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얼마 후 이승훈은 서당을 고쳐 구학문이 아닌 신학문을 가르치기로 했다. 이제는 공자왈 맹자왈 암기하기보다, 현실적인 지식과 지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집을 지으려고 준비해 둔 목재와 기와를 들여 서당을 새롭게 단장했다. 직접 벽지를 바르고 회칠도 했으며, 칠판과 백묵도 갖추어 놓았다. 종루를 세우고 종도 달았다.

새 학교의 이름은 '강명의숙(講明義塾)'이라 붙였다. 그리고 전문교육을 받은 교사를 모셔와 신교육을 시작했다. 천자문과 사서삼경 대신 역사, 산술, 지리,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집은 물론 용동 마을 어구까지 나가서 길을 깨끗이 쓸고 풀을 뽑았다.

'내 것만 고집하지 말고 남의 것은 물론, 공동의 것까지도 내 손으로 깨끗케 해야 한다. 이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내 일과 남의 일을 구분하지 않고 솔선수범하였다.

한편 신민회는 국내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여,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런데 이 계획이 무르익어 가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남강은 사업차 평양에 나갔다가 이 소식을 듣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학생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다.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도 이제야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를 해치려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누가 우리를 좀먹는지도 모르고 잠만 자는 사람들이라고 외국 사람들이 흉보아 왔는데, 오늘 아침 하얼빈 역두에서 우리 청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한국 사람들도 살아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하겠지만, 한 나라 한 민족을 집어먹는 자는 때맞춰 없애 더 큰 해독을 막아야 한다. 여러분이 뒤에 사회에 나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도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이 곧 불의를 행하는 자를 죽여 없애는 일이 되는 것이니, 안 청년이 자기 몸을 희생한 것처럼 여러분도 몸과 마음을 나라를 위하여 바치기 바란다."

학생들은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어느 날 가문 어른들과 마을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나라의 형편에 관해 들려 주었다. 일종의 작은 시국강연회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는 통신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일반 사람들은 나라 안이나 국외 소식에 밝지 못했다.

이야기 끝에 그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물론 인륜과 공도를 무시한 일본의 죄가 가장 큽니다. 그러나 오늘처럼 망국이 눈앞에 이른 것은 그 책임이 우리 백성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우리집 담장을 단단히 쌓았다면 어떻게 도적이 뚫고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쳤다.
 
강명의숙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새해가 밝았다.

이승훈은 이젠 신교육을 위해 중등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사흘 밤낮으로 학교를 세울 궁리를 했다. 강명의숙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는 전쟁터에서 한 소대의 군사를 모아 힘을 기르는 것과 같다면, 이제 새로 오산학교를 세우는 일은 한 연대의 병력을 모아 힘을 기르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오산(五山)은 정주읍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인데, 옛 성을 중심으로 사방에 연향산과 황성산, 제석산, 천주산, 남산봉이 둘러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는 지역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도와달라고 간청했지만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돈이 되는 일이 아닌 교육사업인지라,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정주 향교(鄕敎)를 찾아갔다. 향교는 토지와 재산이 많아 학교를 세울 만한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향교의 완고한 유학자들은 그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명색이 양반인 자기들이 상인 출신인 이승훈의 뜻을 선뜻 따라주기 어려웠고, 더구나 항교의 재산을 그에게 맡겼다가는 자기네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흥! 언제는 이 나라 이 백성의 주인처럼 행세하던 자들이 막상 나라가 망해 가는 이 때엔 모르는 척 뒷짐만 지고 있군."

이승훈은 답답함을 못 이겨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뜻밖의 원자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관찰사가 이 소식을 듣고 협조를 약속한 것이다. 유림은 현직 관찰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기에, 결국 향교의 재산 일부를 기부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오랜 노력을 쏟아 마침내 자그마한 승천재(陞薦齋)가 있던 자리에 번듯한 오산학교를 세웠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