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요일 4:9-10)"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만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인간의 선행(precedence, 先行)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을 촉발시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사랑에 대해 꿈도 꾸지 않았을 때, 곧 가깝게는 인간이 죄로 죽어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었을 때, 멀게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엡 1:4) 하나님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 기원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 있어, 인간이 자기의 선행(precedence, 先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이들의 하나님 사랑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닌, 일반 종교인들의 종교적 숭모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이슬람교도들의 알라(Allah) 숭모, 유대교도들의 단일신 여호와 숭모 같은 것들로, 신의 사랑을 구걸하려는 일종의 환심 끌기입니다. 이러한 관념의 배경에는 대개 둘 중 하나가 자리합니다.

하나는 소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율법주의적 종교 관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 레벨의 신앙이 돼야 한다"는 유유상종 관념입니다.

이는 소위 엘리트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배타성에서 고안한 것으로, 하나님은 저급한 기복주의자에게는 마음을 닫고 순수히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자신들에게 마음을 여신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독점물로 삼기 위해 고안한, 곧 하나님은 율법을 가진 아브라함 후손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선민(chosen people) 사상 같은 것입니다.

전자가 '인간의 전적 무능'를 모르는데서 나온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 사랑을 철학적이고 현학적인 것으로 곡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들이 사실 기독교를 이해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데 최대의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그 어떤 요구도 없이, "내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적 무능'하여 먼저 하나님께 손을 내밀 수 없는 죄인임을 아시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여 당신과 화목하도록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인들의 쉐마(the Shema),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는 한 마디로 "유일신 한 분 하나님(the one and only God)을 전심으로 사랑하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령을 쫓아 하나님 사랑에 골몰했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대부분 사랑의 결실을 못 본 채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고,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것은 원수와 바로 사랑에 빠지려는 것과 같기에, 당연히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신 30:6),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여 거듭난(화목한) 이후에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여 화목 중생하기 전에는 결코 당신에 대한 사랑과 섬김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독생자를 보내 그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거두절미한 채 다만 "나를 믿으라"고 요구하신 것도,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구원을 비롯해 그 어떤 것도 성취할 근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인자들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을 쫓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미중생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고 그의 뜻을 섬길 수도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섬김과 열심히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낳은 것에서도 확인됩니다.

이는 역사적인 사실들에서도 확인되며, 사도 바울도 그 중 한 경우입니다. 그가 거듭나기 전 유대교도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열심이 뛰어났지만 그것이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하나님 대적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 16:2)",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예수를 믿지 않은 바리새인 서기관들 역시 나름대로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었지만, 결과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저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마 23:13) 전도 방해꾼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도 복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역자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교회를 해롭게 할 뿐입니다. 특별히 그들의 사역이 크고 광범위 할수록 그 해악도 더 큽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처럼, 가라지의 번성함이 알곡의 약화를 가져오고, 가라지 교회들의 번성이 참 교회의 성장을 훼방합니다. 오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 그대로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은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준비 단계, 곧 원수관계의 청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죽고 못 사는 관계"에로의 즉각적인 돌입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화목하면, 원수 관계가 철폐되는 즉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갑니다. 이는 타락 전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가졌던 본연의 관계를 뛰어넘는 부부애의 깊은 연합입니다(엡 5:29-30).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원수' 아니면 '죽고 못사는 사이'뿐이며, 이도 저도 아닌 무덤덤한 관계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원수 관계를 철폐시키는 하나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바로 하나님과 '죽고 못사는' 관계에 돌입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적(同時的)이고 동의적(同意的)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만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율법주의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철학적이고 계몽주의적인 관념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고 한 말씀은, 인간과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기원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음을 함의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당신의 사랑과 섬김이, 하나님의 사랑(독생자의 죽음)을 받아들인 데서 출발했습니까?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