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이 그의 전 존재가 이기심만큼이나 그렇게 확고하게 의존하고 있는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몸과 영혼의 분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영혼이 분리될 수밖에 없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사람은 그의 이기심이 이기심에 의존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그렇게 확고하게, 그의 육체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한 예를 들자. 결국 우리 인간의 입에 그토록 자주 오르내리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남녀 간의 사랑을 선택해 보자. 왜냐하면 남녀 간의 사랑은 이기심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가장 깊은 표현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는 사랑에 빠진다. 이 대상은 그의 눈에 기쁨, 그의 마음에 바람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그의 눈에 기쁨, 그의 마음에 바람이었다! 그녀 또한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상해보라. 서로는 헤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사랑의 열매는 점점 더 익어만 간다.

이 젊은 청년, 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기도실로 들어가 기도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그녀와 헤어지라!"

슬프다! 이 대상은 그의 눈에 기쁨, 그의 마음에 바람이었다! 나의 독자, 이기심이 실제로 살해당해야 한다면, 이 말이 얼마나 깊이 관통해야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 보자. 그는 고통 중에 울부짖는다.

"아니, 나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 대상과 헤어질 수도 없습니다. 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이 대상을 지킬 수 없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소서. 아니면, 적어도 이 대상이 나를 버리게 하소서!"

당신은 그를 이해한다. 그의 이기심은 대상을 빼앗김으로써 확실히 상처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사랑의 대상을 포기해야만 할 때, 그의 이기심이 더욱 깊이 상처를 받게 된다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했다.

나의 독자, 이기심이 더욱 깊이 살해당해야 할 때, 고통을 더욱 깊이 추적해보기 위해 앞으로 나가보자. 우리가 "이 사랑의 대상"을 포함시켜 보자.

그래서 그때 그가 바랐던 이 대상, 그가 다가갔고, 그가 소유했던 이 대상, 그의 눈에 기쁨, 그의 마음에 바람, 그가 헤어져야 하는 이 대상(죽어가는 고통을 조금 더 치명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것을 가정해 보자). 이 대상, 그녀 역시 그와 같은 마음이다. 그녀 역시 죽도록 헤어지기 싫다.

그들을 분리시키는 것은 정말로 잔인하다. 그리고 분리해야만 하는 자가 바로 그이다! 그는 이 세상의 어떤 권력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대상과 헤어져야 한다.

이 대상은 헤어지기에는 이중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당신도 상상할 수 있듯이, 사랑의 대상이 눈물로 간청하고 있으니까. 이 사랑의 대상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그를 중시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으니까.

"나의 하나님, 그가 이상해요. 왜 헤어지려고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발 그를 말려 주세요!"

이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이가 바로 그이다!

여기에서 당신은 죽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한 예를 가진다. 그의 소원,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그의 바람의 대상, 그의 사랑의 대상을 빼앗기는 것을 보는 것, 이것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이기심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상이 그의 소중한 바람이었다면, 그리고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 이것도 충분히 고통스럽고 이기심은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이루어진 바람을 스스로 산산조각 내야 하는 것, 그가 소유하고 있는 바람의 대상을 스스로 빼앗아야 하는 것, 이것은 근본에서 이기심에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손으로 스스로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했을 때처럼 말이다.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이삭, 그는 그토록 기다렸고, 그토록 열망했던 선물이 아닌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물이다. 아브라함은 남은 평생은 이 선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는 결코 감사를 충분히 드리지도 못했다. 이삭, 그의 독자, 그의 늙은 나이에 얻은 자식, 약속의 자녀 아니었던가!

