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원
▲최종원 교수는 “서구 교회사가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넘어서서, 현재 한국교회가 서 있는 지점에서 초대교회사를 통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지점들을 짚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쾌도난마와 같은 해답만을 즐겨 듣고, 믿음의 확신만을 요구받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쓸데없이 위험한 고민만 안겨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초대교회도 성장과 박해의 시기에 이 고민은 비껴갈 수 없었다. 순교를 각오하면서까지 지켜야 했던 그들의 믿음이 맹목이었는가, 아니면 진리를 위한 헌신이었는가?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에서도 동일한 가치가 주장될 수 있는가?”

신약성경 이후, 사도 시대를 거쳐 313년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공인되고, 그 ‘신의 도성’ 같던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를 보통 중세 전 ‘초대교회’라 부른다. 이 시기를 다룬 ‘초대교회사’ 서적들이 많고 종류도 다양하지만, 최근 나온 최종원 교수의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는 단연 화제를 모으고 있다. 단편적인 ‘교과서적’ 지식 전달을 뛰어넘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우리의 영원한 구호의 참 의미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렇듯 교리 형성사 중심의 기존 초대교회사 도서들과 달리 당대 사회·정치·문화 등의 관점에서 바라본 접근법은 저자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저자 최종원 교수(VIEW)는 일반 대학원에서 역사학(서양 중세사)을 전공하고 신학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다. 저자는 초대교회가 성장한 것은 당시 로마 제국이 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 요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한 다음,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시사점을 질문한다. 초대교회 각 시대의 이야기가 주제별로 묶여있고, 잘 언급되지 않던 ‘동방 교회’, ‘이단 운동’, ‘수도원 운동’ 등도 다루고 있다. 지난 달 진행된 최종원 교수와의 인터뷰를 두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회계학에서 역사학으로, 역사학에서 교회사로, 한국에서 캐나다로 방향을 바꾼 ‘지적 여정’이 궁금합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신앙을 갖게 됐습니다. 거창하게 ‘지적 여정’이라기보다, 신앙을 갖게 되면서 세계관이 바뀐 것이지요. 대학 2학년 때 기독교 사학자인 이석우 교수님이 ‘역사학 입문’ 수업에서 어거스틴의 ‘역사의 하나님(God of History)’에 대해 말씀하셔서, 10년 안에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지만, 유학을 가거나 전문 학자가 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학과 서양사의 세례를 받으면서, 제가 서 있는 기독교라는 진영을 바깥에서 볼 수 있는 훈련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단체에 근무하다 퇴직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으로 가서 중세 종교와 제도 교회를 공부했습니다.

제 관심은 신학보다 제도 교회 역사가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통찰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와 신학의 관점을 넘어, 순수하게 종세와 종교개혁, 제도 교회사를 공부했습니다. 신학적 배경이 없었지만, 한국에 돌아가면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돌아와서 모교인 경희대와 제주대에서 역사를 가르치다, 우연한 기회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회사 교수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는 독학을 한 셈입니다. 신학을 하지 않았기에, 조금 다른 시각에서 제도 교회를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제 관심은 늘 오늘의 한국 제도 교회가 사회 속에서 여전한 필연성과 적실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에 있습니다. 캐나다로 떠난 것은 그것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한국 신학계에 대한 절망이랄까요? 신학을 했다면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외부자로서 내부에 들어가서 보니 생각 외로 변화가 힘들어 보였습니다.

VIEW에서 목회자들이 70%인 학생들에게, 외부자의 시선,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의외로 수업 가운데 공감을 얻는 경우가 많은데, 제가 볼 때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이야기가 신학을 하신 분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낯선 시선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와 사회, 교회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일관된 시각을 제시하고픈 나름의 욕구가 있습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지난 7월 5일 출판기념회 강연 모습. ⓒ이대웅 기자
-중세사를 전공하셨는데, 초대교회사 저서부터 내셨습니다.

