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안창호가 연설을 마치고 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이승훈은 그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무슨 용건이 있어서라기보다 그의 뜨거운 열정과 연설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훌륭한 말씀 정말 잘 들었습니다."

"아 네, 선생님 와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안창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안 와서야 되나요."

"왠지 얼굴만 뵈어도 힘이 솟는 것 같습니다. 시골 고향의 촌장님 같은...."

"허허, 바로 그 멍청이지요."

"하하, 미국에서 지낼 때 선생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뵙게 되니 정말 반갑습니다."

"젊은 선생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뜻은 내가 평소에 가졌던 생각과 같습니다."

"훌륭한 동지를 얻은 셈이군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소이다."

"언제 선생님을 조용히 뵙고 우리 민족의 앞날에 대해 의논하고 싶군요."

"음, 그렇게 합시다. 곧 다시 만납시다."

그날의 만남은 안창호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서우학회 관계자를 통해 미리 연락이 왔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의 부탁이었지만, 이승훈은 청년 지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흔쾌히 산길을 올랐던 것이다.

웅성거리는 청중들 틈에서 두 사람은 굳게 악수를 한 뒤 헤어졌다.

안창호와 만난 뒤 이승훈은 새 사람이 되었다. 그는 깊은 생각 끝에 상투를 잘랐다. 그 당시에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좋은지 나쁜지를 떠나 오래도록 습관적으로 해 온 풍습인지라 사람들은 상투를 자르면 천벌이 내린다고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승훈은 심사숙고 후에 일단 옳다고 결정하면 누가 뭐래도 실행하는 성격이었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

용동으로 돌아온 얼마 후, 이승훈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도산에게 들은 연설 내용을 들려 주었다. 투박하지만 열정이 깃들고, 세상을 밑바닥으로부터 경험하며 살아온 그의 말은 도산의 연설에 못지 않은 울림을 던졌다.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던 그는 얼마 후엔 안창호의 요청을 받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했다.

신민회는 계몽 강연을 통해 애국주의, 국권 회복, 민권 사상, 신지식의 계몽, 구습 타파, 교육구국 운동을 주창했다. 그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에 가장 많은 힘을 쏟았다.

이 시대 이 민족에게는 진취적인 신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계몽해 전국적으로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했다.

신민회는 중학교를 많이 세웠다. 그 당시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학교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중학교를 세워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해 교육구국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애썼다.

신민회는 회원들끼리도 누가 회원인지 몰랐으며, 심지어 회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회원도 있었다.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면 입회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비밀조직인 신민회만으로는 대중적인 민족운동을 벌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1909년에 최남선, 윤치호, 차리석 등 12명의 발의로 신민회의 외곽단체인 청년학우회를 만들었다. 그들은 비정치적인 인격수양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국권 회복을 위한 청년단체였다.

신민회의 활동에 이승훈이 동참한 것은 항일 민족운동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신민회 평안북도 지회의 책임자가 되어 동지들을 모아서 국권회복 운동에 합류시켰다.

신민회의 평안북도 조직은 평안남도에 비해 범위도 넓고 회원도 많았다. 평남 지회는 평양의 대성학교, 숭실학교, 일신학교 등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다. 평북 지회는 선천 신성학교와 정주 가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물론 의주, 곽산, 용천 등지에까지 그 조직이 뻗쳐 있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