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프 도레 판화성서
▲한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신상철 교수(오른쪽)가 이야기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귀스타브 도레의 성화(聖畵) 241점이 들어가 있는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가 발간됐다.

이 책은 일반 출판사인 한길사에서 '아날로그 책'의 미학을 살리기 위해 기획한 '큰 책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가로 28.5cm, 세로 42.3cm, 두께가 7cm에 달한다. 압도적인 크기에 무게는 5.5kg으로, 들고 다니면 금세 팔이 저릴 정도.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는 19세기 유명 화가이자 수많은 성화를 그렸던 귀스타프 도레가 그린 한길책박물관 소장 1866년판 '더 홀리 바이블(The Holy Bible)'을 저본으로 한다. 책 왼쪽 면에는 관련 성경 본문을, 오른쪽 면에는 도레의 성화 작품을 배치했다. 삽화와 함께 소개된 성경 구절들은 출판사에서 관련 내용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임의로 발췌해 실었다고 한다.

17일 서울 서소문로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만들었다"며 "종이도 가능한 한 부드럽고 오래 가는 최고급 종이를 쓰기 위해 스위스에서 공수했다. 종이가 오는 데만 3개월 걸렸다"고 소개했다.

김언호 대표는 "'큰 책 시리즈'를 성서로 시작한 이유는 당대 최고 베스트셀러였기 때문"이라며 "성서의 여러 장면들을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흑백만의 아름다움으로 이렇게 그려냈다는 게 놀랍다. 도레는 천재적인 화가"라고 말했다.

김 대표는 "어떤 사람들은 성서를 종교적 의미로 받아들이겠지만, 문학이나 미술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며 "도레는 하나의 역사로서 그 스토리들을 그려낸 것이다. 책을 만들면서 만난 도레는 제게 스승이었다"고 덧붙였다.

또 "성서는 신앙을 떠나서라도 '책 중의 책' 아닌가"라며 "가장 많은 그림을 낳은 책이 '바이블'이다. 평생 책을 사랑하고 모아 왔는데, 이런 저런 바이블을 많이 갖고 있고 그림도 많다"고 했다.

귀스타프 도레 판화성서
▲산상설교(365쪽).
해설을 맡은 신상철 교수(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는 "도레는 삽화를 텍스트에 종속되거나 텍스트를 보조하는 장치가 아니라, 삽화 자체가 독립된 구성을 갖도록 했다"며 "신약과 구약 삽화를 비교해 보면, 구약은 좀 더 격정적이고 웅장하며 신약은 좀 더 서정적이다. 예수의 삶을 잔잔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도레의 작품은 너무 강렬하고 명암이 극렬하게 대비되며 사람들의 제스처도 역동적이라 처음에는 두렵거나 거리감을 느끼게도 하지만, 관람객들의 마음에 아주 강한 인상을 남기는 효과가 있다"며 "예술 작품은 균형과 조화, 좌우대칭 등의 요소만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숭고의 미학, 정서적 효과도 있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1866년 책의 초판은 성경전서인데, 4쪽마다 삽화가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삽화가 텍스트와 꼭 일치하지 않을 정도로 독립적 구성을 갖도록 했다"며 "도레는 당시 기계로 하는 동판화 기술이 발전돼 있었음에도 목판화처럼 사람이 직접 파는 수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손으로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야 영적인 힘이 담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문 목판화가를 무려 160명이나 고용해서 함께 일했다"고 했다.

신 교수는 "19세기 초반은 인쇄·제지 기술이 발전하면서 책 단가가 낮아져 프랑스 출판 문화가 전성기에 접어든 시기였다. 반면 책을 많이 팔기 위해 삽화도 대량으로 제작하다 보니 값싼 삽화들도 많이 등장했다"며 "그러나 도레는 이런 추세에 정반대로 나아갔다. 전문 판화가를 고용해 매우 고급스러운 판화를 제작하고, 종이도 최고 재질을 써서 삽화의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책 자체를 하나의 예술품으로 본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귀스타프 도레 판화성서
▲신상철 교수가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신상철 교수는 "도레는 당시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의 그림에는 여러 작가들의 형식 요소가 섞여 있다. 렘브란트처럼 명암이 극도로 대비를 이루고, 영국 풍속화처럼 모든 인물들이 제스처를 취하고 있으며, 독일의 풍경화처럼 나무들이 울창하다"며 "낭만주의를 기초로 여러 양식들의 장점이 혼합돼 있는데, 이를 미술사에서 '절충주의'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실제로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 속 큰 삽화들은 처음 보면 19세기 작품으로 알기 어려울 정도다. 마치 렘브란트의 성화를 판화로 옮긴 듯한 느낌도 준다. '노아의 홍수' 장면은 일반적인 '방주'가 아니라 방주에 타지 못한 채 바다 같은 물결에 휩쓸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고, 출애굽 전 열 가지 재앙 중 '처음 난 것들의 죽음'에서는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고 집을 나서는 칼 든 천사의 시선을 담았다. 그런가 하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실낙원' 속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서는 근대성이 느껴진다.

◈"디지털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어"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이날 디지털에서 느낄 수 없는 아날로그만의 감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최근 디지털은 굉장히 작게 가고 있는데, 큰 책을 통해 디지털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귀스타프 도레 판화성서
▲김언호 대표가 설명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김 대표는 "본래 책은 좀 컸다. 기계화가 안 돼서 크기도 했지만, 눈으로 보는 데 적당한 크기의 책이라야 우리의 인식을 돕는 듯하다"며 "우리 사회가 너무 디지털에 함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깊은 사유가 불가능하다. 아이들에게 정신적·신체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활자 미디어 종사자로서, 전부터 종이책과 아날로그 책 이야기나 그 정신을 다시 살리고 싶었다. 창조적인 것이 미학도 살리고 정의로운 사회도 이야기할 수 있게 할텐데, 그러지 못하게 될 수 있다"며 "서양에서도 전자책은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있다. 이번 같은 책이 팔려야 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미학 책이 훈민정음이다. 문자는 그 나라의 가장 위대한 미술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며 "우리는 한글이라는 문자로 책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책은 아름다울 수 있다. 책이 소비재로서가 아닌, 보존되는 가치 있는 작품으로서 만들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에 한길사는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성서>를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1천 권만 발간하고, 각 권에 번호를 매겨 소장가치를 더할 계획이다. 1천 권이 다 소진돼도 추가 발간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훼손을 우려해 시중 서점에 내놓지 않고, 주문이 들어올 경우 보내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가격은 33만원.

귀스타프 도레 판화성서
▲산상설교(3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