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본 글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한 번 구원받은 자는 결코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논지 그대로를 살린 글이며, “구원받은 자도 지옥갈 수 있다”는 망극한 말을 염두에 두고 쓴 글입니다.

◈단번의 영원한 속죄에 의존된 구원

구원의 본의는 ‘하나님의 진노에서의 해방’을 뜻합니다. 그리고 ‘구원’을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음’이라고 말하는 것은(벧전 1:2, 히 10:22),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므로 종말론적인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룬 구원의 완전을 강조하기 위해, ‘단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고 말씀합니다.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셨습니다(히 9:12).” 이렇게 단번에 이룬 속죄는 다시는 죄값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연유로 다시 죄책을 요구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의 ‘단회성’과 ‘영원성’이 부정됩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영원한 언약인 구원이 어떤 경우에도 좌절될 수가 없음을 강변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멸망당한다면 우리가 믿고 맡길 만한 그리스도의 언약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만일 그분의 보혈이 효과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보혈의 효력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것이 한 동안만 우리를 구속할 뿐 결국에는 멸망당하도록 허용한다면 보혈의 가치가 무엇이란 말인가? 보혈이 우리의 죄를 단지 몇 주 동안만 지울 뿐 나중에 죄가 다시 돌아와 우리 안에 거하게 허락한다면 갈보리의 영광은 무엇이며, 예수님의 상처에서 나오는 약과 광채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구원 탈락을 말하는 이들은, 구원을 그리스도의 피보다 인간의 책임에 더 의존시키기거나, 아니면 둘을 동등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에 있어 인간의 책임은 ‘그리스도의 피’에 인간의 ‘능동적(active) 책임’을 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유일한 빙거인 ‘그리스도의 피’에 피동(passive)된, ‘복속적인(subjective) 책임’일 뿐입니다.

행위구원론자들이 그들의 논지의 근거로 들이대는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 역시, 구원에 대한 ‘능동적인(active) 책임’을 지라는 뜻이 아니라 ‘피동된 능동(passive activation)’의 책임을 하라는 뜻입니다.

인간 행위의 피동성이 간과될 때 필연적으로 ‘행위 구원’으로 흐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피동적 능동성(passive activation)’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빌 3:12)”입니다.

◈구원의 보존 개념이 구원 상실을 불허합니다

구원은 ‘단회성’ 개념과 함께 보존한다는 ‘지속성’ 개념을 함의합니다. 구원의 이 보존(preservation) 개념이 구원을 안전하고 영속적이게 해 줍니다. 실제로 ‘구원(sozo; soteria)’의 원어적 의미에는 ‘구원하다’와 함께 ‘보존하다’는 뜻이 함의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존(preservation)’은 당연히 하나님에 의한 ‘피동형’입니다.

반면 구원의 상실을 말하는 이들은 구원을 종말론적이고 유기적인 개념으로 보지 않고, 한시적(temporary), 섹터(sector)적인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한시적인 구원을 지속시키는 책임 역시 인간 스스로에 의존시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원’은 물론, 그것의 ‘보존’도 하나님이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요 17:11-12)”.

하나님은 택자를 구원하여 죄된 세상에 그냥 팽개쳐놓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끊임없이 악에서 건지시고 보호하십니다(고후 1:10).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이유는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아들의 피로 된 ‘큰 구원(히 2:3)’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연합 개념이 구원 상실을 불허합니다

‘구원’은 ‘연합’ 개념을 함의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엡 5:23)”.

이 구절들은 구원받은 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됨’을 뜻하며, 이 연합 개념이 구원 상실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구원 상실은 그와 한 몸을 이룬 그리스도에게서 찢겨져 나오게 하므로, 둘 모두의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바람을 피웠지만,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그녀를 버리지 못하게 하신 것은(호 3:1-3),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 19:6)”는 말씀에 근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된 성도는 절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예표합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에는, 아내가 부정을 저지르면 그를 버릴 수 있다는 명문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마지못해 그렇게 한 것이고(마 19:6-8), 최선은 그런 부정한 배우자와도 갈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하나 된 부부의 나뉨을 불허하신 하나님이 구원받아 그리스도와 한 몸된 성도에게서 잘못이 발견된다고, 그에게서 나눠지게 하실 리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가 한 몸 된 그리스도에게서 찢겨져 나오는 구원 상실은 인간의 죽음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이기도 하기에 절대 허락될 수 없습니다.

◈은혜가 구원을 지켜냅니다

성도가 자신의 구원을 든든히 하는 것은, 구원에서 떨어질까 이를 악물고 구원을 지켜냄으로서가 아닙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지배아래 있는 성도에게는 더 이상 구원의 인과(因果) 법칙에 근거한 구원 상실의 두려움 따위는 없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이 그의 구원을 든든히 해 줍니다(벧후 1:5-10). 자신은 주님만 사랑하고 그의 소유가 되려고 애썼을 뿐인데, 그것이 그의 구원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소유되는 것보다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은 없다는 성경의 원리(사 43:1-2)를 떠올리게 하며, ‘구원’의 ‘구속(救贖)’ 개념과도 맞아 떨어집니다. 사실 ‘구속’은 ‘하나님의 소유됨’을 뜻하며(고전 7:23, 계 5:9), 누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소유됐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으며, 그 소유됨이 구원의 안전 보장입니다(요 10:28-29).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그가 혹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는 경우에도 구원에서 탈락될까 하는 두려움에서 용력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을 저버린데 대한 회한이 그의 마음을 추스려 새출발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모르고, 오직 비인격적인 ‘구원의 인과(因果) 원리’에만 사로잡혀 구원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붙들린 신앙은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며, 구원을 보장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도 유다가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벗어나지 마라, 유 1:21)”는 말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뜻이며,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의 능력의 원천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향취가 구원을 지켜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께만 향취(a fragrant aroma, 엡 5:2)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그러합니다(고후 2:15). 솔로몬은 그리스도를 ‘향기름(perfumes)’에 비유하며, 성도의 신앙 열심은 율법의 고무에서가 아닌, ‘향기름’ 같은 그리스도의 향취에 매료됨으로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아 1:3)”.

‘십자가의 전달자’라는 CCM에 ‘보혈의 향기’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난 지극히 작은 자 죄인 중에 괴수/ 무익한 날 부르셔서 간절한 기대와 소망 부끄럽지 않게 십자가 전케 하셨네/ 어디든지 가리라 주 위해 서라면 나는 전하리 그 십자가/ 내 몸에 벤 십자가 그 보혈의 향기(The Fragrance of Blood)’

하나님은 성도들을 십자가 보혈의 향취에 중독시켜, 벌이 꿀을 보고 달려들듯이 그리스도께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그리스도에 대한 집착이 구원의 상실을 허락지 않습니다.

귀신 들린 딸을 둔 가나안 여인이 그랬듯(마 15:22-28), 설사 하나님이 그를 내친다 해도 그의 사랑의 향취에 매료된 성도는 그를 떠나지 못합니다. 성도가 그렇게 갈망하는 천국 역시 그곳에 못 들어가면 어떡할까 하는 두려움과 안달함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사랑하여 내 목숨을 버렸다”는 어린양의 아가(雅歌)를 듣고 따르다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곳입니다(계 14:1-4).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원리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 84:5-7).”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