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고난을 싫어한다. 고난이 온다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로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에베레스트 산과 같은 높은 산을 등반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산을 등반하다가 때로는 동료를 잃기도 하고, 동상에 걸린 손과 발을 절단하기도 한다.

어느 삶이 더 풍요로울까? 고난을 회피하는 삶일까, 아니면 고난을 찾는 사람들의 삶일까?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복음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히 5:8).”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다면, 게다가 그분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면, 역시 우리도 그분을 따라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야 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이 학교에 입학하지 않는 한, 누구도 순종을 배울 수 없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위험한 수업이라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위험이 있을까? 첫째, 고난당하는 것 자체가 큰 위험이다. 물론 이것도 큰 위험이지만 두 번째 위험은 더 끔찍한 것으로, 순종을 배우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이 고난의 학교에서는 단 한 가지 과목만 가르친다. 순종이다. 하지만 순종을 배우지 못한다면, 가장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 부작용일 일으킬 때처럼 끔찍하다. 따라서 이 학교에서 순종을 배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순종을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학교에서 순종을 배우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까? 그는 자신의 영을 소멸하는 법만 배운다. 곧, 고단한 삶 속에 있는 온갖 낙담, 절망, 분노, 우울 등과 같은 영을 갉아먹는 ‘구더기들’을 얻게 된다.

이 학교는 그만큼 위험하다. 이 학교를 제외하고 어떤 학교도 이와 같은 위험은 없다. 우리는 이 학교에 입학하여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예로, 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욥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러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 어떤 것도 배울 수 없었다. 물론 순종은 배울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한다.

“나의 영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는구나(욥 17:1).”

욥과 같은 성경의 인물도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욥의 고백처럼 자신의 영을 소멸하는 법만 배운다.

또 하나, 고난의 학교의 특징은 사람을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면의 수업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학교 수업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디자인된 수업이다. 곧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세상에서 무언가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친다. 혹은 세상에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들을 가르친다. 어쩌면 더 훌륭한 인재로 쓰임 받기 위한 수업이다.

하지만 이런 수업의 가장 큰 단점은 많은 지식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기 자신은 언제나 수수께끼 상태로 있다. 내가 누구인지 이 근본적인 물음에는 어떤 답변을 하지 못한다.

바람이 거대한 배를 움직이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강이 물레방아를 움직이지만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인간도 4차 산업 혁명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성취할 수 있으나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의 바다에 둘러싸일 수 있다.

반면 고난은 사람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이 수업은 내면의 수업인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사람은 절망 중에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자기 자신을 지식의 바다에 익사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의 오락을 즐기며 고난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고, 세상의 놀라운 업적을 세우며 고난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고, 지식의 바다에서 헤엄치며 고난을 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안에서 배움이 시작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난의 학교에서 수업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 수업은 내 속에 있는 ‘속사람’의 수업이다.

그렇다면, 그때 누가 선생일까? 바로 고난 자체가 선생이다. 이 학교에서는 고난이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은 수업을 참관하는 분이시고, 순종은 요구되는 시험이다.

이 학교에서 수업의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 아마 인정할 것이다. 고난은 밖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고난이 속사람 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수업이 시작된다. 일단 고난이 사람을 공격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사람이 고난에 저항한다는 것이다. 고난이 자기 속사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인해, 고난이 교육을 실행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고난의 학교의 특징을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세상의 지혜도 고난에 대처하는 많은 치료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치료법은 그들의 몸을 구원해도 영혼을 죽이는 우울한 특징이 있다.

또한 이런 지혜는 고난당하는 자를 격려하는 많은 치료법도 알고 있다. 세상에 나가보라.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치료법들이 우리의 몸은 기운 나게 해도, 우리의 정신을 잠깐 활력을 돋게 한다 해도, 영혼을 갉아 먹는 우울한 특징이 있다.

오직 고난 중에 자기의 속사람을 돌아볼 때, 그래서 고난이 우리의 속사람을 가르칠 때, 이런 영성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영원을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은 주님께서 고난당한 것처럼 그가 당한 고난을 통해 기꺼이 배우기 원할 대,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만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것은 그가 영원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교육받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은 고난의 수업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뢰할 수 없는 세상에서 세상에 대해 아무리 많은 것을 배우고, 그 속에서 많은 고통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고난의 수업도 아니고, 세상에 대하 많은 지식을 쌓은 것뿐이다.

아이가 엄마와 하나인 채로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때, 아이는 이제 젖을 떼야 한다고 말하듯,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 젖을 떼야 한다. 곧 이 세상과 이 세상의 것들로부터 젖을 떼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일로부터, 세상에 의해 쓰라림을 당하는 일로부터 젖을 떼야 한다. 영원을 위한 배움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고난의 학교는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배우는 ‘조용한 수업’이다. 이 학교에서의 수업은 항상 조용하다. 이곳에서 학생의 관심은 많은 과목들로 분산되지 않는다. 오직 단 한 가지의 것, 순종만 배우니까.

학생의 관심은 방해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홀로 하나님 앞에 있으니까.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