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김용규 작가는 책에서 "기독교의 신 개념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신 개념'만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스인들의 '존재론적 신 개념'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이 둘을 종합한 것"이라며 "그런데 알고 보면 신앙과 이성이라는 양극을 휘어 하나로 결합하는 것 같은 극적인 종합이었다. 그 결과 다분히 종교적이면서도 분명 존재론적이고, 여전히 히브리적이면서도 여실히 그리스적인 기독교적 신 개념이 나왔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작가의 <신>은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 배우는 '하나님' 이야기와 다르다. 2,000년간 이어져 온 풍성하고 아름다운 서양문명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카페에서 대화하듯 편안하고 따뜻하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932쪽의 많은 분량이지만 페이지 넘기기가 그리 힘들지 않다. 그리고 2,000년의 서양 기독교 사상 역사나 주요 인물의 여러 이야기를 알게 되는 즐거움도 있다. 이 책은 2010년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이라는 이름으로 휴머니스트에서 나왔던 작품을 다시 쓴다는 마음으로 고치고 확장한 개정증보판이다. 곳곳에 설명과 화보를 전보다 풍성하게 넣었고, 욥의 이야기로 살펴본 '하나님의 부재'에 관한 4부 8장을 추가했다.

김용규 작가는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몰두했고, 튀빙겐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위르겐 몰트만과 에버하르트 융엘의 강의를 들었다.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깊이 있는 성찰, 생동감 있는 일상적 문체로 다양한 대중 철학서와 인문 교양서를 집필해 왔다.

<신> 외에도 십계명을 다룬 <데칼로그(포이에마)>, 故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질문을 통해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휴머니스트)> 등을 썼다. 김용규 작가와의 인터뷰 1부는 IVP 이승용 간사가 질문을 맡았다.

-일반 출판사에서 나왔던 <신>이 40주년을 맞은 기독 출판사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에서 나왔는데요.

"이 책은 서양 문명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해, 인문학 서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신이란 어느 문명에서나 사회·제도·예술 등 문화에 스며들기 마련입니다.

신과 문명은 상호 작용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문명에 영향을 미치는 신이란 신의 이름으로 추구되는 가치들이지요. 안셀무스가 신을 '최고의 권위, 최고의 생명, 최고의 진리, 최고의 선함, 최고의 아름다움, 최고의 정의, 최고의 위대함'으로 설명한 것처럼, 그런 가치들이 사회 문명을 형성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문명이 다시 신 개념에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서양 문명을 통해 그 문명이 섬기는 신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방법이지만, 신에 대한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서양 문명을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종교적 관점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자는 것이 처음 책을 쓰게 된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기독 출판사가 아닌 인문학 서적으로 나왔지요.

신학적으로는 조직신학에서 말하는 신론과 서양 문명이 어떤 영향을 서로 주고 받았는가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명 안에는 철학이 큰 역할을 했고, 문학과 회화 등도 있습니다. <신>을 쓸 때는, 그리스도론과 성령론까지 3부작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신→하나님' 바꿔보니 훨씬 은혜롭게 느껴져"

기독 출판사에서 재출간하면서 간단히 손만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신'이라는 말은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God(영어)'이든 Gott(독일어)'이든 기독교의 하나님을 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 하나님'이라고 하다 '신' 하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바꿔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신'을 '하나님'으로 바꿔쓰기해서 쭉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녀서인지, 아니면 나이를 먹어서 감상적이 됐는지 갑자기 텍스트가 살아있는 것 같고 훨씬 은혜롭게 느껴졌습니다(웃음). 그래서 제목도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 이야기>로 제안했는데, 출판사 의견을 수렴해 제목도 그대로 <신>이 됐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렸습니다.

책을 보면 1부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서론 격이고, 나머지 2-5부에서 하나님을 존재와 창조주, 인격자와 유일자 등 네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는데 존재와 창조주, 유일자로서의 하나님에는 별 문제가 없는데, 4부 '하나님은 인격적이다'에 들어가니 '신'보다는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훨씬 문장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뭔가 보충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욥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8장 '하나님의 인격성과 하나님의 부재'를 추가했습니다. 200자 원고지로 800장을 더 썼는데, 얇은 책 한 권 분량이 나왔습니다. '신'을 '하나님'으로 바꾸면서 훨씬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의 삶에 뭔가 끊임없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인격적 속성이 굉장히 리얼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그 부분이 대폭 늘어나게 됐습니다."

