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63장 개성화와 관련한 분석 사례(1)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사례는 저자가 야코비의 분석사례를 편의상 삭제 및 가감하여 정리한 것이다. 이 분석사례는 한 청년이 자신의 인생진로를 놓고 고민하며 방황하는 모습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청년으로서 사회에 적응하며 사회생활을 잘 하는 편이었지만, 장차 가정을 이루는 문제를 놓고 갈등이 심했다.

이런 경우 흔히 젊은이들에게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 바로 갈등양상이다. 그것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을 해야 할지, 아니면 비교적 안정적인 길을 따라 별로 변함없는 현실생활에 순응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심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 청년은 바로 그런 상황에서 갈등하다 분석자를 찾게 되었다.

1. 분석하기 전 환자의 증상

환자는 헨리(Henry)라는 25세 된 남자 공학도이다. 신교도 농민의 후예인 그는 스위스의 동부 농촌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는 개업분석자였으며 성격은 엄격했지만 환자들에게는 자상한 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성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으로서 무척 낭만적인 데가 있었다.

헨리는 대체로 내향적이고 부끄러움을 잘 타며 예민하고 키가 큰 청년이다. 얼른 보기에도 서양인의 표준적인 인상을 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 그는 지금 대학을 갓 졸업하고 큰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던 참이었다. 분석자를 찾아온 당시 헨리는 이미 2년 전 불어 사용권 스위스 처녀와 약혼을 한 상태였다. 그는 약혼녀에게 여성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지만, 결혼생활에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여 갈등하고 있었다.

2. 소풍을 간 꿈(첫 번째 꿈)

첫 꿈에서 환자는 치날로토른(Zinalrothorn)이란 곳에 소풍을 간 꿈을 가져왔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헨리는 사마덴(Samaden)에서 출발하여 한 시간 정도 걸어간 곳에 캠프를 치고 촌극을 하였다. 그 장면 중에서 길게 끌리는 외투를 입은 젊은 여자 배역을 맡은 여인이 인상적이다. 정오가 다 되어 혼자서 등산을 할 요량으로 산-고개로 향하여 떠났다. 그러나 나중에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려 했으나 어려워서 방황하는 중에 어느 노파를 만난다.

물론 그는 그 노파로부터 길 안내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캠프로 돌아가는 데는 여러 난관이 놓여 있었다. 그의 왼편에는 작은 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지나가는 차 안에는 모두 이미 죽은 작은 남자들이 숨겨진 채로 실려 가고 있다. 그가 방향을 돌이켜 오른 편으로 향하려 하는 그 지점에 그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 소나기가 퍼부었다.

환자가 분석치료를 받기로 약속하고 나서 첫 번째의 꿈은 대개 분석의 진행을 암시하는 꿈이기 쉽다. 물론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분석진행에 대한 전망을 알 수 있게 하는 꿈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그 첫 꿈인 소풍을 간 꿈이란 일단 분석치료를 받기로 한 헨리의 결단과 그 관계를 암시한다.

개성화 과정에서는 흔히 환자가 먼 나라로 여행하거나 탐험을 떠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과 단테(Dante)의 신곡(Divina Commedia)에서 길을 찾는 여행자가 산을 오르는 것과 흡사하다. 이는 헨리에게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자신의 혼란의 시기와 외로운 시기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촌극에서 그는 관객으로서 여인의 낭만적인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닮은 것이며, 그리고 그의 무의식 속의 여성적 측면의 인격화와 관련될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으로 표현된 인생행로의 첫 부분은 자아가 무의식에서 벗어 나와서 확장된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헨리의 확장된 자아의식의 상승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꿈에서 출발지와 도착지가 어떤 암시를 주고 있다. 출발지인 사마덴은 예전에 프랑스로부터 지역 해방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던 곳이다. 거기에다 도착지인 치날로토른은 헨리의 감정적 문제와 관련된다. '치날로토른'은 빨간 뿔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어 정열적인 감정으로서 감정기능의 가치를 드러낸다. 이로써 헨리의 감정기능은 성숙한 편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그는 산-고개를 향하여 혼자 등산을 감행한다. 여기서 산-고개란 그의 낡은 마음의 태도에서 새로운 곳으로 방향을 돌이키는 방향의 전환성을 의미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그는 혼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런 상황은 그의 자아가 시험을 극복해 내야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맨 몸으로 출발했으나 산-고개에 이르지 못 했다. 그 때야 비로소 그는 방향을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계곡에서 발견하게 된다. 일종의 목표를 향한 실패를 암시하는 이 장면은 옛날의 수동적인 자신의 성격이 새로운 모험에 나선 자아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제 헨리는 어찌할 수 없는 귀로에 서게 되었다. 그 무력한 상황에서 그는 다행히 길을 안내하는 한 노파를 만나게 된다. 노파는 신화나 동화에서 영원한 여성 본성의 지혜를 상징하는 원형상과 관계된다. 그러나 헨리는 감정이 원활하지 않고 논리적 사고에만 매달리는 상태이기에 노파의 도움을 받아들이는데 주저한다.