“중세교회사를 쓰는 게 먼저이겠지만, 중세사가 아닌 중세교회사라면 필연적으로 초대교회사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중세 교회가 거의 부정되는 상황입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가톨릭에도 구원이 있는가?’였을 정도입니다.

한국교회 정서 속에 가톨릭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한데, 이는 우리의 전제를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 개신교회는 가톨릭교회를 부정하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나왔고, 중세 교회 역시 초대교회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연결성을 제시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중세 교회 1천 년은 깡그리 지워버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종교개혁 역시 떼어내서 볼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흐름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전 중세 교회에 대해 이해하려면 그 뿌리인 초대교회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전문가가 아니지만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방교회 즉 헬라어로 된 신학이 어떻게 서방 가톨릭 교회, 즉 라틴어로 된 신학으로 바뀌었는가를 알아야, 라틴어 신학에서 영어와 독일어인 종교개혁 신학으로의 전환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대와 중세 교회 사이 ‘언어의 전환’이 일어났고, 종교개혁 역시 그렇습니다.

이는 언어가 바뀌면 신학 자체와 틀도 굉장히 차이가 난다는 의미입니다. 동방 교회에서도 삼위일체와 구원 등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 함의는 서방 교회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자들의 언어도 그런 면에서 차이를 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일례로 종교개혁자 멜랑히톤은 ‘적의 적은 동지’라며 동방 교회와 연맹을 맺기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동방 교회 성도들에게 ‘이신칭의’라는 언어가 굉장히 생소한 것이었기에 결국 결렬됐습니다.”

-역사학자로서 교회사를 공부해 보니 어떠셨나요.

“교회 역사를 통시적으로 봐야 그 속에서 유의미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내가 오늘 믿는 신조와 교리를 확인하기 위한 공부, 우리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공부에 매몰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사는 신학교에서 가장 재미없는 과목이 돼 버렸습니다.

제 관점에서 교회사는 각각의 컨텍스트에 맞게 사회 속에 통합돼 가는, 교회가 그 시대에서 유의미한 실체로 되어가는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당시 그리스에서 철학에 통합돼 유의미한 결실을 맺었고, 로마에서는 제도 속에 통합돼서 유의미한 신학을 만들어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하나의 문화를 꽃피웠고, 근대 영미권에서도 근대적 형태의 교회가 나오는 등 전혀 새로운 형태의 교회들을 이뤄냈습니다.

우리가 오늘 교회에 대해 고민해야 할 부분은 신학적 이슈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21세기라는 컨텍스트 속에서도 교회가 유의미하게 착근(着根), 뿌리를 내리고 수용될 수 있느냐입니다. 교회와 사회를,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지 않고 이 사회 속 담론에 참여하는 관점에서의 교회사와 역사로 읽어가자는 것이 이번 책을 쓴 이유입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책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368쪽, 16,000원. ⓒ이대웅 기자
그리고 단순히 거기 그들의 이야기를 넘어, 오늘 여기 우리에게 주는 유의미한 함의를 찾아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마찬가지로 중세 교회를 통해서도 오늘날 교회에 줄 수 있는 함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그 함의를 루터와 칼빈 같은 특정 종교개혁자들이나 특정 신조를 공유하는 그룹을 통해서만 확인하고자 했고, 그래서 시대착오적으로 적용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조금은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본다면,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유산도 교리를 넘어 굉장히 풍성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만 해도 종교적·교리적 관점에서만 보면 굉장히 제한적이지만, 그 총회가 영국과 유럽의 민주주의, 의회 제도의 형상 과정에 미친 영향은 굉장했습니다. 당시 교파들이 발전한 것이 지금의 정당정치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산을 잘 지킨다는 것이 문자적으로 고수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그 실체에 좀 더 천착한다면 오늘날 사회에서도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면에서 적합성 있는 유산을 훨씬 많이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아쉬웠습니다.”

-초대교회 하면, 한국교회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칩니다.

