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세움 고대 로마 제국 핍박 초대교회
▲로마 콜로세움. ⓒunsplash.com
우리 교회 주소는 비아 퀸틸리(Via Quintili)이다.

퀸틸리 가문의 퀸틸리 형제는 로마의 미친 황제인 콤모두스 시대 활약했던 뛰어난 집정관이다. 교회 주변의 주소들은 모두 공화정 시대 유명인사들의 이름들로 명명했다.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 호민관, 재무관, 장군, 법무관 등등. 그만큼 로마인들은 공화정 시대를 흠모하고 있는지 모른다.

생각해 보면 로마가 쇠퇴의 길로 걷게 된 것은 영웅 카이사르(시저)로부터다. 그는 공화정을 뒤엎어버리고, 1인 권력의 집중 제체로 전환시킨 자다. 마치 현재 중국의 국가 주석 시진핑처럼….

공화정 시대에는 국가의 어려움이 일어날 때 원로원에서 결의하여 집정관을 선출하고, 그 임기는 6개월이었으며 한 번 더 연장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제도를 카이사르는 파기해 버리고, 스스로 종신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정 로마시대 활동했던 퀸틸리의 이름을 중요한 길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그만큼 그가 탁월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퀸틸리 가문의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는 아주 특별한 형제로 유명하다. 대체로 형이 똑똑하면 동생이 조금 못하고, 아니면 반대인 경우가 흔한데,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학문, 직업, 관심과 취미까지도 같았다. 막대한 재산이 있었음에도, 이해 관계로 서로 다투지도 않았다. 로마의 최고 지위인 집정관도 형제가 차례로 역임하고, 원로원 의원도 사이좋게 함께했다. 그래서 로마에서 존경받는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
이들의 집이 아피아 안티카(Appia Antica) 길가에 있었는데,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들어가 보았더니, 입이 딱 벌어질 정도이었다. 개인 집 치고는 터가 지나치게 넓고 집이 궁궐처럼 웅장하고 화려했다. 개인 목욕탕도 있는데, 마치 황제들의 목욕탕과 버금 갈 정도로 대단하였다. 이런 놀라운 개인 저택을 보면서 의구심이 일어났다.

‘꼭 이런 식으로 대 저택을 건축했어야 할까?’ 라는 의구심이다. 그토록 지혜로운 형제들이 말이다. 이 시기는 로마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미친 황제’로 역사가들의 가십거리로 사용하는 콤모두스 황제가 다스리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황제에 의해 역적 모의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쓴 채 죽임을 당했고, 전 재산을 빼앗기고 말았다.

로마의 황제가 부자의 재산을 강탈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즉 역적모의에 가담했다는 누명이다. 이런 것은 세계가 공통일 것이다. 적당히 증거자를 몇 명 세우면 일사천리로 엮이게 된다.

콤모두스는 누군가? 아버지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의 마지막 황제로 훌륭한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다. 그는 게르만 장벽을 방어하기 위해 말을 타고 전선을 다니면서 번뜩이는 단상들을 메모한 내용들이 지금도 서점에 놓여 있고, 현대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글을 남긴 현명한 황제이었다.

그런데 아들은 전혀 달랐다. 아들은 로마의 황제 가운데 학문을 멀리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학업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검투사 경기에 빠져 있었다.

검투사 경기가 당시에는 가장 인기 있는 경기였기에 황제가 즐긴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콤모두스는 자신이 직접 갑옷을 입고 경기장에 나가서 싸우는 황제로 유명하다.

무려 735번이나 피 터지는 싸움을 했다. 죽고 죽이는 경기가 검투사 경기다. 아마 그가 행한 경기는 100전 100승이었을 것이다. 누가 감히 황제가 검투사로 나섰는데 그를 이길 수 있었겠는가!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황제가 검투사 경기 중 죽는 것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픽션이다. 황제는 항상 승리했고,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는 말이 있듯 검투사의 공동 기금에서 수당을 받을 정도로 도저히 이해 불가한 자였다.

그 금액이 상당하였기에,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금을 부과해야 될 정도이었다. 그러니 점잖은 원로원 의원들은 얼마나 눈살을 찌푸렸을까?

더구나 그는 수많은 소년소녀들과 궁에서 어울리느라 정사는 돌보지도 않았다. 이런 미치광이 황제를 보필해야 하는 두 형제는 눈치 없이 왜 그런 큰 저택을 건축했을까 싶다. 눈치가 없으면, 21세기에도 절대로 권력의 실세가 될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다.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담당 교수님의 안색을 보고 기분을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화장실을 갈 상황인데, 이번에는 큰 것을 볼 것인지를 파악하고 화장지를 가져가 화장실 앞에 대기할 수 있는 제자라야, 졸업 후 시간 강사자리라도 한 자리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유능하고 백성의 사랑을 받던 집정관 형제는 왜 황제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을까? 집을 지을 때 으리으리한 저택을 짓지 않고 평범하고 소박한 집을 지었다면, 태풍을 피해갈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돈이 넘친다면 곡간에 쌓아놓고 가난한 원로원을 돕거나 둘이서 조용히 기뻐했다면 후에 역적으로 몰리지도 않았을텐데 말이다.

당신들이 역적모의에 고발당하여 오랏줄에 묶여 형장으로 갈 때,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이 눈물 뿌리며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 얼마나 후회와 분노의 피눈물을 흘렸을까 싶다. 차라리 그 돈을 모두 버리거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걸 그랬다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눈치 보지 않음으로 그 귀한 재능이 땅 속에 묻히게 됐고, 더 살아서 국가를 위해 많은 일을 해야 할 집정관 형제가 억울하게 삶을 끝내야 했다니 너무 안타깝다. 막시무스 형제 집정관님!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