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날 유행하는 전도 방식 가운데 하나가 상대방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고 하는(예컨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같은 '도발적' 형태가 아닌) 호감 전도(good-image evangelism)입니다.

이 호감 전도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기독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관심을 갖습니다. 거부감을 주는 성경은 아예 말하지도 말고,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도 숨기라고 합니다. 기독교 이미지가 너무 부정적이라서 그래야만 그나마 전도의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전도가 안 되면 이런 고육지책까지 나왔을까' 하는 연민의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이는 인간과 복음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전략인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이들은 전도가 안 되는 것이 복음을 들려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비호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않는 듯 하며, 오직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관건입니다.

곳곳에 즐비한 십자가를, 이들은 '한국에 더 이상 복음을 알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로 삼는 듯합니다(그러나 교회를 출입하는 이들 중에도 복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그들은 당장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도발적이고 비호감의 전도 방식을 버리고, 가톨릭처럼 사회봉사 같은 좋은 이미지를 심는 일에 힘쓰라고 충고합니다. 이들의 주장에서 비교육적인 환경을 제거하면, 인간 스스로 완전해질 수 있다는 자연주의 교육관(Rousseau, Jean Jacques, 1712-1778)을 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에 대한 거부감의 실체를 막연한 추정이 아닌, 성경적 잣대에 의해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인의 비호감은 기독교인의 불량함(?)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선량한(?) 기독교인들에게조차 세상은 호의적이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확인됩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인들로 평가받는 청교도들(puritanists)조차, 동시대인들에게는 비호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룩한 삶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 것이 아니라 결백주의자, 분리주의자, 까칠한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낳았습니다. '청교도(puritan)' 하면 다들 아주 '고급진 기독교인'을 연상하지만, 당시 이 호칭은 조롱 섞인 비하어(卑下語)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청교도들은 당연히 동시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어야 했지만, 이유 없이 미움을 받은 것이 불가사의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오늘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비호감에 대해 신중한 분석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에게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겉으로 표방하는 이유가 기독교인의 불량함이지만, 사실은 복음에 대한 이유 없는 적대감을 위장한 것입니다(행 9:1-2). 어둠이 빛을 미워하듯, 사람들은 이유 없이 복음과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합니다. 이는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께 그랬고(요 3:20), 그에게 속한 제자들에게도 그랬습니다(요 15:18, 1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그리고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불택자들을 구원에서 제외시키려고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때문입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악역을 사단에게 담당시켰습니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 4:3-4)."

이처럼 기독교인들과 복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비호감은 영적인 차원인데도, 기독교인들의 불량함 탓으로 오도되고 있음은 안타깝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 자신들의 불량함 때문에 전도가 거부당한다고 여겨, 전도에 담력을 갖지 못합니다. 착한 기독교인들만 있으면 사람들이 전도를 잘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은, 성경적 근거도 없으며 영적 원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차제에 호감전도(good-image evangelism)가 반드시 좋은 전도가 아니라는 점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호감 전도가 피전도자들로 하여금 반드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르나, 과거 예수를 쏙 빼닮았다는(?) 한 그리스도인이 어느 날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사람들에게 더 주목받고 있음을 깨닫고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실망스러운 행동을 했다 고 합니다. 예수 닮음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예수는 보여주지 못하고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을 도둑질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적 무지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호감 있는 사람이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될 것이라거나, 호감 전도(good-image evangelism)가 이상적인 전도 방법이라는 주장이 정당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너무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전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아 보입니다. '질그릇의 보배(treasure in earthen vessels, 고후 4:7)'라는 바울의 전도 철학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질그릇 같이 약점 많은 보통 사람들의 전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피전도자의 거부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기독교인과 복음에 대해 거부반응을 나타낸다 해서, 그들이 영원히 적대자로 남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적대감이 후에 복음을 수용하게 하는 반전(反轉) 카드가 됩니다.

사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반전이 하나님의 흔한 구령 방법이었습니다. 극적 반전의 상징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유대교도였을 때 극악한 기독교 핍박자였습니다. 스데반 살해에 찬성표를 던졌고(행 26:10),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잔해했습니다(행 9:21, 갈 1:13).

그러던 그가 그렇게 자신이 핍박하던 복음을 위해 순교자가 됐습니다. 반전 중의 반전입니다. 그의 반전이 얼마나 극적이었으면, 주님이 그를 오고 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표본으로 삼았다고 할 정도였겠습니까(딤전 1:16).

바울뿐입니까? 한국 초대교회 때 선교사들에게 악명 높았던 김익두(金益斗, 1874-1950) 역시 극적인 반전(反轉)의 사람이었습니다. 1900년 어느 날, 소안론(W. L. Swallon)선교사의 부인이 안악 시장에서 술에 취한 김익두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김익두는 그 자리에서 꾸깃꾸깃하여 코를 풀었습니다. 이를 본 선교사 부인이 "오늘밤에 당신 코 썩습니다" 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이 김익두의 귀전을 맴돌며 괴롭혔고, 그것을 계기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전도란 인간적인 호감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과감한 도발 전도(provocation evangelism)와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호감 전도자들(good-image evangelists)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전도의 방해물이라고 하나, 오히려 하나님은 반감을 구원의 반전 카드로 활용하십니다.

반감(反感)이 없는 곳에는 반전(反轉)의 기회도 없습니다. 여기서 또다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복음의 예측불허성과 반전의 위대함이여!

마지막으로 복음 전도는 구원뿐만 아니라 심판의 목적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전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명을 재고하게 하며, 가시적인 열매에 목을 매지 않게 합니다.

예수님은 만일 누가 복음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않으면 그 말이 그를 정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요 3:18, 12:48). 만물에 드러난 희미한 신성을 보고 안믿으면 핑계할 수가 없다고 했는데(롬 1:20), 확실한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면 정죄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점에서 전도자는 전도를 통해 언제나 두 가지 직임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령의 열매가 맺혔다면 그는 구원자 직임을 행사한 것이고, 못 맺었다면 심판자 직임을 행사 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자에게는 어떤 경우도 실패나 헛수고가 없습니다. 노아는 방주 건축을 통해 수년 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전했지만, 단 한사람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벧전 3:20; 벧후 2:5).

그러나 성경은 노아의 전도를 실패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방주 전도를 통해 그 집을 구원했고,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그 시대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히 11:7).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