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조선 땅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18세기 중엽 중국을 내왕하던 사신들에 의해 천주교 서적이 전해지면서부터였다.

그러다 점차 큰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조상숭배의 전통적인 의식인 제사를 금지시킨 것이 첫 번째 원인이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오해한 탓이었다.

사실상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는 제각기 고유한 방식으로 자기네 조상에 대한 추모 의식을 치른다. 그런데 문화의 차이와 선진국 사람의 우월의식으로 인해 조선의 제사를 미신으로 비하시킨 것이었다.

개신교가 전해진 것은 훨씬 후인 19세기 중후반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는 선교사들이 만주 지역에서 성경을 번역해 평안도 지방으로 보급시켰다.

정상적인 외교 경로를 통해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은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부터였다. 미국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선교부는 각각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파견해 선교운동을 펴도록 지시했다.

이어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마펫 선교사를 평양으로 파송해 교회와 함께 신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평양을 중심으로 관서 지방에 교회가 많이 세워진 까닭은 그러했다.

남강이 오산학교를 세우던 무렵만 해도 평양과 그 부근엔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기독교계 학교와 병원도 많이 세워져 개화사상과 함께 복음이 활발히 전해지고 있었다.

남강이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이런 시대적인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민족의 앞날이 암담하던 시기에 기독교의 진리를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꿈꾸려 했을까?
 
오산학교로 돌아온 남강은 젊은 교사 유영모를 불러, 자기가 평양에서 체험한 일부터 털어놓은 다음 물었다.

"유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서 이끄는 신앙 모임은 잘 되고 있나요?"

"열심을 가진 학생들이 많이 모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하면 어떨까?"

"말씀해 보세요."

"날마다 수업 시작 전에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리도록...."

"음, 좋은 일이긴 하지만 서두르면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럴까?"

"그 일은 숙제로 남겨두고 서서히 진리를 가르치지요."

"그래,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먼."

얼마 후 남강은 교정에 학생 전용 예배당을 지었다.

절벽 끝에 내몰린 생명은 어찌해야 하는가? 코딱지만한 땅에서 당파 싸움이나 벌이다가, 나라를 잃은 후엔 땅만 피폐해진 게 아니라 하늘마저 흐릿해졌다. 더 이상 기댈 만한 데가 없었다. 민족종교가 기를 쓰고 있었으나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사멸하고 말았다.

교회당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고통과 소망을 그분께 맡기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정신이 한없이 맑아졌다. 그리고 문득 영혼이 눈을 뜨면서 고양(高揚)되어 세상의 죄악이 바로 보이는 것이었다.

"내가 진리에 따라 밝아지고 참답게 살 때 악을 이길 수가 있으리라.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를 때 더 큰 힘과 지혜를 얻어 우리나라의 주권을 찾을 수 있으리라!"

남강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했다. 우리 학생들이 이기심과 아집을 버리고 진리와 함께 성장하기를....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