이와 같은 현상은 헨리와 같이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지니는 젊은이들이 정신발전의 길을 선택함에 있어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논리를 중요시 하는 젊은이가 옛날의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새로운 방법을 수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꿈에서의 헨리는 그 노파의 충고대로 전혀 다른 지점에서 등반을 시작해야 했다. 그는 전혀 다른 높이의 방향에서 새로운 판단을 내려 그 일행과 만나야 했는데, 이는 그의 정신의 여러 다른 특성들과 만나는 것의 암시라 본다.

그때 헨리는 오른편을 향하여 나가고자 했다. 그의 왼 편에서 작은 차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많은 죽은 시체들이 차에 실려 가는 모습은 다름 아닌 헨리의 암울한 기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새롭게 나타날 자아 저 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 수 있다. 여기서 오른편은 대개 의식적 영역을, 왼편은 무의식적 영역의 상징으로 본다.

특별히 꿈에서 죽어 있다는 판단은 헨리가 혼자서 한 목소리와 판단작용이다. 융은 꿈에서 목소리가 들린다면 자기(Self)가 개입하는 것으로 본다. 융은 꿈에 목소리가 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집단무의식과 관련된 것으로서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주는 상징적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헨리는 새로운 깨달음에로의 방향을 전환을 시도한다.

헨리의 이런 동작은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 주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그 새로운 방향의 지점에서 그는 기다리고 있는 일행을 만난다. 그가 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인격의 부분을 의식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자아가 홀로 대결하여 위험을 극복한 결과로 얻어 짐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속한 집단에 다시 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소낙비가 내렸다.

여기서 소낙비가 내리는 것은 긴장완화와 관련된다. 소낙비는 대지를 적시어 풍요롭게 만드는 것의 상징이다. 신화에서의 비는 땅과 하늘 사이를 연결하는 사랑의 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가 내린다는 것은 사물이 물로 인해 정화된 후 풍요를 기약하는 것의 상징이다. 이러한 비의 내림은 신화에서는 종종 신들의 신성한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엘레우시스(Eleusis)제전에서 모든 사물이 물로 깨끗이 정화 된 후 "비야 내려라"하고 하늘을 향해 외치고 나서, 땅에다 "풍요로울지어다!"고 외치는 것이 그 예가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헨리의 꿈에서 내린 비는 하나의 "해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헨리는 갈등하는 단계가 극복되어 자아의 새로운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자신을 더 성숙되게 더 안정된 상태에서 집단에 동참하여 생활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 헨리의 첫 꿈-분석에서 우리는 개성화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이 등장하고 있음을 본다. 노파의 충고와 안내가 그것이다. 꿈에서 노파의 총고나 안내는 원형상의 한 표본이다. 즉 헨리가 내적인 주체의 힘을 수용하는 측면이다. 그리고 그가 집단적 행동유형에 따르게 됨으로써 성숙으로 가는 이정표를 제시받은 셈이다.

이것은 또 다른 측면으로는 영혼에 긴장을 가져다주는 대극의 갈등이 새로운 길로 들어서려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젊은 여인의 상과 푸른 상의를 입은 죽은 시체들, 홀로 먼 길을 떠나는 것 등은 미래적인 암시를 준다. 그것은 정신적 발전을 위하여 취하여야 할 시련을 예견하게 만드는 암시이다.

