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가을로 접어들며 낙엽이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던 날이었다.

염려했던 끔찍한 사태는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

신문엔 이미 기정사실이 된 기사가 실려 있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의 발톱을 점점 드러내고 있었다.

우선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 )가 미국 장관 윌리암 태프트(William H. Taft)를 만나 모종의 협약을 맺었는데, 그것은 조선에서 일본이 이익을 챙기는 걸 인정하며 보호와 지배까지도 묵인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일진회라는 친일매국 단체를 만들어 보호조약이 필요함을 백성들에게 선전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일본군을 거느린 채 궁전으로 들어가 고종 황제와 국무대신들을 협박해 조약 체결을 강요했으니 그것이 곧 치욕적인 을사늑약이었다.

신문지를 쥔 이승훈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입에서는 고통스런 신음이 흘러나왔다.

"악질 강도 놈들! 아아, 힘이 없다 보니 뻔히 보면서도 우리 겨레가 수천 년 살아온 강토를 유린당하는구나!"

그는 눈초리에 울분과 원한이 서린 눈물을 비치며 탄식했다. 물기에 젖었을지언정 그의 눈빛은 형형했다.

머릿속으로 나라와 민족의 슬픈 운명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는 신문을 움켜 내던지곤 주먹으로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그래도 울분이 풀릴 길 없자 마치 황소처럼 씨근덕거리며 집을 뛰쳐나갔다.

미친 사람인 듯 정처도 없이 헤매 다니던 그는 산자락 밑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가에 멈춰 섰다. 잠시 맑은 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던 그는 손바닥으로 물을 떠 세수를 했다. 그제야 좀 흥분이 가라앉는 기색이었다.

그는 천천히 산길을 걸어 올라갔다. 스산한 바람이 가랑잎을 떨궈 이리저리 날려 보냈다.

'아, 나는 어디서 와서 이 삭막한 땅을 떠돌다가 또 어디로 갈 것인가? 저 낙엽보다 더 처량스런 신세로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계속 산을 올랐다. 장군바위 앞에서 문득 발길을 멈추더니 저 멀리 펼쳐진 고향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평양이나 신의주 같은 도회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푸른 하늘 아래 아름답고 정겨운 동네였다. 그리고 그 산은 그가 어릴 적부터 자주 오르내리며 인생의 꿈을 꾸었던 곳이었다.

멀리서 쑥국새가 구슬피 울어 그를 어린 시절로 데려갔다.

이승훈은 1864년 초봄, 꽃샘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에 평안북도 정주읍의 어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석주와 어머니 홍주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먼 조상은 본래 의주에서 살았으나 할아버지 때 선천으로 옮겨와 얼마 동안 살다가 다시 정주읍으로 이사를 했다.

이석주가 아내와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정주로 온 것은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였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먹고 살기가 힘겨웠기 때문에 새로운 터전을 잡아 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린 승훈은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아버지 이석주가 아들을 얻은 후 더 열심히 일한 것은 물론이고 어머니도 남의 집 품팔이 일을 하면서 부지런히 가정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궁핍한 형편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끼니를 걸러야 하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더구나 서울에서는 경복궁을 짓느라 당백전이란 것을 만들어 풀어놓은 바람에 물가가 폭등하여 백성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빌어먹을 세상! 차라리 산골짝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는 것이 낫겠어."

아버지는 푸념하듯이 내뱉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 말이 가당치 않다는 듯 가로막으며 진정시키려 했다.

"없는 사람은 어디 가더라도 마찬가지예요. 좀더 참고 노력하면 언젠간 풀릴 날이 있겠지요."

어머니는 몸조리는커녕 며칠 쉬지도 못하고 품팔이를 나가야만 했다.

그녀는 고된 일 때문에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고통 속에서도 어린 자식을 걱정하던 어머니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영 숨을 거두었다. 승훈이 태어난 지 겨우 8개월만의 일이었다.

어린 애는 다섯 살 위인 형 승모와 함께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야만 했다. 가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어머니 이상으로 극진히 보살펴 주시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생각할 정도였다. 음식도 할머니에게서 받아 먹었고, 할머니의 등에 엎혀 지내다가 할머니의 품에 안겨 잠들곤 했기 때문에 할머니의 품이 어머니의 따뜻한 품과 같았다.

정주성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어 여러 차례 난리를 겪었다. 고려 때는 한동안 거란족에게 빼앗긴 적도 있고, 한때는 몽고의 영토가 된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정주 땅에 큰 피해를 끼친 사건은 18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이었다. 반란군과 정부군 사이의 극심한 교전으로 정주성은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