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승훈은 스물네 살 되던 해에 행상을 그만두었다. 그동안 모은 경험과 돈을 활용해 공장을 직접 차리고 상점도 세워 운영하고 싶은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니 가진 돈으로는 큰 사업에 손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철산의 갑부로 소문난 오삭주에게 부족한 자금을 빌려 쓰기로 했다.

"그래, 어디 쓰려고 그런 큰 돈을 빌리러 왔는가?"

"제가 전에 모시고 살았던 임박천 어르신처럼 납청정에다 유기 공장을 세우고 상점도 세워 경영해 보려 합니다."

"음, 젊은이가 큰 뜻을 품었구먼, 음, 하지만 귀한 돈을 함부로 줄 순 없지. 음, 내가 부족한 자금을 대어 주지. 꼭 필요하다면 여기에다 혈서를 쓰게."

"어르신, 감사합니다. 꼭 뜻을 이루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승훈은 오씨가 내민 백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검지를 입으로 가져가더니 꽉 깨물었다. 그러곤 붉은 피로 서약서를 썼다. 젊은 시절 유명한 사업가로서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대가였다.

드디어 납청정에다 큰 공장과 상점을 세웠다. 사업가 이승훈의 출발이었다.

마침 부인이 자녀를 낳아 식구가 넷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사업상 집을 비우는 때도 많았지만 아내는 불평하는 일 없이 묵묵히 가정을 지켜나갔다. 딸 숙련과 아들 택로도 잘 교육했다.

그 때까지 납청정뿐 아니라 조선 땅에 세워진 많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형편은 무척 열악했다. 이승훈은 돈을 벌어 사업가로 성공하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으나, 열약한 노동자의 형편 때문에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더 그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 주어야 해.'

그래서 공장 건물을 지을 때부터 햇볕이 실내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했고, 작업을 할 때도 먼지가 많이 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충분한 일값을 지급했다.

또한 휴식시간을 주었으며, 애로사항을 건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런 방식은 그 당시에는 획기적이었기에 다른 공장 경영자들로부터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도 했다.

"뭐, 노동자들을 상전처럼 모신다고? 지금이야 밑천이 있어서 생색을 낼 수 있겠지만.... 흥, 어디 몇 달이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

그런 험담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의도대로 묵묵히 밀고 나갔다. 노동자들은 크게 환영했기 때문에 일의 능률도 오르고 탈없이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다.

그 후 오삭주에게 자금을 좀더 빌려 납청정에 본점을 세우고 평양에 지점을 설치했다.

이승훈은 날이 갈수록 수단을 발휘하고 인간관계에서도 호평을 얻었다.
사업가로서 그의 자질은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승훈은 사업을 번창시키면서 한 가지 신념만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모든 일에 있어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거짓말을 가장 싫어했다. 신용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정하곤 굳게 실천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재난을 만나 사업체가 파탄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청일전쟁이 원인이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극심한 이권다툼을 벌여 왔는데,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한다는 핑계로 두 나라 군사가 나라 안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아, 힘 약한 민족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 이런 것인가. 일본과 청나라의 이권 싸움에 애매한 우리나라만 새우처럼 짓밟히게 되고.... 아, 이 전쟁의 결과는 우리나라에 어떤 운명을 안겨다 줄까?"

승훈은 탄식을 했다. 임시 조치를 취해 놓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인들은 지나가는 곳마다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젊은 여자들을 마구 겁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소와 돼지 등 가축들을 마구 잡아먹었으며 집을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들이 거쳐간 곳엔 황폐만 남을 뿐이었다.

이승훈은 그런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평양 지점 사업체는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납청정에 있던 본점과 커다란 공장도 깡그리 불타 버리고 남은 것은 폐허뿐이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