3. 무의식에 대한 공포의 꿈(네 번째 꿈)

헨리는 네 번째 면담에서 인생의 경주를 하는 꿈을 가져왔다. 그는 그런 꿈을 여러 번 꾼 것으로 기억한다. 그 꿈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헨리는 군대생활, 장거리 경주 ... 홀로 길을 간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완주해야 할 코스를 알고 있었지만 꼴찌가 되지 않을 까 늘 불안해한다. 출발점은 작은 숲속이었고 땅은 마른 낙엽으로 덮여있는 상태였다. 그 곳의 지형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었고 그는 숲을 빠져 나와 실개천에 다다른다. 작은 시냇가에는 어느 꿈꾸는 듯한 여인이 시냇가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 마을에서 그는 큰 길로 빠져 나가는 길을 물었는데 7시간이 걸린다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가기로 했다. 그가 버드나무가 늘어진 시냇가를 지나 숲속으로 가는 동안 암사슴이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암사슴은 왼편에서 나타났는데 헨리는 오른 편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 때 그는 이상한 동물을 보았다. 반은 돼지, 반은 개인데, 모두 캥거루의 다리가 달린 동물들이었다. 안면을 식별할 수가 없었으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다. 마치 어린 시절에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것 같았다.

여기서의 헨리의 꿈은 대체로 인생행로에 관한 꿈이다. 군대생활, 장거리 경주가 암시하듯 평범한 남자의 운명을 나타내는데, 이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할 인생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거기에 적응하기를 원치 않기에 혼자서 길을 간다.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그의 심한 열등감이 장거리 경주에서 이길 수 없다는 확신으로 나타난다.

장거리 경주에서 지나쳐 버리고 있는 한 여인은 헨리가 의식적으로 꿈꾸는 낭만적인 여인상이다. 그러나 이것이 암사슴의 출현으로 상쇄된다. 암사슴은 여성적인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헨리의 본능세계는 여성적인 특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흔히 암사슴은 부끄러워하고 겁이 많은 순진한 여성스러움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의식은 여러 가지 분화되지 못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가 숲을 무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면, 거기에 나타난 동물들은 분화되지 않은 본능들이다.

게다가 보기 흉한 혼합된 짐승들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본능의 다발이다. 흔히 짐승의 상징에서 돼지는 대개 성욕과 관계가 있다. 희랍신화의 키르케(Circe)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은 남자들을 모두 돼지로 변하게 하였다는 일화는 좋은 실례가 된다.

반면 개는 복종을 의미하면서도 분별없이 상대를 택하는 난삽한 성행위의 상징이다. 다행히 캥거루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캥거루는 감싸주며 키워주는 모성의 상징이지만, 꿈에서는 이 동물들이 분명한 형체를 갖지 않은 채로 등장하였다. 이것은 앞으로 헨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본능들이 성숙되어야 할 특성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괴물이라 볼 수 있을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헨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는 어린 시절의 가면무도회에 참가했던 것처럼 분장한 사람 정도로 여겼다. 마음 깊은 곳에 불안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으나 자신에게 스스로 괜찮다고 애써 타이르는 모습이다. 이는 자신의 무의식 속에 내재하는 여러 요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은 전반적으로 헨리가 한 남자로서 살아가야 할 인생을 겁내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은 그는 세상을 겁내고 있으면서도 살만 하다는 매력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헨리의 현재의 심리상태를 잘 나타내주고 있는데, 이는 그가 약혼한 여자와 결혼을 앞에 두고 결혼의 의무를 무겁게 느끼는 심리상태인 것이다.

그는 결혼이란 책임 있는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다. 성격적으로 활달하지 못한 그에게는 이것이 부담으로 작용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이와 같이 헨리가 세상을 일면으로는 긍정적으로 다른 일면으로는 억압의 부정적인 이중성을 보인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양가감정(Ambivelenz)이라고 한다.

이런 양가감정은 대개 성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심리현상이다. 연령상으로 보면 헨리는 이미 성숙한 나이에 접어들어야 했으나 내적 성숙이 그 시기를 지나버린 것이다. 이런 심리적 현상은 흔히 현실과 외부세계를 두려워하는 내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특성이다.

