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주님은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쓴 편지에서, 그들이 행한 많은 좋은 일들, 예컨대 "수고, 인내,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함,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함(계 2:2-3)" 등을 열거하며, 그들의 수고를 칭찬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주님은 그것들만으로는 안 된다며 잃었던 첫사랑의 회복을 요구하십니다.

첫사랑의 부재는 가치롭다고 칭송된 신앙의 덕목들(롬 12:11, 약 5:11, 딤후 4;4)을,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결코 그것들로 첫사랑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거된 요목들에서 읽혀지는 행간적 의미는, 바람난 아내가 자기의 불륜이 남편에게 탄로날까봐 애정 공세로 남편에게 위장막을 치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그것들은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가 그 빈자리를 커버하려는 면피용(免避用) 열심 같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위대한 '사랑장(The Love Chapter)'인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 사랑을 대치하기 위한 어떠한 위대한 헌신도 사랑의 부재를 커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첫사랑이 있는가?

주님으로부터 첫사랑의 회복을 요구받은 에베소교회(계 2:5)는, 그나마 다행스럽습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리기라도 할 첫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이 없었다면, 잃어버릴 사랑도 없었을 터이고, 그것의 회복을 요구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첫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따르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짐(falling in love with God)'입니다.

예컨대 슐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 사이의 불꽃 튀는 연정 같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아 2:5-7)".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 마치 추궁이라도 하듯,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17)?"고 집요하게 따져 물은 데서도, 첫사랑의 연정(戀情) 같은 것을 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쉬임없이 "당신, 나를 정말 사랑해?" 라고 묻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성 프란시스(St Francis, 1181-1226),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역시 모두 하나님 열애자(熱愛者)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하나님 사랑과 동일시할 정도로 사랑주의자였으며, 모두 하나님과의 첫 조우에서 사랑을 만났습니다.

성경이 하나님 조우 체험을 남녀의 첫사랑에 빗댄 것은 여타의 종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독교만의 독특성으로 보입니다. 여타 종교인들이 종교 체험 하면,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영험들을 떠올리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물론 기독교 안에도 환상, 방언, 치유, 이적 같은 것들을 하나님 조우 체험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본 '하나님과 사랑에 빠짐(falling in love with God)'을 제쳐 놓고서는 하나님 조우 체험을 말할 수 없습니다.

누가 아무리 영계(靈界)를 주유(周遊)하고 신묘막측한 능력을 경험했더라도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조우 체험이 반드시 '하나님과 사랑에 빠짐'이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조우가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갈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밟고 들어갑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그리스도의 죽음을 밟고 하나님을 조우하면서 어찌 '하나님과 사랑에 빠짐(falling in love with God)'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눈치 채지 않고 하나님을 조우하는 법은 없습니다. 누가 아무리 오묘막측한 진리를 깨닫고, 이런 저런 하나님의 신비, 은사, 능력을 체험했더라도 하나님 사랑을 조우하지 못했다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것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랑의 온도는 사람마다 차이날 수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미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용광로같이 뜨거울 수 있습니다.

◈첫사랑의 유효기간은 없는가?

일견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첫사랑은 말 그대로 처음 할 때의 사랑이며, 첫사랑 시즌(season in first love)이 지났으면 당연히 첫사랑도 종말을 고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미 지나가버린 첫사랑이 없다고 책망하며 그것을 회복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녀 간의 불붙는 첫사랑이나 신혼초의 뜨거운 부부애는 그저 추억 창고에나 넣어두었다 가끔 꺼내어 보는 회상거리이듯,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첫사랑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도 나이에 걸맞게 하는 것이 상식이지, 풋풋하고 설익은 첫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고는 생각들을 합니다. 첫사랑의 시즌이 끝나면 이제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첫사랑은 뜨거웠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초신자들이 방방 뛰는 것을 보면서 "나도 처음엔 그랬지, 얼마나 오래 가겠어, 저 이도 곧 나처럼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첫사랑이 반짝했다 소멸되는 유성 같은 것이라면, 주님이 첫사랑 상실을 책망하고 그것의 회복을 요구하실 리 없습니다. 흔히 상상하듯, 첫사랑은 시간이 흐르면 소멸되는 시간에 예속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시종여일한, 영원한 첫사랑입니다. 이 첫사랑에는 유효기간도, 권태기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그리스도의 피가 영원하듯,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감동과(히 9:14) 성령의 부으심이(롬 5:5)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활활 타오르도록 지핍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3-15)".

◈첫사랑이 떨어진 곳

주님이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라(계 2:5)"고 했는데, 그곳은 두말할 것 없이 그들이 시선을 맞추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놓친 곳입니다.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발화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기에, 그 발화점을 놓쳤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도 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탈된 이유 역시 단순합니다. 그들의 시선을 십자가에서 다른 대상으로 이동한 때문입니다. 처음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주목하다가, 여러 이유들로 인해 그 초점이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처럼 율법주의에 미혹됐든지(갈 3:1-3; 4:9; 5:3), 골로새교회처럼 철학에 미혹됐든지(골 2:8). 혹은 금욕주의를 흘렀든지(딤전 4:1) 아니면 현대 교회처럼 종교다원주의에 미혹됐든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맞추었던 초점을 흐트러뜨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시선을 돌리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공급받지 못하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도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간의 사랑이나, 모든 사랑은 다 내리 사랑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을 때만 남편을 사랑할 힘을 갖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그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첫사랑은 견고합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