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51장 마나-인격의 해석기법(2)

우리의 삶에 크고 위대한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처럼 인간의 평범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대단히 위대하고 큰 인격을 분석심리학에서는 마나-인격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인간의 인격에서 비상하고도 큰 초월적인 것일 뿐 아니라,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런 대상의 체험을 우리는 신적 체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고 대단히 위대하고도 큰 것이기 때문이다. 평범한 인간에게 비범을 지향하려는 특성은 작용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큰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나-인격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분석해 나가는 이유이다.

1. 인격의 성장을 위한 마나-인격의 해소

마나-인격은 처음부터 고정된 것이 아니다. 마나-인격은 역사적으로는 영웅의 모습과 사제의 지상적 모습인 신인(神人)으로 발전되어 왔다. 분석가 또는 분석자 역시 얼마나 여전히 마나-인격의 상태인가에 대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자아가 외관상 아니마에 속한 힘을 스스로 끌어당기는 한에서는 자아는 직접적으로 마나-인격이 된다. 이러한 발전은 거의 규칙적인 현상이다. 융은 아직도 이런 종류의 마나-인격과의 동일시를 적지 않게 능가할 다소 진보된 발전과정을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1) 인위적인 마나-인격의 발생

마나-인격의 발생은 세상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이는 분석가 자신이 이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에 분석가는 적지 않게 놀라게 되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분석가나 분석자가 타인보다도 더 깊게 보았기 때문이며, 타인은 마나-인격에 대한 필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필요성은 그들이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쌍신전(雙神殿)을 건립하여 분향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영웅이나 탁월한 지혜자, 지도자와 아버지, 의심할 수 없는 권위가 발견되는 부분이다. 이는 판단 없는 맹종자의 가련한 우둔성만이 아니라 이전에 존재했고 다시 존재하게 되는 심리의 자연법칙이기도 하다. 이것은 의식이 원상(原象)의 순수한 구체화가 중단되지 않는 한에서이다.

물론 의식이 영원한 법칙을 변경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분석자는 다만 때때로 의식이 그것들을 변경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규칙은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적 필요성이기도 한다. 이와 동일한 것이 종종 옛 규칙을 한 번 더 참되도록 하기 위하여 방해하지 않고 스스로 아버지의 권좌에 앉는 것이다. 그것은 원상의 위력으로부터 탈출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원상의 위력에서 얼마나 탈출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중요하다. 물론 분석자는 이러한 위력에서 탈출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가능하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는 나이에 따라 자기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순수하게 원형에 떨어지며 그 인간성의 가치에 어떤 역할을 하도록 강요한 것을 막을 수 있다. 원형으로 인한 사로잡힘(Besessenheit)은 단순한 집단적 모습, 일종의 가면에 이르는 사람을 만든다.

그 가면이란 배후에서 인간적인 것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고 계속해서 위축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나-인격의 지배에 붕괴되는 위험을 의식적으로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위험은 스스로 아버지의 가면이 되는 것에 있는 것뿐 아니라 타인이 그 가면을 쓸 때는 그 가면에 붕괴되는 것에도 있다. 여기에 스승과 제자는 그 의미에서 동일한 것이다.    

2) 무의식에서 혼동의 해소

무의식의 혼동은 마나-인격에 사로잡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과정에서 아니마의 해소는 무의식으로 내몰고 있는 힘에서 통찰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위력 자체를 효력이 없게 만들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의식의 세력은 우리를 새로운 형태로 다시 공격할 수 있다. 또한 무의식의 세력은 의식 태도가 어떤 틈을 가질 때는 공격을 완벽하게 행하게 될 것이다. 이는 힘에 대한 힘의 문제이다.

만약 자아가 무의식에 대한 세력을 자신의 것으로 한다고 하자. 그러면 무의식은 미묘한 공격을 가하는, 즉 이런 경우 엄청난 마술이 자아를 구박하는 마나-인격의 지배와 더불어 반응한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는 무의식의 세력에 대하여 다만 고유한 유약성이라는 완벽한 독립성을 가지고 막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또한 무의식에 그 결과를 무의식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무력함에 직면해 있다.

