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씻으셨다(washed us from our sins in his own blood, 계 1:5)"는 말씀은 먼저 그리스도의 피에 무슨 마력이 있어, 그의 피를 뿌리면 순식간에 모든 죄가 다 지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죄 값을 지불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7).

'죄 사함을 받았다'의 원어적 의미는 '죄값을 지불하다(라차)'입니다(사 40:2). '죄값을 지불하다'와 '죄사함을 받는다'가 동일시됐습니다. 죄 값(롬 6:23)을 지불할 때 용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배경에는 그의 대속(代贖, 죄값을 대신 지불함)이 자리합니다. 여기에 대한 완벽한 예시 구절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입니다. '피흘림', '정결', '용서'가 매치돼 있습니다. 피의 대속으로 죄가 정결케 되어 용서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에게(마 9:2), 간음 중 붙잡힌 여인에게 '죄사함'을 선언 해 주신 것은(요 8:11), 장차 자신이 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치룰 '대속(代贖)'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아들의 직권으로 용서를 남발할 수 없었습니다. 죄의 대속 없이는 단 한 사람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대속 없이는 용서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적 사랑입니다.  

인간의 죄를 처리하는 방식이 왜 꼭 '용서(롬 4:7-8)'여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으나, 죄를 완전히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죄의 경향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씩(마 18:22)' 끝없이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전에 우리에 대한 그의 태도였습니다.

혹자는 완벽한 '씻음(washing)'의 이미지에 반복성을 함의한 '용서(forgiving)'를 대비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만, '용서'는 완전한 죄의 처리 방식입니다. 동(東)과 서(西)의 거리가 끝간데 없듯, '용서'는 사람의 죄과(罪科)를 그에게서 그렇게 영원히 옮깁니다(시 103:12). 심지어 하나님도 기억해내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처리합니다(히 8:12; 10:17).

용서는, 죄를 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광야로 보내진, 아사셀 염소(Azazel, scapegoat, 레 16:10)에 비견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었다는 말은, 그의 피로 죽은 자를 살려낼 만큼 정결케 됐다는 뜻입니다. 언뜻 '살려냄'과 '정결케 함'이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는 생각을 할지 모르나, "죽음(death)은 부정하고 삶(living)은 거룩하다"는 성경적 전제에 따른 것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의 시체에 접촉한 자는 반드시 정결 의식을 받아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이(민 19:11-13)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죄된 더러운 행위를 '죽은 행실'이라고 말씀한 것도(히 6:1; 9:14), 부정함과 죽음을 동일시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성경 뿐 아니라 세상 풍습도 죽음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흔히 가장 심한 악취를 시체 썩는 냄새로 표현합니다. 시체의 지독한 악취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엔 죽음을 부정하게 여기는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갓 결혼한 부부나 신생아가 초상집에 가면 부정 탄다고 접근을 엄금한 풍습도 같은 맥락입니다.

반대로 성경은 '살아있음(living)'을 '거룩(holy)'하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living sacrifices, holy)'로 드리라(롬 12:1)."'거룩'과 '살아있는'을 연결지었습니다.

성경은 '죽은데서 살리는 구원'과 '정결'도 동일시합니다.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 37:23)."

죽은 영혼을 살리는 '중생(regeneration)'을 정결케 하는 '씻음(the washing)'으로 표현한 것 역시 살리는 구원을 거룩으로 본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하나님을 거룩하시다고 하는 것은 그 분에게는 죽음이 없고 영원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생명)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거룩, 딤전 6:16)."

이 점에서 오늘 그리스도의 피로 중생의 씻음을 입은 자만큼 깨끗한 자는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적 행위로 그들을 꾸미는 것에 대해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예수님이 독설하신 것은, 중생 없는 인간의 종교 수양이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으면 그와 연합될 만큼 거룩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으면 하나님의 거룩이 입혀져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된 자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임마누엘의 피라 함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그가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그와 연합할 수 있도록, 그와 동질의 거룩을 우리에게 입힙니다. 동질끼리만 상호 교호(interactivity)한다는 동질성 원리(a principle of homogeneity)처럼, 그리스도의 거룩을 가진 자만 그와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그와 연합시킬 만큼 거룩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의(義)'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 5:9)."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義)의 거룩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킵니다. 이 의(義)는 다시는 정죄가 없게 하는 완전한 의입니다.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계1:5)"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의롭게 하여 다시는 정죄 받지 않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흔히 생각하듯 '죄에서의 해방'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됐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입음으로 다시는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게 됐다 는 뜻입니다. 이 완전한 의로 말미암은 거룩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능케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도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이 의의 거룩함을 교회가 입었기 때문입니다. 창기와 같이 더러운 죄인을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케 하여(엡 5:26) 그의 몸 된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의 의(義)의 거룩을 입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꾀할 수 없습니다. 무죄한 아담이 그랬듯, 용서받은 무죄한 인간은 다시 범죄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한 번 우리에게 들어오신 그리스도가 다시 떠나시지 않으려면(요 14:16), 우리에게 정죄가 없도록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義)의 거룩이 입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그와의 연합은 인간에게 허락된 거룩함의 극치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