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비롯해, 모든 영적 지식을 열어주는 열쇠입니다. 신학적 표현을 빌리면 '계시의 방편으로서의 믿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us)이 기독교의 앎을 '믿음의 앎'이고, 기독교 교육을 '신앙 교육'이라고 정의한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정의가 불신자들에게는 물론 교회 안에서조차 종교심리학적으로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계시의 방편'이라는 의미는, 믿음이 긍정적인 심리상태를 만들어 영적 통찰력을 갖게 한다는, 말 그대로 종교심리학적인 믿음 개념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으면 하나님이 믿어지고 알아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흔한 왜곡으로, 통칭하여 "신앙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로 귀결됩니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이 하나님이 계시건 안계시건 상관없이 신앙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자신의 윤리 철학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반드시 계셔야 한다는 '당위적 하나님 존치(God Delusion, 만들어진 신)'와 궤를 같이 합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는 말씀 역시, 종교심리학적 신앙을 대변하기위해 즐겨 동원되는 구절로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라 믿으면,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진 것을 알게 된다"로 곡해됩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단지 이런 종교심리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자기 최면이나 아편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한 계시'로서의 믿음은, 정확하게 '구속 신앙(Faith in the redemption)'을 의미합니다. 앞서 예시로 든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았던 죄의 담이 철거되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된다 는 뜻입니다.

물론 이는 구속 신앙을 가지면 도통하듯(?) 모든 것이 저절로 통달된다는 뜻이 아니라, 구속 신앙을 가지면 성령의 조명으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영혼에 알려진다는 뜻입니다. 부연하면, 그리스도 구속 신앙으로 죄가 치워지면, 숨겨졌던 하나님이 알려지고 칭의·영생·양자·천국·지옥·창조·종말 같은 성경의 지식들이 확실히 믿어지고 깨달아진다는 뜻입니다.

구속 신앙(Faith in the redemption)으로 말미암은 이 성령의 지식은, 종교심리학적 믿음이 따라잡을 수 없는 독보적인 것입니다. 종교심리학적 믿음이 때론 신령스러움(?)과 비의함을 내비치지만, 사실은 고차원적인(?) 정신세계의 부산물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자들에겐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종교 천재들이 종교심리학적인 믿음으로 설교도 하고 영적인 행위들을 흉내내지만, 그것들은 모두 정신의 산물일 뿐,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종교적 영감만 있을 뿐 성령은 없습니다(유 1:19). 구약 율법에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할 때 수양의 피를 바르고 그 위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뿌림 위에 성령이 부어짐을 예표하는 것으로(레 14:25-29), 그리스도의 피에 성령이 임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의 서신서에서 '피'와 '성령'을 함께 존치시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히 10:29)."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만 분별한다(고전 2:13)'는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입지 못한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세계의 지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어서 올바른 예수 이해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 구속 신앙은 예수 이해와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일견 사람들의 예수 이해가 다 같아 보이나, 사실은 천차만별입니다. 율법주의자들처럼 예수를 율법 준수의 모범자로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계몽주의자들처럼 예수를 박애주의자나 인류의 훌륭한 스승으로 추앙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처럼 예수의 인간됨을 부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혹은 단일신론자들(Monarchianists)처럼, 예수가 화육(化肉)한 신(神)이기는 하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다신론(polytheism) 힌두교(Hinduism)처럼, 예수를 여러 신들 중의 하나가 화육(化肉)한 것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기 위해(마 20:28) 성육신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를 죄를 대속해 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격찬하신 것은, 그 고백의 완전함을 승인한 것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으로 표현한 것 역시,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죄값)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47-5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죄사함을 입어 숨겨졌던 하나님이 보이고 영적 세계가 열립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떼어 받았을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눅 24:30-31),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는 자는 (죽음을 받아들인 자는)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보게 된다는 상징입니다(I. H. Marshall). 예수님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고(마 5:8),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본다(요 3:3)고 하신 것도, 그의 구속을 입어 정결케 되면,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눈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올바른 예수 이해에 근거한 구속 신앙이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한 지식의 첩경이며,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느냐 못가르치느냐에 구원과 교회의 존폐가 달려 있습니다. 물론 교회들이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기독교의 핵심 가치라고 말합니다만, 대개 입교시에 마스터한 초보 교리쯤으로 간주할 뿐, 매 예배 때마다 성도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일용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 안에 다양한 커리큘럼들이 경쟁적으로 유치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감이 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은 초보 교리이고, 뭔가 고차원의 커리큘럼이 필요하다는 시각에서 연유합니다. 그러나 가장 고차원의 비의(秘意)는 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그것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진, 성령으로만 알려지는 비밀이고(골 1:26, 엡 3:5),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벧전 1:12).

신앙이 무르익은 만년의 바울 사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기독교 입문 시부터 그가 평생에 걸쳐 고백해 왔던, 소위 바로 그 초보(?) 교리였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구속의 도리는 영원히 고백되고 배워야 할 신비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아무리 화려한 커리큘럼과 메뉴들을 유치하여 사람들을 호객(呼客)해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주메뉴가 되지 못한다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속빈 강정이요, 물없는 구름, 열매 없는 가을 나무(유 1:12)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과 배부름을 주는 것은 오직 '구속 신앙'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