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다양한 류의 겸손을 말할 수 있지만 크게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우리의 겸손으로 나누어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겸손도 여타의 의미는 생략하고 여기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에 국한지우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의 겸손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빌 2:8). 이 겸손은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1828-1917)가 말했듯,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는 '구속적 겸손'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겸손은 감히 인간이 흉내낼 수 없는 겸손입니다. 예루살렘 입성 시 나귀 새끼를 타신 그리스도의 모습(마 21:5)은, 그의 겸손이 구속적임을 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줍니다.

여기에는 흔히 계몽주의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하듯,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겸손 개념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 재벌이 포니(pony)를 타듯, 화려한 백마를 탈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이 겸손의 미덕을 보여 주시려 일부러 새끼 나귀를 타셨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만일 나귀 타신 그리스도의 겸손을 가진 자의 여유로운 미덕쯤으로 해석할 때, 구속적 겸손 개념은 손상을 입고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락 없이 한낱 인간의 덕행으로 전락됩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 예수님의 제자 된 목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돼, "목사는 예수님처럼 작은 포니(pony)를 타야 나귀를 타신 예수의 겸손을 따르는 것이고, 에쿠스를 타면 타락한 목사"라는 식으로 왜곡됩니다(참고로 필자는 에쿠스를 안탑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그리스도는 그가 새끼 나귀로 상징된 비천한 죄인들의 구주와 임금이 되시고, 그들의 섬김을 받으시는 겸손한 그리스도이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건축자(유대인)에게 버려진 그리스도가 새끼나귀 같은 비천한 이방인들의 구주(모퉁이돌)가 되셨다는 말씀과(행 4:11) 맥을 같이 합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겸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의 하향(下向) 겸손이었다면,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정반대로 낮은데서 높은 데로의 상향(上向) 겸손입니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추심으로 겸손을 보이셨다면, 죄인 된 인간은 구속받아 높여짐으로서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역설입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이신 하나님 아들은 지고(至高)이시기에 아래로 내려오는 겸손을 취하셨지만, 더 이상 내려갈 곳 없는 진토에 붙은(사 14:12-13) 죄인은 오직 올라감으로서만 겸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죄의 타락으로 비참과 저주에 빠진 인간은 겸손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구속받아 진토에서 올려졌을 때만, 과거 자신이 앉아있던 우묵한 구덩이와 그곳에 둥지를 털었던 비천하고 비루했던 자신의 모습을 추억하고(사 51:1), 비로소 '나 같은 죄인(Amazing Grace)' 하며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유명한『겸손』의 저자도 우리에게 비슷한 말을 들려줍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 그의 은혜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 우리의 영혼에 따뜻한 겸손을 심어서 그것이 우리의 제2의 본성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도록 해주는 것은 오직 은혜밖에는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욥과 이사야를 낮추어 그들로 고개를 숙이도록 만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심 가운데 나타나심으로, 그의 은혜로 그들에게 가까이 가셔서 자기 자신을 알게 하심으로 된 것입니다(앤드류 머레이)."

이렇게 구원받아 진토에서 일으키심을 받은 겸비한 그리스도인에게 따라오는 2차적 겸손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어린아이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의 겸손을 말씀하실 때 어린아이와 연결지은 이유도, 구원받은 자에게는 어린아이의 겸비한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여기서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겸손에 대한 의식이 있어 의도적으로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컨대 겸손은 예수님의 명령이고 공동체의 선과 화목을 도모해주는 좋은 덕목이니, 겸손해야겠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런 의식도 의지도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천성적인 태도에서 나타나는 겸손입니다.

이는 바로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입니다. 어린아이는 절대적인 부모 의존을 통해 자신의 유약함과 부모 품의 절대 안전함을 드러냅니다. 이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키면, 자신의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께만 의존돼 있으며, 그 안에 머무는 한 절대 안전하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이러한 그의 절대 신뢰의 믿음을 통해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칭송하므로 그의 겸손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어린아이 같은 하나님 절대 의존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요 15:5)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그는 지상 생애 동안 성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정도로, 성부에 대한 절대 의존을 보이셨습니다.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성자 그리스도의 성부 의존은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하듯 하는 그런 절대 의존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바치지 않는 것은 자기의존적 불신과 하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교만입니다. 성경이 이스라엘의 불신을 완악한 교만이라 책망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불신은 변장한 교만이고, 믿음의 반대 개념이 교만이다(John Bevere)"라고 한 것은 온당합니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의 결과는 완전한 평안입니다. 절대적 신뢰로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기는 어머니가 위태로운 절벽 가장자리를 지나든, 사나운 짐승들 사이를 지나든 절대 평안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그 평안을 통해 엄마 품의 절대 안전을 증거합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신뢰를 통해 누리는 성도의 평안과 만족을 엄마 품속의 젖 뗀 아이의 평화로운 모습에 빗댄 것도(시 131:2) 같은 이치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와 그로 인해 누리는 평안을 통해, 자신의 유약함과 하나님의 품은 절대 안전하다는 것을 증거할 뿐더러, 자신의 겸비함을 드러냅니다. 갈릴리의 풍랑이는 배 위 고물에서(막 4:38),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로 평안히 잠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엄마 품 속에 평안히 안긴 젖 뗀 아기의 겸비한 모습을 봅니다.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께 늘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를 바치시므로 겸손을 보이셨습니다.

18-19세기 계몽주의(Enlightenment)  등장과 함께, 소위 '성숙한 인류'를 표방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맹신으로 치부됐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성숙한 인간이 지나치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거스리고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력을 사장시키는 우맹으로 치부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별명 그대로,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약간의 비침을 받는(enlightenment)' 정도의 기대로 그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to help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나님일 뿐, 그들의 전적인 구원자나 보호자가 아니었습니다.

계몽주의의 대표주자 이신론(deism)의 등장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의 상징이요, 그리스도인의 생명줄인 기도에의 열의를 꺾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천지창조 후, 인간을 포함해 자연만물을 우주의 자존법칙에 맡기고 우주에서 손을 뗐다고 생각하기에,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 달라 조르는 것은 미신으로 치부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강청하는 기도자들에게 "얘, 내가 너에게 네 자신의 생존법칙으로 살게 해줬는데, 왜 자꾸 내게 뭘 해 달라고 조르며 나를 귀찮게 하느냐. 너 스스로의 힘으로 생존하라"고 책망하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기도가 있지만,  그들의 기도 개념이라야 기껏 '자기 암시' 아니면 '뜻대로 되어지이다'는 숙명론적 긍정 개념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절대의존적인 겸비한 어린아이입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