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주님은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의 짐은 가볍지 않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가벼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벼운 짐을 무겁게 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가벼운 짐을 무겁게 지는가? 조급한 사람이다. 조급한 마음은 언제나 시간에 쫓긴다.

토스트 기계에 들어간 식빵이 조금만 늦게 나와도 버럭 화를 낸다. 문을 열기 위해 비밀번호를 누르다 잘못 눌러 열리지 않을 때도 문을 부수고 들어갈 것만 같다. 그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은 그가 아주 무거운 짐을 진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듣고 나면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조급한 마음은 가장 가벼운 짐도 무거운 짐처럼 보이게 하는 속성이 있다. 나는 보통 이것을 아이를 키우다 배운다. 아이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바닥에 뒹굴면서 운다. 무엇 때문에 그런지 물어봤더니 퍼즐을 맞추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두 살배기 동생이 퍼즐 판을 뒤엎은 것이다. 어른들은 이런 광경을 볼 때, 가끔 웃기도 한다.

아마 아이 입장에서 보면, 부모의 웃음이 조롱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른 입장에서 아이의 짐은 가볍다. 퍼즐은 다시 맞추면 된다. 그러나 조금한 마음은 마치 아이와 같아서 가장 가벼운 짐도 무겁게 진다.

조급한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평 역시 마찬가지다. 불평하는 사람은 가벼운 짐을 무겁게 진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의 사는 방식은 마치 아이와 같다. 가끔 웃음이 터져 나올 때도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화를 내거나 불평할 때, ‘어른 아이’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공통적 특징은 가벼운 짐을 무겁게 진다는 데 있다. 아무리 가벼운 짐도 무겁게 보이도록 마술을 부린다.

무거운 짐을 무겁게 지는 사람들도 있다. 용기 있는 사람이다. 선(善)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용기가 함께 한다. 용기는 언제나 선한 사람의 편에 선다. 오직 악(惡)만이 비겁하다. 복음에 의하면, 오직 악만이 하나님을 보고도 두려워 떤다(약 2:19).

용기는 언제나 악에 저항한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무겁게 질 뿐, 가볍게 지는 것은 아니다.

인내는 어떤가? 인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참는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있는지가 눈에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인내는 언제나 말이 없다. 그 침묵이 이미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용기처럼 저항하지 않지만, 악이 얼마나 강한지를 끝까지 그 악을 폭로하는 것은 인내다. 그러나 역시 무거운 짐을 무겁게 질 뿐, 가볍게 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가? 그것은 온유다. 온유한 사람만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진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용기와 인내는 마치 철의 힘과 같다. 강한 것을 거칠게 다룬다.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거칠게 다룰 수 있는 철의 힘도 대단하다. 하지만 철의 힘을 갖고도,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을 부드럽게 다룰 수 있는 온유는 참으로 놀랍다. 온유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간다.

키에르케고어의 의하면, 온유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정신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소개되지 않는 정신이다. 예를 들어, 섬김의 리더십은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많이 회자되었는가.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심지어는 기업에서도 섬기는 리더십을 배우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온유는 가장 탁월한 셀프 리더십이다.

주님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가셨는가. 누군가 가장 무거운 짐을 지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고, 그들을 돕고, 병든 자를 고치고, 비참한 자들을 찾고, 절망한 자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 그는 그 짐을 가볍게 지고 가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배려의 무거운 짐을, 타락한 인류를 위해 배려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 짐을 가볍게 지고 가셨기에,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마 12:20).

용기는 시끄럽다. 인내는 침묵한다. 하지만 온유는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진다. 용기와 인내는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는지 눈에 보인다. 그러나 온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기 때문이다.

조바심이 많은 성급한 사람이나 불평하는 사람은 내일 일을 걱정한다. 그들은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지는 항상 관심의 대상이다. 그들은 예수 믿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데도 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지, 심지어는 기도 중에도 불평한다. 그러나 주님은 성공을 가져와 염려를 폐지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다만 그때 내일에 대해 염려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갈 수 있다. 저 세상 밖을 나가보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먹고 살 것이 없어 굶어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가?

하지만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 평생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은 많지 않은 반면, 염려하는 자는 너무 멀리 봄으로써, 저 미래를 너무 멀리 봄으로써, 생계에 대한 염려가 평생토록 지속될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가벼운 짐을 무겁게 지고 간다.

하지만 힘들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이 짐을 지기로 굳게 결심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그리하여 인내하며 ‘내일의 짐’을 진다면, 이것 역시 무거운 짐을 무겁게 질 뿐이지 가볍게 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교활하고 강한 적은 시간이다. 특별히 시간이 공격에 집중할 때, 그 시간이 ‘미래’라고 일컫게 될 때, 더욱 우리의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때 시간은 가까이는 볼 수 없지만, 멀리서 보면 그 모습이 더욱 끔찍한 것으로 보이는 안개와 같기 때문이다.

인내가 눈으로 미래의 무게를 느낄 때, 눈은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본다. 그러나 온유는 내일조차 염려하지 않는다. 온유함은 재빠르게 눈을 안으로 돌린다. 따라서 온유함은 미래의 무한성을 보지 못한다.

온유함은 미래를 ‘내일’이라고 부른다. 내일은 미래이지만, 가능한 한 가깝게 볼 수 있는 미래다. 그래서 내일은 조용하게 앞으로 전진한다. 그래서 온유함은 아주 섬세하게 미래를 다룬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완전히 자유롭다면 우리가 더욱 가까이 갈수록 위협적인 모양을 띠고 있는 안개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더욱 가까이 갈수록 또한 미래를 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온유함이 내일조차 염려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것은 시간의 짐, 미래의 짐을 가볍게 지는 것이 아닌가?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자기 시험을 위하여>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