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하고, 동시에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구원)’가 없느니라…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심판)’, (사 43:11-13).”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며 동시에 심판에서의 구원자이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중국의 ‘창과 방패(矛盾)’ 이야기처럼,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면 건질 자가 없고, 그가 구원하면 심판할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엔 매사에 역할 분담이 있는데 어찌 하나님은 혼자서 심판자와 구원자라는 절대적 두 지위를 공유하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재판장 한 사람이 ‘정죄(심판)’와 ‘무죄(구원)’를 선포하듯 심판자 구원자가 하나임이 당연해 보입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사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구원하면 심판할 자가 없고, 심판하면 구원할 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두 지위의 공유자임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상반된 두 지위의 행사를 통해 당신이 유일한 심판자요 구원자 되심을 계시합니다. 구원하시면 건질 자가 없어야 그가 진정한 구원자일 수 있고, 그가 심판하면 구원할 자가 없어야 진정한 심판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구원했는데 그 구원을 무효화시킬 심판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진정한 구원자일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가 심판했는데 그 심판을 무효화시킬 구원자가 나타난다면 그는 진정한 심판자일 수 없습니다.

창(矛)과 방패(盾)이신 하나님은 누구에게는 구원자로, 누구에게는 심판자가 되어 그의 구원과 심판을 요지부동의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의 절대 주권자 됨을 천명하십니다.

◈피심판자가 되어 구원하시는 하나님

심판자이시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심판’과 ‘구원’을 역설적으로 성취하십니다. 곧 ‘구원’은 ‘심판’을 통해, 심판‘은 ’구원‘을 통해 역설적으로 성취하시면서, 심판과 구원을 같은 연장선상에 둡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택자를 대신해 ‘심판’을 받으시므로 택자를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흔히 심판 하면 ‘하나님이 죄인을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는 것’만을 생각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에게 내리시는 심판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심판받지 않는 한 진정한 심판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심판받지 않는 한 하나님은 인류를 다 심판하여 지옥에 보내도 당신의 진노가 풀어지지 않습니다. 악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받는 심판이 죄 삯이 못 된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들이 받는 저주와 고통이 죄 삯이 되어 효험을 발휘한다면, 고통이 멈춰질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를 받으면서도 그 저주가 자신들의 죄를 단 한 올도 없이하지 못하기에 저주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해 심판을 받지 않아 그들의 죄 값이 미지불된 상태에 있는 한, 하나님의 진노는 풀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택자가 구원받기 위해선 하나님 자신이 대신 심판을 받는 일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 해놓고는 하나님이 친히 수염소를 준비하신 것도(창 22:13-14), 하나님이 ‘죄값의 요구자’인 동시에 ‘응답자’이심을 예표한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값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분임을 시사합니다.

하나님이 택자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자신이 피(被)심판자가 되셨다는 내용들은 성경에 널려 있습니다. 2위이신 성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하신 것은, 성자 하나님이 택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하나님 자신)이 성부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므로 택자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신 말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을 지불하고 교회를 구원했다 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라는 말씀도, 성자 그리스도가 ‘심판’을 받아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자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렸기에, 택자는 값없이 구원 받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자기 구원을 위해 손쓸 틈도, 공력을 기울일 기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자’인 동시에 ‘심판자’ 되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진 이중적 역할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는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이시면서(시 23:1, 요 10:14) 친히 양이 되셨고(계 14:4),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시면서(히 5:10) 친히 제물이 되셨고(히 10:4), 죄값을 받아내는 채권자이면서(창 2:17, 롬 6:23) 죄값을 갚는 채무자가 되셨습니다(마 20:28).

무엇보다 그는 인류에게 생명을 시여하신 생명의 시여자로서(행 3:14) 자기의 생명을 바친 생명의 봉헌자가 되신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 9:26).”

이렇게 인간을 심판하시는 심판자께서 피(被) 심판자가 되셨고, 생명의 근원이며 시여자이신 이가 심판을 받아 죽으신 사실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러나 심판자께서 심판을 받아 이룬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롬 5:8, 요일 4:9-10).

많은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물 중 일부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감격해하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나 창조주로서 그가 창조한 피조물들의 생존을 책임지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동식물들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며(욥 38:41, 시 147:9, 마 6:30), 심지어 불의한 자들에게도 햇빛과 비를 주십니다(마 5:45). 이런 것들을 하나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주신 것만을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하나님 자신을 우리 위해 내어주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 이해를 초월하기에 이를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고전 2:12-13).

◈구원으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

이미 살폈듯 “심판과 구원을 동일 연장선상에 두었다”는 말씀은, ‘구원’은 ‘심판’을 통해, ‘심판’은 ‘구원’을 통해 그것들의 절대성과 견고성을 확보한다는 것과 더불어, 하나님 자신이 택자를 대신해 ‘심판’을 받으시므로 택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심판과 구원을 동일 연장선상에 두었다”는 말은 앞서 그것과는 전혀 상이한 개념으로, “구원으로 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나, 심판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는 말은, 구원으로(구원자 아들로)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심판의 기준을 ‘구원자’ 아들에 두었다는 뜻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하나님은 구원자 독생자를 믿는 자를 구원하시고, 구원자 독생자를 믿지 않는 죄 때문에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구원자(아들)를 안 믿어 심판을 받으니 결국 구원을 거부하여 심판받는 것이고, 이를 비약하면 ‘구원 때문에’ 혹은 ‘구원으로’ 심판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아 그의 모든 죄가 그대로 있어, 율법의 심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결정적인 심판은 그런 ‘율법적인 죄’ 때문에 아니라 아들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제공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곧 ‘구원 심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요 12:48)” 하신 말씀 역시,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생(구원)’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마지막 때 심판 내용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대를 ‘그리스도의 심판대(고후 5:10)’로 명명한 것도 인류를 심판할 기준이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아들였느냐 안받아들였느냐 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구원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죄이고, 무엇보다 구원을 주기 위해 흘리신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히 10:29)”죄입니다. 샬롬!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