“그 구호가 애매모호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지만,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주장은, 초대교회에 이상적인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원시 공산사회 형태인데, 모두가 선뜻 동의할 수 있을까요? 물론 시대마다 프란체스코회처럼 그런 청빈을 주장하는 극단적 주장들도 있었지만, 이상과는 별개로 시대 속에 보편적으로 녹아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초대교회에서 끄집어낸 유의미한 가치는, 당시 기독교가 주장한 가치가 그 시대에서 필요로 한 가치였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를 말할 때 빠른 성장 비결을 묻곤 하지만, 그 질문을 뒤집어 볼 수도 있습니다. ‘왜 그 사회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을까? 어떤 가치 때문에 그랬을까?’

그렇기에 교회 역사란 교회 내의 이야기만이 아닌, 교회와 사회가 상호 작용한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사회와 어떤 유의미한 소통과 통합을 해낼 수 있는지, 초대교회를 통해 재점검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비난받고 있지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가치에 부합하고자 노력한다면 초대교회와 종교개혁 교회가 그랬듯 여전히 유의미한 담론을 형성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우리 사회에서 현재 첨예한 갈등, 그것이 이슬람이든 성소수자이든 난민 문제이든 여전히 기독교에서 품어낼 수 있는 주제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문화적 우월성을 기반으로 한 타자 배제의 헬레니즘을 극복했고, 혈통적 우월성을 내세운 인종적 유대주의도 극복했기에, 대안적 세력으로 수용될 수 있었습니다.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이라는 신학자는 초대교회사를 ‘정복의 과정’이라 표현했는데, 선뜻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복이라기보다 교회가 사회 속에서 수용된 과정이고, 그 시대 사람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다를 수 있지만, 사회역사적으로 보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만큼 보편의 정서와 가치, 질서에 부합했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오늘날 교회가 사회 속에서 부정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편의 가치에 천착하는 면을 너무 외면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리라는 것에 숨어버린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최종원 교수는 초대교회를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한 공동체’로 요약했다. ⓒ이대웅 기자
-초대교회사 책들의 목차가 천차만별이라고 하셨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르면서도 특정 주제별로 묶은 교수님의 계기나 목적은 무엇인가요.

“시대별로 핵심을 제시한 것입니다. 특징이라면 교리 형성 부분은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것인데, 이는 의도적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동방·서방 교회를 분리해서 다뤘습니다. 동방(헬라)·서방(라틴) 신학을 구분한 이유는, 우리 안에 동방 교회 전통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라틴 교회 형성을 이해하려면, 동방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종교개혁가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그 초대교회가 문자적으로는 헬라어 전통의 ‘동방 교회’였습니다. 종교개혁기 에라스무스는 라틴어 불가타가 아닌 헬라 성경을 원전으로 연구하면서, 가톨릭의 7성사(세례, 견진, 성체, 고해, 병자, 성품, 혼인)가 근거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로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 있는 라틴 교회의 전통과 더불어, 전혀 별개로 구분되는 동방 교회 전통에 대한 개괄적 이해가 선행돼야겠다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7성사 중 ‘결혼’이 있는데, 그 근거가 에베소서 속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엡 5:31-32)…’ 입니다. 이 비밀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미스테리온’인데, 라틴어에 상응하는 조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크릿’이 되고 성사, 즉 ‘새크라멘트(sacrament)’가 됐습니다.

그러나 ‘미스테리’ 즉 신비라는 것은 말로 이해해서 설명할 수 없고 알려고 할수록 복잡해지는 것인데, ‘시크릿’은 해답을 알면 궁금증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뉘앙스 차이가 엄청납니다. 헬라어에서의 결혼은 ‘신비가 깊다’는 뜻이었으나, 라틴어가 되면서 ‘위대한 성사’인 것처럼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이 서양에서는 교회가 치르는 중요한 의식이자 구원에 이르는 7성사 중 하나가 됐습니다. 언어의 변환이 가져온 결과가 이렇게 큽니다.

종교개혁도 이러한 헬라어 원전에 대한 고민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인문학적 소양이 오늘날 교회에 굉장히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고, 종교개혁의 인문학적 가치나 탐구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극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