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1906년 봄, 조선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 자리에 올랐다. 그는 치밀하고도 계획적인 작전으로 한반도를 자기네 식민지로 만들려는 거대한 음모를 꾸몄다.

우선 일본 경찰을 늘이고 각급 학교에는 일본인 교사를 배치해 식민교육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얼마 후엔 내각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을 감언이설로 꼬드겨 한일 신협약을 맺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일본인을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하여 통치권을 장악함으로써 이 나라를 말 그대로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짓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기 위해 '신문지법'을 제정해 민족언론을 철저히 검열하고 통감부를 조금만 비판하면 폐간시켜 버리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총살된 이후인 1910년 늦은 봄, 일본 제국은 육군대장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임명해 조선으로 보냈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충실하고도 저돌적인 하수인이었다.

그는 친일파의 괴수인 이완용과 함께 모의하여 한반도를 완전히 말아먹을 작전을 폈다. 그는 일본 제국이 만들어 보낸 조약안을 들고 회의장으로 들어가 동의하라고 강요했다. 수많은 경찰을 거느린 삼엄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였다. 데라우치는 결국 순종 임금의 허락과 대신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8월 29일 순종은 "일본국 황제에게 대한제국의 모든 통치권을 영구히 양도한다"는 조서를 내려 한일병탄 조약의 체결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호를 고쳐서 조선이라 부르고, 한반도에 총독부를 설치해 자기들의 식민지로서 완전히 통치하게 된 것이었다.

자기가 살던 고향이나 나라를 빼앗긴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으리라. 흉악한 늑대나 하이에나 또는 독수리가 옷을 찢어발기고 맨살에 이빨을 박아 살가죽을 벗겨 내린다.

그러고는 히히 웃으며 혓바닥으로 피가 돋아난 맨살을 핥다가 내장을 꺼내 먹는다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남강 이승훈은 마치 자기가 흉포한 하이에나의 허연 이빨과 웃음 앞에 놓인 듯 몸서리를 쳤다.

일본의 무단통치는 점점 더 살벌해져 갔다. 총독부는 헌병 또는 경찰에 즉결처분권을 주어 사람들을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순사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울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뚝 그칠 정도였다.

조선 사람은 경찰서나 헌병대를 저승사자가 보이는 무서운 지옥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의 모든 곳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강제 침탈 후 총독부 당국은 일정 시간을 배정해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더니, 점차 한글 교육을 축소하고 일본어의 비중을 높였다. 그리하여 평상시에도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여, 학생들에게 다달이 일정량의 표를 나누어 주곤 조선어를 사용할 때마다 그 표를 서로 빼앗아 먹도록 하는 등 온갖 치졸한 수단을 다 썼다.

일본은 조선 역사마저도 왜곡시키고자 하였다. 조선인은 원래부터 분열적이고 의타적인 민족이며, 나약하여 외국의 침략을 많이 받은 열등한 민족이라고 비하했다.

또한, 옛날부터 일본의 지배를 받아왔으므로 지금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며 그래야 행복하다는 식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심어 주었다.

옛날엔 백두산을 넘어 드넓은 만주 대륙까지 지배하며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한민족이 오늘날 허약한 토끼 신세로 전락하여 유린당하는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아아, 올가미에 걸린 늙은 쥐새끼 꼴이 아닌가!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