당신은 죽음이 이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있을 때, 확실히 모든 것은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 "죽음"은 이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죽는 것이 아니니까. 아마도 그의 앞에, 죽었던 자 앞에 긴 생애가 남아 있으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죽음"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영이 오기 전에 당신은 먼저 죽어야 한다. 때로는 내가 하루든 오랜 기간이든 기분이 안 좋고, 지치고, 기운이 없고, 죽은 자처럼 느낄 때, 나는 또한 나 자신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오, 나에게 생명을 주소서! 내가 꼭 필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혹은 아마도 내가 과로했을 때, 그리하여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때, 혹은 내가 너무 오랫동안 온갖 실패를 다 경험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생명이요! 나에게 생명을 주소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내가 필요한 것은 이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기독교는 말한다.

"아니, 먼저 완전히 죽어라! 네가 아직도 이기적으로 생명에 의지하고 있고, 네가 고통, 짐이라고 부르는 그 생명을 붙들고 있다는 것이 너의 문제다. 완전히 죽어라!"

나는 이미 절망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본 적이 있다. 나는 또한 그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나에게 생명을, 제발 생명을 주십시오! 이것은 결국 생명을 제거하는 죽음보다 더 나쁘군요. 나는 죽었으나, 그럼에도 죽지 않는 자처럼 있습니다!"

나는 가혹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어떤 온화한 단어를 알고 있었다면, 기꺼이 위로하고 격려할 의향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아직, 아직, 고난당하는 자가 다른 무언가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 그는 더 극심한 고난이 필요했다.

더 극심한 고난! 누가 이와 같이 말할 만큼 그렇게 잔인한가? 사랑하는 독자, 이것이 기독교이다. 이것이 부드러운 위로라는 이름 아래에 팔려나간 기독교의 교리란 말이다.

반면, 기독교는 영원의 위로(eternity's comfort)이다. 그래, 정말로 기독교는 영원히 위로한다. 그러나 이 위로는 확실히 가혹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너와 내가 그토록 열망하여 버텨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돌팔이 의사는 즉각적으로 당신에게 봉사할 것이며, 즉시 치료법을 적용하고 모든 것을 망친다. 그러나 기독교는 치료법을 적용하기 전에 기다린다.

기독교는 영원(eternity)의 도움으로 온갖 자질구레한 질병을 고치지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자기모순일 뿐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기독교는 이 병이 영원을 적용해야만 할 경우에,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경우에, 다시 말해, 당신이 죽어야만 하는 곳에서 병을 고친다. 따라서 기독교가 스스로 허튼 짓을 하지 않도록(우리 인간이 너무 열망하여 버틸 수 있는 것), 기독교가 허튼 짓을 하고 있는 당신을 승인하는 일이 없도록 돕고 있는 것이 기독교의 가혹함이다.

당신은 틀림없이 작은 규모로라도 기독교의 올바름을 경험해 왔다. 당신은 내가 경험한 것을 경험한 적이 없었는가? 아마도 당신이 신음하기 시작할 때, 이미 당신은 말했었다.

"나는 더 이상은 못 버텨요."

다음날 당신은 더 가혹하게 다루어진다. 그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당신은 버틸 수 있었다!

말이 킁킁거리며 숨을 헐떡거릴 때 지쳐있는 것처럼 보이고, 한 줌의 귀리가 필요한 것처럼 보일 때, 그러나 반면 한 순간의 정지 후 무거운 짐을 실은 마차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질 때, 아마도 무거운 짐이 말과 마부와 온갖 짐들을 저 심연으로 던져 버릴 때, 마부가 말에게 치명적으로 채찍질을 가하는 것은 잔인한가?

전에는 결코 그런 식으로 채찍질을 가할 마음이 없었던 그가, 그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이 특별한 한 조의 말에게 채찍을 가하다니! 이것은 잔인한가, 아니면 친절한가?

이것이 파멸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무조건적으로 유일한 방법이며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때, 잔인한 것은 정말로 잔인한가? 죽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독자, 그때, 그때, 생명을 주는 영이 오신다. 언제? 이 일이 일어났을 때, 당신이 죽었을 때. 말씀이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주와 함께 산다(딤후 2:11)"고 말한 것처럼, 이 말씀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