김용규
▲저자 김용규 작가(왼쪽)와 대화하고 있는 IVP 이승용 간사. 책에서 김 작가는 “이 책의 주된 목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바르고 정치한 이해를 통해 서양문명의 심층을 파악하는 것”이라며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서양문명을 이끌어 왔고 또 앞으로도 이끌어 갈-급수펌프이자 정수원인-기독교 고유의 가치들과 특유의 사유방식을 배우고 익히려 한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저도 읽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서양 문명의 토대에 있는 광활하고 거대한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길 바랐습니다. 저자와 출판사, 독자까지 모두 풍요로워졌다는 느낌입니다. 추가하신 욥에 대한 해석이 문자적인 데서부터 혁명적인 데까지 풍성하고 텍스트가 살아 꿈틀거리는 듯 합니다. 어떻게 쓰게 되셨는지요.

"이전 판에서는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에 대해 키에르케고어가 <공포와 전율>에서 다룬 섭리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섭리에 관해 우리가 느끼는 게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키에르케고어의 해석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위대하다는 면에서가 아니라, 그 이전부터 달랐지요. 전제조건부터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고난은 어찌 보면 우리의 고난과 다릅니다. 고난받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이보다 더한 고난이 있겠는가' 하면 배울 것이 있겠지만(웃음)....

아브라함은 고난을 당하기 전, 이미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3명의 천사를 통해 봤든 만나서 대화했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 지점이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성경이나 교회를 통해 들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을 만났기에, 섭리에 관해 그가 당면했던 문제는 '하나님의 부조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왜 논리적으로 앞뒤가 안 맞는가'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이 아이를 통해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번성시킬 거라고 해 놓고, 아이가 크기도 전에 번제로 죽여 불태우라고 하는가'였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삶의 부조리를 많이 느낍니다. 20세기 실존주의자들이 충분히 고발하고 연구하고 묘사했던 부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이 같으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이라고 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경우가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자식 하나만 바치는 것이었다면, 욥은 재산과 자식 열 명을 다 읽고 몸에 병까지 생깁니다. 아브라함과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자식 수만 봐도 10배 더 심합니다. 욥이 부조리를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죄인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않았으며, 사람들 앞에 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체의 1/3 분량을 할애해 자기 변호를 합니다.

◈"욥의 문제, 하나님의 부조리 아닌 '부재'"

이건 제 해석인데, 욥의 문제는 '왜 죄도 없고 악하지도 않은 내게 이런 고난을 주는가' 하는 부조리 문제를 따진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과연 계신 것인지' 한 번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견신(見神)의 문제였습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네가 고난받는 것을 보면 죄를 지었거나 악한 것'이라고 할 때, 욥은 '죄인도 악인도 아니다'고 부인합니다.

무엇보다 욥은 단 한 번도 자식들을 살려달라거나,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신이 있다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이 턱 나타나시자, 욥은 '내가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하고 바로 회개합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몰아붙여도 회개하지 않았지만, 주님을 봤을 때 곧바로 회개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집어낸 욥의 문제는 '하나님의 부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가 아니었나 합니다. 하나님이 과연 있느냐는 것입니다. 책에서 헤르만 헤세의 '기도'라는 시를 인용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멸망하고/ 또 기꺼이 죽을 수 있습니다만/ 오직 당신의 품에서만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헤르만 헤세의 기도이자 욥의 기도이고 우리의 기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욥에 대한 생소하고 독특한 해석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욕하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는 저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희 할머니 정도만 그렇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무조건 믿으셨으니까요(웃음). 여쭤본 적은 없지만 저희 할머니는 의심 없이 믿으셨기에, 욥의 문제가 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내가 욥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보셨던 경험이 있으신지요.