무의식이란 융에 의하면 자연과정(Naturvorgaengen)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무의식이 개인적인 저편에 놓인 것으로서 의식만이 개인적인 것임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무의식이 유발되는 것에 대한 문제는 무의식이 어느 정도 불쾌감을 준다는, 그리고 마치 고대의 신들처럼- 질투나 복수 때문에 인간에게 모욕을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융은 소화의 균형에서 야기되는 정신적 식이요법을 비교한다. 무의식은 정신적 식이요법의 결여와 같은 그 이상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무의식은 신체적으로는 그 대가가 지불되는 위(胃, Magen)처럼 자동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무의식에 대한 위력을 개인의 것으로 한다면 이는 정신의 식이요법이 결여된 상태이며, 자기 후생의 관심 속에서 더 낫게 회피하는 불편한 태도가 된다. 물론 정확하지 못한 비교는 방해된 무의식이 계속해서 황폐하게 될 수도 있다. 융은 이런 시각에서 불쾌한 신들의 복수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다.  

3) 마나-인격과 자아의 구별을 통한 해소

무의식의 마나-인격으로부터의 자아 구별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구별을 통하여 아니마의 경우처럼 마나-인격에 특수하게 된 상태인 무의식 내용이 의식화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마나-인격은 언제나 비밀한 이름이나 특별한 지식 또는 '개인적 차별'이라는 단어를 가진 특수한 행동의 특권과 관련된다. 마나-인격의 원형을 구축하는 내용의 의식화는 개인성의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나-인격은 남성에게는 아버지로부터, 여성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로부터의 제2의 그리고 참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해방을 통하여 개인성의 일차적인 발견이 이루어진다. 융에 의하면 이 과정의 부분은 또다시 구체적인 원시인의 성인식에서 세례에 이르는, 즉 '육체적인'(또는 '동물적인') 부모와 중생(in novam infantiam)으로부터의 분리하는 의도에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그 중생이란 불멸성과 영적인 신생아의 상태, 이는 마치 기독교와 관련시키면 일종의 고대 신비종교로 형식화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가능성이 이제는 마나-인격과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히려 마나-인격은 대부분 마음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절대성(Absol- utheit)의 속성을 가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특이성으로서 구체화 된다. 이런 방식으로 이것이 신앙의 긴장에 도달될 때 무의식에는 모든 가치에 장애가 되는 동일한 절대적 초과중량이 상실될 것이다. 그에 따른 논리적 결과는 단순히 힘겨운, 열등적인, 무익한 채로 호흡하는 인간으로 후퇴된 상태이다.

융은 이러한 해결이 역사적 세계관이 되어버렸음을 지적한다. 여기에서 물론 융은 심리학적인 기반과 세계의 기반에다 항구적인 진리를 언급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는 이러한 해결에 하나의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모든 최상의 가치를 무의식 측면으로 돌리고 거기에서 최상의 가치(summun bonum)를 구성한다면, 불쾌한 정황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융은 심리학적인 기초에서는 마나-인격의 원형으로 어떤 신(神)을 구축하지 않는다. 그는 신을 구체화하지 않으려는 방식을 통하여 신과 악마 가운데 있는 가치와 무가치의 투사를 회피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회피를 통하여 인간적인 존엄, 무의식의 위력이라는 저항이 없는 놀이공이 되지 않기 위함이다. 이는 그대로 분석자가 대단히 필요로 하는 특수한 비중을 유지하는 방편이 된다.

인간이 가시적 세계와 교통한다고 하면 모든 탁월한 요소에 대립하거나 일종의 개인이라는 최고의 경계에 이르는 '무저항'의 원칙을 따르게 될지 모른다. 그 최고의 경계란 돌변하는 상황을 연출하는데, 이는 가장 침묵하는 시민이 피를 흘리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법과 국가에 대한 복종한다는 것은 집단 무의식에 대한 일반적 태도를 위해 권장할 만한 표본이다. 마치 성경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는 점에 한에서는 인간의 복종이 어렵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얼마든지 있는데, 세상에는 인간의 양심이 어찌할 수 없이 긍정하고 인간 스스로가 거기에 복종하는 요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반대하는 것보다도 더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이와 동일하게 명괘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의식 속에 요인이 있다. 융은 그것들을 성경에서 예를 든다. "악에게 지지 말라", "옳지 않은 재물로부터의 보호를 기뻐하라", "세상의 자녀들이 그들의 시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도 더 지혜로우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등이다.

