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들을 간단히 소개함으로써 출발해 보자.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주 나타나셨다. 일시에 500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고전 15:6).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을 지상의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며 가르치셨다(행 1:3).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다. 약속하신 것은 무엇일까?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눅 24:49)."

그러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이었다. 예루살렘은 유쾌한 기억이 머무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장소는 그들의 모든 비겁함과 무기력한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 장소였다. 이곳은 굴욕, 패배, 절망, 상처와 한의 장소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그 모습으로 있으라니! 그 자리에서 떠나지 말고, 의로우신 주님이 무력하게 죽어가는 그 처참한 패배의 기억을 떨쳐내지 말고 그대로 간직한 채 예루살렘에 남이 있으라니!

그것은 그 몸서리치던 수치와 패배, 낙담, 절망을 간직해야만 성령강림에 대한 기대를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인간적인 성공과 모든 야망은 주님의 십자가와 함께 완전히 못박혀야 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제자들의 꿈도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들의 믿음은 박살나야 했다. 주님이 죽으실 때, 그들의 소망은 절망이 되어야 했다. 주님이 죽으실 때, 그들의 사랑은 수치가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주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한 의미는 무엇인가? 아마도 다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여러분은 실패한 그 자리, 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 그 자리에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고, 부릅뜬 눈으로 여러분의 바닥난 인간성을 응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완전히 세상에 대하여 죽고 이기심에 대하여 죽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모든 이기심과 세상적인 야망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이제 어떤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없었다.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들의 소망 역시 참 소망이 아님이 드러났다. 주님께 고백했던 사랑은 위험 앞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들 안에는 어떤 능력도 없다. 이제 모든 동력은 끊어졌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니!

그들이 세상의 모든 동력이 끊어졌을 때,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이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 강림 사건이 있다. 성령의 오심은 결국 그들의 "영적 죽음" 후의 사건이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들 역시 자신들을 사로잡고 있었던 "시대정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아닌가?

따라서 우리에게도 역시 십자가 사건은 두 번 필요하다. 첫 번째는 '수동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건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처럼,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 한, 그리스도 안에 살 수 없다.

두 번째로 '능동적으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건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니라(갈 5:24)."

이때만 성령은 오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실 것이다. 얼마나 소름끼치는가! 성령이 일하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한다니! 사람들은 기독교가 부드러운 위로지 그렇게 사람들에게 겁박하는 종교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기독교가 부드러운 위로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 당신이 먼저 죽는다면야.

죽음 다음에 오는 생명은 새로운 생명, 곧 새 생명이다(롬 6:4). 문자 그대로 새로운 생명이다. 따라서 이 생명은 단순한 수명의 연장이 아니다. 이 새 생명이 오기 전에 죽음이 사이에 온다. 당신은 죽어야 한다. 생명을 주는 영은 당신을 죽이는 자다.

기독교를 망령되이 일컫지 않기 위해서는 이 죽음이 필요하다. 이 축제를 생각해보라. 오순절에 성령은 강림했다. 교회는 생명을 주는 성령이 사도들에 의해 전달되었기에 생겨났다.

어쨌든, 죽음이 먼저다. 이 죽음은 몸의 죽음이 아니다. 당신의 이기심에 대하여 죽는 것, 곧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당신은 먼저 이 세상의 소망에 대하여, 모든 인간적 확신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이 당신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이기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니까.

당신이 이기심에 대하여 죽는다면, 곧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세상을 이긴다. 세상은 이기심에 대하 죽은 자를 지배할 수 없으니까. 바로 이것이 믿는 자가 세상을 이기는 방식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요일 5:4-5)."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