"1988년 8월 2일이었습니다. 딱 30년째 됐네요. 독일에서 10년간 유학했는데, 방학 때마다 일을 해야 했습니다. 벤츠에서 두 달 일하면 한 사람이 1년을 살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전공한 아내는 독일에서 최고 과정을 끝내고 연주자로 막 데뷔했습니다. 스위스와 프랑스, 독일이 만나는 국경에 보덴제라는 곳이 있었는데, 큰 페스티벌이 열려 아내가 베토벤 연주를 하게 됐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튀빙겐에서는 300km 떨어져 있었는데, 새벽에 일을 하고 카풀을 해서 갔습니다.

연주가 잘 끝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식사하다 보니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아내는 주최 측이 잡아준 호텔에서 자고 가자고 했지만, 저는 새벽 일을 가야 해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카풀로 차를 얻어탔는데,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일 아우토반은 속도제한이 없습니다. 뒷자리에서 졸다가 갑자기 눈을 떴는데 차가 트럭으로 돌진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저보다 집사람이 훨씬 많이 다쳐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피아노를 20년 했는데 0.1초만에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다시는 피아노도 못 치고 앞도 못볼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기적적으로 회복됐지만, 병원에 오래 있어야 했습니다. 보험도 전혀 되지 않았기에 병원비도 막막했습니다.

튀빙겐대학교는 그때 신학의 황금기였습니다. 몰트만과 융엘이라는 두 거장이 한 학교에 있었습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융엘 세미나를 함께 듣던 마리아라는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죽을 끓여주고 가더니, 다음 날에는 억지로 차에 태워서 어디로 데려갔습니다. 수녀들 20명이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었고, 조그마한 예배실이 있었습니다. 퇴원 1주일만에 먹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갔을 때, 신부님이 '그 분은 손이 크시다. 마지막 순간 너희를 감쌌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으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는가. 그걸로 부족한가?"

처음엔 위로가 안 됐습니다.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요점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차를 봤는데, 살아나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저는 모든 걸 잃고 더 이상 희망이 사라졌는데 말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분 말씀은 '너는 모든 걸 다 잃었을망정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했다. 그걸로 부족하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모든 걸 다 버리고 신부가 됐는데도 하나님을 만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너희를 지켜주신 걸 확인하지 않았느냐. 그걸로 부족한가?' 라는 것입니다.

이후 30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이 말에 공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 죽게 생겼고 장래도 망가지고 모든 게 끝난 마당인데, 목숨이라도 건진 걸 다행으로 알라는 말로 들렸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나이가 들고 보니, 그리고 이 욥기를 쓰면서 그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헤세의 기도도 그렇습니다. 이게 악마가 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섭리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걸로 되지 않았느냐. 무엇을 더 바라느냐.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더욱 공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고난이든 기쁨이든 행운이든 우리의 삶 전체가 의미와 가치가 있어지고, 내가 이 땅에서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성공하고 못하고가 무엇이 그리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만 계신다면 내 삶은 괜찮다, 좀 찌질하게 살고 동창들처럼 큰 차 못 타고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못해도 괜찮다, 이런 생각을 요즘 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을 한두 번은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기적으로 생각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뭔가가 있었겠지' 하면서 이성적으로 짜맞추기 시작하지요. 기적을 일상으로 재편성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저도 그 사고 당시 살아난 것뿐 아니라 회복 과정이나 아내가 다시 팔을 쓰게 되는 과정 등에서 기적 같은 일 몇 가지를 경험하고 감격스럽게 생각했지만, 이후에는 '우연이지 않겠어' 하면서 살고 있더라고요.

'이 세상에 악이 없거나 하나님이 없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지, 도대체 이게 뭐냐?'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가 가장 자주 갖는 의문일 것입니다. 신정론(神正論)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수백 년 동안 이야기했던 문제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행위가 정당하냐 아니냐 하는 신정론보다,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 선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걸까 의심하는 '하나님의 부재' 문제가 더욱 크지 않을까 합니다. 고난당한 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한 번 보자' 하고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누구나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이 있는 곳에 항상 답이 있습니다. 당시 신부님이 제게 했던 말, '그걸로 부족한가? 무엇을 더 바라는가?' 고난을 당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욥은 확인했습니다. '내가 주를 뵙나이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일하시는 방식이 그런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전 판이 객관적·이론적이라면, 이번 판은 훨씬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 그리스, 플라톤적인 요소를 덜어내야 초대교회 당시의 순수한 기독교를 회복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지금 한국교회나 신학교 등에서 어떤 일이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걸 전제하겠습니다. 함께 공부했던 목사님들을 간혹 만나면 '기독교 내에 히브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그리스 전통을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고들 하십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2,000년 된 종교입니다. 20년, 200년 된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 와서 누가 기독교를 어떤 식으로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시 말해, '무엇이 기독교인가'는 지난 2,000년간 이미 정해진지 오래 됐습니다. 그 안에는 히브리적 전통도, 그리스적 전통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그 두 전통을 받아들여 생겨났고, 조화와 균형을 이뤄가면서 성장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 그리스 철학적 전통을 덜어내야 한다?"