4. 성자와 창녀의 꿈(열 번째 꿈)

14회째 면담에서 헨리는 성자와 창녀에 관한 꿈을 가져왔다. 그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헨리의 왼편은 아스라한 내리막길의 깊은 심연이 있고, 오른 편에는 바위가 벽처럼 둘러 서 있다. 헨리는 좁은 산길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간다. 길가에는 동굴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동굴은 모두 길가는 사람들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든 동굴들이다. 그 중간쯤에 창녀가 몸을 피신해 왔다. 그녀를 뒤쪽에서 보는 헨리는 몸의 형태를 잘 알 수가 없지만 호기심에 그녀의 엉덩이를 만진다. 이때 그녀는 갑자기 남자 창부로 보였다.

얼마가 지나자 그 남자는 다시 진홍색 외투를 걸친 성자로 변하여 헨리에게 다가온다. 성자는 길을 따라 늠름히 걸어가더니 어느 지점에 이르러 또 다른 동굴로 들어간다. 그 동굴은 도끼로 찍어 만든 의자와 벤치가 있는 곳이다. 그 성자는 이내 오만한 얼굴을 하고서는 헨리와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쫓아내고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자리를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이 꿈은 헨리의 개인적인 연상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씩 짚어가면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헨리의 창녀에 대한 개인적인 연상은 '빌렌도르프(Willendorf)의 비너스'와 관계가 있다. 이 비너스는 신석기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만한 여성을 조각한 작은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은 자연의 신(神)이거나 풍요의 여신(女神)을 상징한 듯하다. 헨리는 그 조각상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엉덩이를 만지는 것이 풍요를 위한 의식(儀式)이란 것을 프랑스어권 스위스의 주의 하나인 발리(Wallis)에서 들은바 있다. 아기를 못 낳는 여자들이 불임을 고치기 위해 그곳에 와서 엉덩이를 직접 그곳에다 대고 경사진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야 하는 곳이다.

성자와 외투에 관해서는 헨리의 약혼녀가 비슷한 쟈켓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색깔은 달랐다. 그는 이 꿈을 꾸기 전날 저녁에 약혼녀와 만나 춤을 추었다. 그 때 약혼녀는 흰색의 쟈켓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약혼녀의 친구인 다른 여자가 헨리 자신이 더 좋아하는 진홍색 쟈켓을 입고 있었다. 이제 이러한 헨리 개인의 연상과 관련하여 꿈의 원리에 입각하여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분명히 헨리는 좁은 산길을 방황하는 외로운 나그네이다. 더구나 황폐된 산에서 내려오는 그는 왼쪽의 무의식이라는 깊은 심연과 오른쪽의 의식이라는 단단한 바위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동굴을 보았다. 이 동굴은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는 즉시로 이 동굴을 외부적인 여건에 따라 피신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그 동굴은 모두 인간이 손으로 만든 작업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그러기에 이 동굴은 인간의 주의력이 한계에 이르러 무너질 때 의식 안에 생기는 빈틈과 유사함을 시사한다. 이런 빈틈이란 때로 환상의 내용이 나올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이것이 정신에 빛을 비추어진다면 자유로운 상상이 요동할 수 있는 창조력으로 변한다. 물론 동굴이 반드시 그런 일관성의 의미를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대개 심리학에서는 어두운 동굴이란 어머니인 대지(大地)의 자궁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는 변환과 재생이 일어나는 신비한 특성이 요동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분석을 따라가면 헨리의 성격적인 특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것은 이 꿈으로 보면 헨리는 주관적인 환상에 사로잡혀 동굴로 도피하는 내향적 후퇴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는 다른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깊은 곳에 자리하는 여성적인 경향이 반영되는 여성상을 본 것이다. 그 상(像)이 바로 창녀의 상(像)이다. 그가 의식의 세계에서라면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창녀를 만난 것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억압된 여성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녀는 모성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존경하는 어머니의 대극이며 금기의 표상이다. 이 금기의 표상은 헨리가 홀로 은밀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고 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대개 젊은이들이 여성과의 관계를 다른 감정을 배제한 채 단순히 동물적인 관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생각의 결합에서 어머니에 대한 충성심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이 감정은 진정한 사랑의 감정을 분리시켜 어머니 때문에 다른 여성을 금기시하는 경향으로 아들들의 마음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것은 물론 모성콤플렉스에 집착된 남자의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는 모두 비슷하지만, 그 정도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헨리는 자신의 환상의 동굴로 도피한 나머지 창녀를 등 뒤에서만 본다. 그는 감히 정면에서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여기에서 등의 뒷면이란 흔히 남성의 관능을 자극하는 여성의 신체부분인 엉덩이 쪽에서 본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더구나 헨리는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게 된다.

