더 나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이 원천적인 죄책을 지려고 하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지 못하게 하고, 자살같은 극단적인 행동으로까지 이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후 자살한 가룟 유다는 분수를 넘은 지나친 죄의식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기 죄에 대해 원천적인 무한의 책임을 지고, 그리스도를 대속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생득적으로 원죄를 타고난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는 원천적인 죄가 아니기에 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는 죄의 원천자 마귀뿐입니다. 성경이 마귀를 향해,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제 것으로 거짓말하고, 거짓의 아비(요 8:44)”로 지칭한 것은 그가 죄의 원천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애통’은 구원받은 성도의 건강한 죄의식입니다. 이 애통의 죄의식은 회한(悔恨, contrition)은 있지만 절망은 없는, 죄인으로서 갖는 분수 있는 죄의식입니다. 곧 자기 죄에 대해 분해하고 슬퍼하는 애석(哀惜)의 감정입니다.

다윗이나 베드로가 가롯 유다 못지 않는 중죄를 범했음에도 그들이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분수 있는 건강한 죄의식을 가진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고백에서 보듯이, 그는 자신이 모친의 죄 중에 잉태되어 죄인으로 출생한 생득적 죄인이고(시 51:5), 그의 죄는 무죄한 상태에서 범하는 원천적인 죄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나아가 죄의 궁극적인 해결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그의 죄를 사하시면 죄는 해결된다는 것도 믿었습니다(시 51:4). 사도 바울 역시 다윗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생득적으로 죄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과도한 죄의식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7-20).”

바울의 이 고백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거나 남용하는 핑계거리가 아닌, 자신은 죄를 피할 수 없는 생득적인 죄인의 운명(?)임을 말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받는 위로

세상에는 슬프고 불행한 눈물이 있고 복된 눈물이 있습니다. 슬프고 절망적인 눈물은 하나님 없는 자들이 흘리는 비애의 눈물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통한 것이 소망없는 불신자의 죽음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소망없는 죽음의 슬픔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초상집에서 ‘훤화자(喧譁者, uproarer)’를 세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직업적으로 초상집에서 우는 일을 하는 자들로서, 슬픔을 고조시키기 위해 가장 청승스럽고 비통하게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초상집에서 훤화(喧譁)하는 무리를 물리치셨고(마 9:23-24),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절망적인 슬픔을 동의하거나 위로해주지 않은 분이시며, 오히려 절망적인 슬픔을 추방하러 오신 분임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은 정신의학적으로 공감되는 부분입니다. 정신과 의사는 정신이 건강치 못한 자들에게는 연민의 감정을 금하게 하고 심지어 기도와 독경(讀經) 까지도 금지시킵니다. 이는 그런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더욱 비탄과 절망에 빠뜨려 그들의 병세를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눈물이 있습니다. 곧 자기의 원하는 바를 넣지 못한 것에 대한 원통함으로 흘리는 ‘가인의 눈물’ 같은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이 가인의 눈물어린 탄원을 받아주지 않으신 것은(히 12:17) 겉으로는 그의 눈물이 회개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현세적인 욕망을 쟁취하지 못한 원통함의 눈물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그의 눈물은 거짓된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복된 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애통’입니다. 거듭난 성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갖는 애통으로, 이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애통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불러오고 영생과 천국의 위로를 입혀줍니다.

또 그리스도인이 약하여 범죄할 때 갖는 ‘애통’ 역시 복된 경험입니다. 죄로 그의 마음은 회오와 통한(痛恨)을 느끼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약할 때에 더욱 귀히 여기사(찬송가 411, 예수 사랑하심은)’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오히려 그를 하나님의 사랑에로 가까이 이끌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불변한 하나님 사랑을 확인시켜줍니다.

이러한 ‘애통’은 하면 할수록 마음이 기쁘고 그의 영혼은 건강하고 복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한다(고후 6:10)”는 말씀은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위로”를 두고 말한 것이기도 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