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아,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해서 일구어 놓은 사업체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다니….’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멀리 산악지대로 먼저 피난시킨 가족이 모두 살아남게 된 것이었다. 부인이 흐느끼며 말했다.

“우리 공장과 상점이 다 불타 버렸으니, 이젠 어떻게 해요.”

“우리보다 더 비참한 사람도 많소. 여보, 가족을 잃고 통곡하는 사람을 보면서, 난 재산을 잃어 버린 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소. 난리 속에서 우리 가족이 무사히 살아남게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 아니겠소.”

전쟁 후 다시 납청정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예전에 사업하던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다시 사업을 일으켜 보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큰 일이라며 낙담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승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예전에 빌렸던 자금 액수와 이자까지 정확히 명세서에 기록한 후 철산에 살고 있던 오삭주를 찾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명세서를 꺼내어 오삭주에게 건네었다.

오삭주는 그것을 받아들고 조목조목 살펴보더니 이승훈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처럼 찾아준 일만 해도 고마운 일일세. 허허, 아직도 이렇게 올곧은 사람이 있다니…. 사실 내 돈을 가져다 쓴 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하지만 난리 후로 모두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거든. 야속한 생각에 속이 상하기도 했지. 그런데 자네가 이리 찾아주니 참 고마운 일이네.”

그러더니 오삭주는 갑자기 명세서를 화로 위에다 던져 불살라 버렸다. 이승훈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아니, 어르신! 이게 무슨 일입니까?”

“자네의 마음씨가 돈보다 더 귀하네. 난리통에 많은 사람이 목숨까지 잃었는데 이까짓 돈이 뭔가. 그러니 오늘로서 내게 진 빚은 깨끗이 잊어버리게나.”

그러더니 뜻밖에 묻는 것이었다. “사업을 다시 시작한다면 자본금이 얼마나 필요하겠나?”

이승훈은 어리둥절하여 머뭇거렸다. 그러자 오삭주가 차분히 말했다.

“다시 한 번 사업을 일으켜 보게나. 필요한 자금은 내가 대겠으니 염려하지 말고 심혈을 다해 성공시켜 보게.” 그는 이승훈의 손을 꼭 잡았다.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두 나라 사이에 이른바 마관조약이라는 것이 체결되었다. 청나라 세력이 우리나라에서 물러간 만큼 일본의 세력이 더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깊은 밤 이승훈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걱정스러운 나라의 앞날을 상상해 보았다.

부산과 인천항에 수많은 일본의 군함과 상선들이 드나들고, 우리나라 전역에 철도를 가설한 뒤 중요한 광산을 개발하고 산에 울창한 나무까지 모조리 베는 등 자원을 고갈시키고 결국엔 우리의 주권을 통째로 빼앗으려는 그들의 모습이 환하게 떠올랐다.

이런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면 우리 손으로 만든 자본의 힘을 확장시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얼마 후엔 서울과 평양에 운수회사를 설립해 운영했는데, 그건 우리나라 운수사업의 첫걸음이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조선의 큰 사업가로 떠올랐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은 50만 냥이 넘었다. 정보에도 밝아 어디서 어떤 물건을 사서 어디에 팔면 얼마나 남을지 꼼꼼히 조사해서 이득을 남겼다. 이승훈이 사들인다고 하면 물건값이 오르고 이승훈이 내다 판다고 하면 갑자기 값이 떨어질 정도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되었던 남강은 수년 동안 남의 집 사환 노릇을 하면서 살아야 했지만, 고난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인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되었다.

남국의 향그런 해풍 속에서 추억을 더듬던 남강은 바닷새들이 끼룩거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들은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날갯짓은 생존을 위한 무거운 몸짓임을 느낄 수 있었다.

“빼앗긴 나라에서 너희들의 자유인들 어찌 보장되겠니….”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