기독교가 계속 성장한다는 것은 양적으로 세가 늘어나는 것뿐 아니라, 질적으로 자기 고유의 사상과 교리 등을 끊임없이 구축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단하고 끊임없이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전통을 받아들였고, 동시에 적합하지 않은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전통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었고,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만의 독특한 사상과 교리와 정신을 갖게 됐습니다. 독특한 사유 방법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 됐고, 그것은 그 어느 전통보다 깊고 풍성하고 강하고 유연합니다. 사람들이 잘 모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사해 문서가 발견됐다'면서 '지금 우리의 기독교는 바울 이후의 퇴색되고 그리스화된 종교일 뿐, 원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을 봅시다. 그 말이 맞을 수 있습니다. 정말 옳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 철학을 상당히 많이 교육받으며 자랐고, 세네카와 비슷한 연배로서 비슷한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서신들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기독교 전통에 속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으로 시작해 예수님으로 끝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복음만으로, 예수님만으로 이뤄진 종교는 아닙니다. 이 밖에 열두 사도와 사도 교부들, 이후 수많은 신학자들이 보태고 굳건히 하면서 어떤 것은 빼고 어떤 것은 집어넣은 과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성경 정경화 과정만 해도 300년 가까이 진행됐습니다. ‘사도적 전통’이라는 기준을 세워 베드로복음서나 디다케 등 여러 문서들은 넣었다 뺐다 하면서 기독교 고유의 전통을 구축하는 길을 찾아갔습니다. 기독교는 2,000년 동안 이런 식으로 자신의 전통을 굳혀 온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어떤 것이 나타나서 새로운 종교가 세워진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이름의 종교가 돼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복음만으로'가 아니라 그 밖의 여러 요소들이 들어왔고, 2,000년간 내려오면서 틀이 만들어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이룩되고 유지되는 전통 가운데 벗어나는 그리스 철학적 요소가 지금도 남아있다면 당연히 몰아내야 하고 몰아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생겨날 때부터, 중요한 교리들이 만들어진 그 시기부터 신학자들은 신플라톤주의와 함께했습니다. 오리게네스와 유스티누스 등은 다 '한 손에 플라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교리를 만들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신앙이나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 철학은 마치 기독교를 위해 오래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플라톤에 대해 '그리스어로 저술한 모세'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이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들어오면서 약간 변형되긴 했지만,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계시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교리라는 도구로 풀어내는 데 아주 적합하고 유용한 도구로 사용됐습니다.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 등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은 모두 그러한 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폴 틸리히가 “성서의 종교에는 존재론적 사상이 없다. 그러나 성서의 그 어떤 상징도 그 어떤 신학 개념도 존재론적 함축성을 가진 것이 없다”고 한 말에도 바로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갈아엎는다면, 다른 종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란 이미 자신만의 고유한 사상과 교리와 사유방식을 구축한 종교이고, 그것이 2,000년을 지나오면서 굉장히 풍성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직되고 편협한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내세우는 진화론 등은 깜냥도 안 될 정도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의 사상만으로도 진화론 정도는 넉넉히 포용할 수 있을 만큼, 기독교의 사상과 사유 방식은 풍성하고 유연하고 대단합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2,000년간 쌓아온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을 위협할 만한 첨단과학은 아직 없습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망각해 버리거나 쳐다보지 않은 채, 그저 좁은 교단의 교리를 갖고 현실에 대처하려다 보니 충돌과 모순이 생기고 위험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2천년 지나온 기독교, 무언가 더하고 뺄 때 아냐" 

-현재 인간이 신이 되려 하는 '신 르네상스 시대'에도 적용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어가는 '호모 데우스' 같은 문제가 기독교를 덮칠 것 같고 무가치화시킬 것 같은 위협도 느끼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풍성하고 강건합니다. 2,000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들이 구축해 온 터전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쳐다도 보지 않은 채 도외시하면서 좁은 교단의 틀로 대응하려니 위기감을 느끼고, 위기를 느끼면 공격적이 되기 마련입니다.

