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감옥이나 수용소뿐만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학교에도 일본 군인과 경찰의 더러운 군홧발이 마구 드나들었다. 총칼을 번득이면서. 교사들은 성깔 사나운 그들의 쌍욕을 얻어먹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대담한 남강이라도,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감시와 압제를 피해 우리 말과 역사를 제대로 가르칠 방도가 없었다. 거짓으로 미화된 일본의 역사와 말글을 울며 겨자 먹듯 가르치느니 차라리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일본은 남강 같은 강직한 애국지사를 회유하여 자기네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치며 괴롭혔다. 만일 남강 같은 애국지사를 한 사람 끌어들이면, 수많은 국민을 일본에 동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여러 명의 유명한 조선 사람들을 온갖 위협이나 감언이설로 끌어들여 자기들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화려하게 선전하는 데 써먹었다.

‘오, 지혜롭고 사랑 깊으신 예수님,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옵소서!’

남강은 학교의 예배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는 오래도록 묵상에 잠겼다.

오 주여! 저를 민족의 도구로 써주소서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꾸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남을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남을 이해하고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참다운 삶을 얻으리니
오 주여! 저를 조국의 도구로 써주소서

어떤 큰 문제에 부닥쳤을 때 자신의 좁은 머리로 애써 해답을 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머릿속과 마음속을 텅 비운 채 우주 창조주의 지혜를 받는 것이 옳다는 것을 그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다.

이듬해, 남강은 52세의 나이에 세례를 받고 평양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이전에도 교회에 간혹 나갔으나, 바쁜 몸이다 보니 성실히 믿진 못했다. 그런데 옥중에서 온갖 고통을 겪은 까닭에 인간의 미약함을 절실히 느꼈다.

교리를 모르고는 어두운 밤에 등불 없이 걷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고 오십이 넘어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과 공부한다는 건 웬만한 결심이 없이는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감옥에서 느낀 바에 의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무지를 깨치고 진리로 나아가는 것, 하나라도 더 배우고 깨우쳐 학생들을 이끌어 주고 싶었다.

그러면 언젠가 자기가 죽더라도 그들이 뒤를 이어주지 않을까? 마치 한 알의 씨앗에서 나와 자란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듯….

그 후 남강은 교육뿐 아니라 종교를 통한 민족운동에 적극 나섰고, 그의 활동 거점은 학교에서 교회로 넓어졌다. 남강은 조만식과 함께 오산학교와 교회에서 기도하며 민족의 장래를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오직 학교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온 나라로 퍼져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 주길 바랄 뿐이었다.

한 번은 어느 학생이 말썽을 피워 근신 처분을 받았는데도 반성하는 빛이 없었다. 그래서 교사들이 퇴학 처분을 내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남강은 심사숙고한 후 말했다.

“사나운 망아지라야 잘 길들이면 명마가 되는 것이오. 길들일 가치가 있는 사나운 망아지를 내쫓는 건 좀더 생각해 봅시다.”

결국 그 학생은 남강의 배려로 마음을 고쳐먹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적성을 잘 살펴 장점을 살려 주는 교육철학을 보인 일이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