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난민: 비현실적 인도주의가 초래하는 현실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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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랑>의 인도주의적 엔딩을 담당하는 두 주인공, 윤희(한효주 분)와 중경(강동원 분).
※ 지난 주에 이어 강동원, 한효주, 정우성, 김무열, 한예리 주연의 영화 <인랑>에 대한 박욱주 교수님의 리뷰를 싣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편집자 주

◈무거움의 증발: <인랑>의 문제적 결말

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인랑>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훌륭한 액션, 애매한 서사, 실망스러운 결말’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다.

<인랑>의 원작 애니메이션이 일단의 관객들 사이에 매니아적인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사와 화면 전반을 가로지르는 무거움, 그리고 그 무거움이 최고조로 압축된 비극적 결말의 여운 때문일 것이다.

애니메이션 <인랑(1999)>의 원작자 오시이 마모루(押井守)는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인 <공각기동대> 극장판(1995)의 감독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마모루 감독의 작품 대부분은 <인랑>과 같이 무겁고 현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감독 개인의 삶의 궤적이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모루 감독의 어린 시절은 마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다. 어려서부터 영화 제작에 매료되어 카메라를 사서 스스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당대 일본에서 제작된 SF영화 대부분을 섭렵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일본 도쿄 지역에 좌파계열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른바 ‘전공투(全学共闘会議)’라 불리던 학생운동단체에 가입했고,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비인간화되어가던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키웠다.

미대 졸업 후에는 몇 년간 변변치 못한 직업을 전전했다. SF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으나, 일본 영화산업의 열악한 현실 때문에 꿈을 접고 살아야 했다. 서른 살이 되어 <란마 1/2>과 <이누야사> 시리즈로 유명한 일본의 거장 여류만화가 타카하시 루미코의 작품 <시골별 녀석들>을 애니화하면서 겨우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후 감독으로서 작품의 흥행과 부진을 거듭하다, 1995년 개봉된 <공각기동대> 극장판을 통해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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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인랑(1999)>.
마모루 감독의 삶은 높은 이상과 그 이상을 좌절시키는 현실의 부조화 사이에 놓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스필버그 같은 SF 실사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으나 일본 콘텐츠 산업의 현실 때문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성공하는 데 그쳐야 했다. 실사영화 제작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연출력 부족과 주제의 난해함 때문에 흥행에 성공한 작품은 없다시피 하다.

사회적으로는 전범국으로서 느껴야 할 양심의 가책은 없이, 여전히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의 정치권과 전쟁 세대에 대한 환멸을 감내해야 했다. 여기에 더해 1980년대 버블경제 시기를 통해 일본 시민들의 천박한 자본주의 욕망을 확인하고, 인간 전반에 대한 실망감을 속으로 삭여야 했다. 마모루 감독의 대표작 전반에 제기되는 참된 인간성에 대한 물음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 역시 무거운 주제를 담아내고 있다. 개인과 약자에 대한 배려 없는 전체주의적 정치체제, 이런 체제에 희생된 자들(극빈층)과 저항하는 자들(도시게릴라 무장단체 섹트), 불안한 치안을 목전에 두고 권력다툼에 여념이 없는 국가기관들(특기대와 공안부), 이런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인간성 말살을 요구당하는 특수요원들, 이들의 공작에 이용되고 희생되는 이들 등, 온갖 부조리한 요소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작품 전반에 진중함을 더한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빨간 두건>의 원판 작혹동화의 모티프에 연결된다. 작품 전반의 색조가 흑색과 적색으로 구성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프로텍트 기어(인랑 요원의 무장 방탄갑옷)의 흑색, 그리고 안광의 적색은 작품 전반에 반영된 색조를 대표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흑색과 적색의 얽힘은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원작 애니메이션 <인랑>은 늑대 역할을 맡은 특기대 요원 후세가 소녀 역할을 담당한 공안부의 프락치 케이를 죽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둘은 이런저런 사건들 속에서 서로의 처지를 깊게 동정하지만, 특기대 특수요원 후세는 끝내 인간성 회복 욕망을 처절하게 부정하고 조직의 방침에 따라 정인(情人)을 살해한다.

애니메이션 <인랑>이 그 어둡고 무거운 색조와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외면받지 않는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비극적인 엔딩 장면이 주는 여운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끝내 잔혹한 늑대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 남성과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정인의 손에 죽는 여성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간성 상실의 현실이 초래하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비극을 압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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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의 엔딩 장면. 권력암투로 인해 정인(情人) 후세의 품에서 그에게 살해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한 여자 주인공 케이.
김지운 감독의 영화 <인랑>은 원작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소프트한 멜로적 엔딩을 선보인다. 그리고 원작에서는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된 액션 장면들을 다채롭고 화려하게 각색했다. 총기 매니아로 소문난 김지운 감독의 연출인만큼 총격 액션의 수준이 대단히 뛰어나다. 개인적으로 총격 액션만 놓고 보면 웬만한 헐리우드 영화의 총격신을 압도하는 수준이다.