이는 헨리의 무의식적인 욕구충족의 표현이기도 한다. 그는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넘어 관능적인 매력에 끌린 것이다.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대결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무의식의 욕구의 발로이다.

그러나 헨리가 손으로 그녀를 만지는 순간 갑자기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양성적인 느낌을 가진 것이다. 신화에서는 종종 이런 양성적인 변화가 나오며 사춘기에는 이런 꿈을 자주 꾸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것이 대개 동성애로서 발전되는 경향도 있지만, 사춘기에는 이러한 특성이 꿈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어서 그 남자가 다시 성자로 변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또 다른 상징을 나타내는데, 이는 성욕을 부정하는 도피의 한 방법으로 육신을 부정하고, 성스런 생활로 귀의한다는 것의 상징이다.

특별히 성자가 걸친 외투는 개인의 외부세계를 덮고 있는 가면의 상징인 페르조나이다. 이 외투는 개인의 내적인 자기(Self)를 감추는 수단이다. 특히 페르조나는 헨리의 여성에 대한 어떤 태도를 은폐하는 것을 드러낸다. 성자의 외투색깔과 모양이 모두 자신의 약혼녀와 그 친구의 것과 같다. 이것은 헨리가 여성적인 매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성자의 외투에서조차 진홍색의 감정과 정열을 느끼는 것은 일종의 숨겨진 애욕적인 면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성자의 모습에 일종의 애욕적인 영성(spirituality)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애욕적인 영성적 측면은 종종 성욕을 억압하고, 다만 '영성'이나 이성(理性)에만 의지하려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성욕을 억압하는 행위는 인간의 자연스런 태도는 아니다. 인간이 육신의 세계를 도피하여 산다는 것이 어디 자연스러운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특히 인생의 전반기에서는 자신의 성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종족을 생산하는 수단을 통하여 종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기에 성욕을 회피하고서는 이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헨리의 꿈은 바로 이런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 다음 성자는 끝내 동굴을 떠나 계곡으로 내려가는 장면의 꿈은 일종의 종교적인 특성이 연상된다. 험난한 계곡은 초기 그리스도가 받았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가 박해를 받으며 골고다 언덕길을 걸었다는 점에서다. 그 때에 성자는 아무렇게나 도끼로 찍어 만든 의자와 벤치가 있는 두 번째 동굴로 들어간다.

아마도 이 동굴은 영혼을 치유하는 성스런 장소인 것 같다. 세상적인 복잡스러움과 단절된 한적한 동굴이기에 이 동굴은 그대로 명상의 장소이다. 그리고 그 동굴은 지상의 것이 천상의 것으로, 육체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전환되는 신비로운 사건이 일어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헨리는 성자를 추종하는 것이 끝내 허락되지 않은 채 동굴 밖으로 쫓겨나 버렸다. 이것은 성자를 추종하는 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나 바깥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의 암시이다. 그 반대로 바깥세계의 생활을 성공적으로 살지 못하는 사람은 신령한 영적세계나 종교적인 영역에 몰입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 꿈은 전체적으로 헨리의 원시적인 관능의 공포와 금욕주의로 도피하려는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때문에 성자는 여기에서 예지적인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비교적 덜 분화된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또한 성자와 가까이 지낼 만큼 성숙되지 않은 헨리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5.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개성화 과정에 대한 분석사례에 대하여 기술했다. 이 사례에 등장하는 청년은 분석치료를 받는 9개월 동안, 즉 모두 35시간 중에 야코비에게 50개의 꿈을 가져왔었다. 여기서는 다만 중요한 시점만을 구분하여 야코비가 해석한 부분을 간추렸다.

그렇다 해도 여러가지 면에서 융-분석가의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우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 기록된 개인분석 및 분석사례가 많지 않기에 정리된 것을 축약하기도 하고,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편의상 첨삭을 가하였다. 특별히 이 분석사례는 드물게 개성화 과정에 대한 성공적인 분석사례이기에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