'호모 데우스'를 말씀하셨는데, 유발 하라리가 말한 '데우스(Deus·라틴어 신)'는 기독교의 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 올림푸스에 사는 신과 비슷합니다. 생명공학과 뇌과학, 인공지능 등으로 수백 년을 살면서 구글과 아마존 등을 이끄는 초(超)부자들이 생명공학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뇌과학으로 칩을 심어 한꺼번에 각종 지식을 내려받고, 이런 것들을 통해 헤라클레스처럼 힘이 세지고 아프로디테처럼 관능적이고 아테나처럼 지혜롭게 사는 '슈퍼 휴먼'들을 '호모 데우스'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굉장히 부자여야 합니다(웃음).

극소수의 이러한 부자를 제외한 나머지 70억명의 인구는 '호모 유슬리스(Useless)',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 '호모 데우스'의 내용입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첨단과학의 시대이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불평등의 시대이고, 또한 역사상 유례없는 절망의 시대가 되겠지요. 하라리는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말은 복음 전파가 지금만큼 절실히 요구되는 때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건은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에 있겠지요. 제 생각에는 어떤 종교든 그 종교의 진리를 그 종교의 언어로 표현하면 자폐적이 됩니다. 때문에 저는 복음은 당연히 성서와 기독교의 언어와 어법으로 이해되고 설명돼야 하지만, 동시에 세속의 언어와 어법으로도 이해되고 설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은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 안에서 그 일을 담당해 왔습니다.

아까 플라톤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플라톤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의 사상을 전파한 플로티노스 때문입니다. 그는 몸에 병이 많아 이 세상을 악하게 보고 혐오하면서 저 천상의 이데아 세계를 위해 끊임없는 상승을 하는 '일자(一者)'론을 말했는데, 이것은 플라톤 사상의 절반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용규
▲<신>과 함께한 김용규 작가와 이승용 간사. ⓒ이대웅 기자
반면 플라톤은 일자의 세계까지 갔다가 이 부족하고 악하고 거짓되고 추한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해서 발길을 돌려 다시 내려온 철학자입니다. <국가>를 쓴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땅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 것이지요. 플로티노스가 '부정(不定)'의 길을 갔다면 플라톤은 '긍정'의 길을 갔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견지하는 '긍정 신학'이 플라톤으로부터 가능해진 것이고, 동방정교회의 근간인 부정신학은 플로티노스 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플라톤적 요소를 서구 신학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합니다. 말씀드렸듯 기독교적인 것에 위배되거나 충돌되는 것이 있다면 단호히 쫓아내야 합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히브리 사상입니다. 최근에 '기독교 전통의 원류이므로 더 살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런 주장이 나온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기독교 전통은 이미 확고히 서 있고, 히브리 전통 역시 충분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물론 더 받아들이거나 다시 살려내야 할 것이 있다면 그래야 하겠지요. 또 몰아낼 게 있으면 과감하게 몰아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을 찾아내 보존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기독교 전통은 2,000년간 누적돼 왔습니다. 교회사는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보여줬듯, 기독교는 서로 이질적인 두 전통 사이에서 어느 때는 이쪽으로, 어느 때는 저쪽으로 치우치면서 이어져 왔습니다. 정치적 문제에 좌우되어서 왔다갔다 한 적도 있지만, 항상 기독교는 다시 중심을 잡아갔습니다. 기독교적이지 않은 히브리 전통에 저항해 왔고, 기독교적이지 않은 그리스 전통도 배척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균형이 중요하고, 그 균형을 잡아가며 기독교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일,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 자체가 기독교적입니다. 어느 특정 시대에 어느 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쳐내면서 반대 쪽으로 옮겨오는 일이 필요할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히브리나 그리스 중 어느 쪽이 원류이기 때문에 다른 쪽을 밀어내야 한다는 논쟁은 소모적이라고 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