다분히 흥행을 염두에 둔 처사일텐데, 그 부작용으로 원작이 전달하던 주제의식은 상당한 정도로 증발해 버렸다. 이는 시사회 관객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아쉽게 여기는 바다. 원작 애니메이션의 서사에 매료된 일부 관객들은 과연 엔딩의 비장미가 실사 영화에서 어떻게 재현될지 큰 기대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 문제적 엔딩 장면에는 김지운 감독의 낙관적 인간관이 반영돼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치열한 정보전, 인간성을 포기해야만 감행할 수 있는 배신과 폭력, 그러나 그 가운데서 끝내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되찾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김지운 감독의 전작 <밀정(2016)>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요소다.

김지운 감독의 낙관적 인간관과 인도주의적 성향은 전작인 <밀정>에서 애국적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상당한 상승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나 금번 개봉되는 <인랑>에서는 이런 인도주의 성향이 오히려 서사의 개연성과 분위기의 일관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 듯하다.

게다가 이 인도주의 성향이 지향하는 목표 역시 그리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주변 강대국들의 합의를 얻어내지 못한 남북한만의 맹목적 통일, 과연 거기에 진정으로 한국민을 위한 미래가 펼쳐져 있을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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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지 않는 인도주의, 공감되지 않는 정치현실 묘사가 아쉬운 영화, <인랑>.
1950-1980년대 냉전 시기, 민족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함몰돼 있던 시대에는 통일이라는 것이 하나의 국가적 신념으로,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염원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통일보다 각 개인의 삶이 중요한 시대다.

통일이 개개인의 경제적 기회, 정치적-종교적 자유, 삶의 질에 보탬이 된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을 것이 명약관화한 상황에서 왜 통일이라는 이념을 위해 인간성까지 포기하는 인간군상의 이야기가 공감을 얻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인도주의가 억견적 민족주의 이념에 결부돼 오히려 관객의 공감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다. 이는 <인랑>의 흥행에 상당한 저해요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현실감의 결여: 정우성, 결정적 미스캐스팅

원작의 장점을 해치는, 실사영화 <인랑>의 공감되지 않는 인도주의에 더해, 이 영화의 결정적 미스캐스팅 또한 작품 몰입을 크게 방해한다. 영화에서 특기대의 지휘관 장진태 역을 맡은 배우 정우성은 최근 친난민 행보로 온라인상에서 전국민적 지탄을 받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를 정면으로 반대하며 인도주의를 부르짖은 까닭에 맹목적 인권운동가 이미지를 덧입은 그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캐릭터인 장진태를 맡긴 것은 영화의 몰입도를 심각하게 저해하는 요소다.

물론 김지운 감독이 <인랑>의 캐스팅을 결정하고 촬영을 진행하던 시기(2017년 9-10월)는 아직 제주도 예멘 불법체류자 문제가 발발하지 않았던 때다. 후일 정우성이 적극적 난민 수용에 목소리를 높이면서 감독의 의도와 다르게 미스캐스팅 사태가 초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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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의 결정적 미스캐스팅으로서, 친난민 행보로 맹목적 인도주의자 이미지를 덧입은 배우 정우성이 연기한 냉혹한 특기대 지도자 장진태.
이미 여러 매체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진 난민문제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다만 난민을 가장한 무슬림 불법체류자들의 체류를 허용했을 시,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겪을 부당함에 대해서만큼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예멘 불법체류자 사태를 우려하는 이유는 그들이 난민을 자처하면서도 결코 난민답지 않은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부조리한 태도는 바로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신앙, 이슬람에서 유래된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이슬람이라는 말은 무함마드가 창안한 신앙과 가르침을 지시하고, 이 신앙과 가르침을 삶의 근본원리로 수용한 이들을 무슬림이라 한다. 무슬림의 신앙 순도는 타종교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무슬림들 대부분은 신앙과 삶이 분리돼 있지 않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에토스, 즉 자율적 법칙들과 풍습 대부분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기초해 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칭하는 신앙이 이슬람일 경우, 사정이 달라진다. 이슬람의 중추를 이루는 정서는 그들의 가르침이 유일한 진리라는 확고한 종교적 배타성이다.

기독교에도 종교적 배타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교적 배타성은 서구에서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쳤고, 현재로서는 세속화된 세계에도 충분히 납득될 만한 수준으로 연단됐다. 단적인 예로,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기독교인 집안에서 타종교를 믿는 자녀가 나올 때 명예살인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수 무슬림 국가의 가정들에서는 이런 일이 제법 흔하게 발생한다.

예멘 불법체류자들의 난민자격 허가를 적극 지지하는 이들 대부분은 제주도에 체류하고 있는 예멘인 개개인의 사연과 심성을 난민 인정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무슬림 개개인은 비교적 인격적이고 친근한 성품을 갖는다는 것이 이들을 직접 겪어본 이들의 공통된 소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개개인이 종교집단으로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순간부터, 거의 예외없이 종교 투사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종교 투사라 할 때는 단순히 테러리스트나 성범죄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대다수 국민들이 무슬림 범죄 문제를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는 듯한데 이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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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한 무슬림 게토에서 집회를 연 무슬림 이주자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한 통치를 선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안전 문제로 이런 지역에 자국민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이로 인해 무슬림 게토는 유럽 자국민들에게 “No-Go Zone”(출입금지구역)으로 불리우고 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난민이라 자처하고 들어온 이들이 국내에서 세력을 규합한 후, 난민이 아닌 주권자 행세를 하려 든다는 점이다. 난민이나 불법체류자 신세로 타국에 유입된 무슬림들이 그들만의 게토를 형성하고, 자경단과 자체 사법기구를 두고, 해당 지역에 원래 거주하던 이들에게 이슬람 율법 샤리아와 무슬림들의 생활양식을 강요하는 사례는 이미 유럽의 대도시 각지에서 분명하게 경험되고 있는 사실이다.

기독교인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바가 이것이다. 만약 서울 곳곳에 무슬림 게토가 형성되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명약관화하다. 해당 지역에 위치한 교회 교인들은 심리적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공격을 받을 것이며, 결국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신앙인으로서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인 종교의 자유, 그리고 시민으로서 보유하고 있는 권리인 재산권과 생존권 역시 위협받을 것이다. 교회만 아니라 사찰을 비롯한 여타의 종교기관 역시 이런 우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신학과 종교철학 연구자로서, 필자는 다종교 현실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성찰하고 담당해야 할 책임과 윤리에 대해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원칙적으로 다종교 상황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세계화라는 삶의 정황 자체를 거부하는 현실도피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한국인이든 예멘인이든 여타 한국에 체류하는 무슬림 어느 편이든, 다종교 상황에 대한 심적-현실적 준비가 전무한 상태임은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성급히 다종교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은 양측에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다종교 상황이란 것이 무조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웃하는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닐텐데도, 이 말이 단편적으로 오해되는 상황이 아쉽기만 하다. 자의든 타의든 수세기 동안이나 무슬림들과 공존을 시도해야 했던 유럽 각국에서조차 감내하지 못해 우환으로 대두되고 있는 다종교 상황을 현재의 한국이 감당할 수 있을까?

진정 어려움에 처해 있는 무슬림들을 돌아보려 한다면, 그리고 그들과 호혜적인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려 한다면, 상당한 시일에 걸친 심적-제도적-경제적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탈북민들의 국내 적응조차 겨우 감당하는 열악한 수준의 사회적 역량을 가진 한국에서, 무슬림 불법체류자들의 난민 신청을 대량으로 허가한다면? 현실감이 결여된 인도주의로는 감당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적-종교적 문제들이 야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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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한 도시에서 무슬림 시위자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들을 폭행하는 장면.
현재 한국의 주류 정치 세력은 예멘 불법체류자의 대량 유입으로 인한 사회불안, 나아가 무슬림 게토 형성과 그에 따른 심각한 사회혼란을 긍정적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애초 좌파, 진보 정치의 신념은 인간에 대한 낙관적 신뢰다.

헤겔-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좌파, 진보계열 역사관에 의하면, 혼란과 폭력적 충돌은 보다 나은 역사적 과정으로의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자리매김한다. 그 과정에서 유물론을 거부하는 종교, 특히 기독교의 쇠퇴와 소멸은 필연적이고 당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국가의 내부적 혼란상황은 정치인들의 실책을 덮을 구실을 만드는 데 유리하기까지 하다. 정황적으로 볼 때, 좌파나 진보 계열 주류 정치인들에게는 예멘 불법체류자 사태가 그리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현실감이 결여된 인도주의가 초래할 사회적, 종교적 혼란을 예상하는 입장에서, 영화 <인랑>의 실망스러운 결말은 배우 정우성의 순진한 친난민 행태와 오버랩된다. 삶의 현실에 적실치 않다 못해 현실을 왜곡하기까지 하는 낙관적인 인도주의가 인간 세상의 어둡고 불편한 진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는 죄된 현실이라는 진실을 억지로 가리려 하고 있다.

<인랑>의 결말은 암울함을 중첩시키는 방향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것이 개연성 있는 삶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않은 인도주의적 친난민 행보 역시 자제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아직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부조리와 폭력의 위협을 근거가 희박한 윤리적, 인류애적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자처하려 하기 때문이다.

배우 정우성은 과거 스크린쿼터 축소에 앞장서 반대하는 입장에서 선 바 있다. 과연 타종교, 타문화 간 개방과 교류가 그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과거 이력으로 봐서는 정우성의 친난민 행태에서 진정성을 찾기 어렵다. 적어도 사려 깊은 성찰과 미래에 대한 진중한 안목을 가지고 예멘 불법체류자 사태에 의견을 제시한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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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 그가 내세우는 이상은 가상하나 심각한 현실왜곡을 초래하는 데다가, 그의 삶의 행보가 그 이상의 진정성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