2. 마나-인격과 개인성의 구별

마나-인격은 개인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마나-인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자신의 인격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단히 위대하고 큰 인격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거나 인식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팽창을 넘어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마나-인격의 구분이면서 동시에 중요한 치료의 과정이 되는 이유이다.

1) 마나-인격에서 개인성의 해소

마나-인격은 배움과 기대적인 것으로의 개인성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탁월한 지혜자요, 다른 한편으로는 탁월한 소원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성이 바탕에 놓인 내용의 의식화로 인해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타인보다도 더 배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보다도 더 원하고 있는 사실로 되돌아가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융은 역사적인 예를 들고 있다. 우선은 신들과의 불쾌한 인척관계는 가련한 안겔루스 질레지우스(Angelus Silesius)로 하여금 위골의 결과를 가져다 준 것이다. 질레지우스는 당황해서 불확실한 루터파의 중간자의 역할을 무시하고 자신의 초(超)개신교주의에서 스위스 어머니의 깊숙한 품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는 불행하게도 그의 시적인 소질과 신경쇠약적 건강에 매우 좋지 않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바울의 예이다. 융은 성경의 인물 중에는 바울의 심리와 행동에 유난히 주목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 뒤의 바울은 여러 흔적에서 여전히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던 문제와 더불어 씨름하였다는 것이다.

나아가 마이스터 엑카르트, 파우스트에서의 괴테, 자라투스트라에서의 니체 등도 어떤 것을 가져다준다고 한다. 괴테는 니체와 마찬가지로 그 문제를 지배적 사고를 가지고 해결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문제를 악마와 같이 행하는 마술사와 방약무인의 의지의 인간과 함께, 후자는 주인이 된 인간과 탁월한 지혜자와 함께 악마나 신이 없이 해결을 시도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 인간은 그 자신이 노이로제적이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처럼 신(神)과 세상이 없이 홀로 존재한다. 이는 가족이 있고 세금을 납부해야만 하는 현실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결코 이상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무의식을 위해서는"해야 할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것에 대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한 마나-인격의 해소

마나-인격의 해소는 무의식 내용의 의식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해소는 또한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서 우리 자신에게로 소급하게 된다. 그 어떤 것이란 다름 아닌 두 세계의 상 사이와 그 어두운 면만을 예감하지만, 매우 명쾌하게 지각되고 있는 힘들에 대해 긴장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어떤 것'(Etwas)은 낯설면서도 실로 매우 가깝고, 인간에게 인식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비밀스런 제도의 잠재적인 핵심, 동물과 여러 신들과 친척, 수정 및 별들과 인척관계이다.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인간 없이도 이동되며, 인간의 동의 없이도 자극되는 것이다. 이런 '어떤 것'은 모든 것을 요구하고 있고,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손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런 음성을 듣는 것이 치료에도 효력이 있기까지 하다.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감이 있는 신비스런 어떤 것을 경험하여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것들이다.

융은 이 핵심을 '자기'(das Selbst)로서 제시하였다. 지식인에게 있어서 '자기'는 하나의 심리학적인 개념이나 구조 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 심리적 구조란 인식이 불가능한 본질을 표현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심리적 구조란 이미 심리학 정의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해력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적 구조는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전체적인 심혼 생활의 시작은 모든 최상 및 최후의 목표가 그 점을 향해 달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설(Paradoxen)은 항상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는 어떤 것을 제시하고자 시도할 때마다 불가피한 것이다.

자기(das Selbst)는 융에 의하면 자아와 더욱 관련을 갖는다. 이는 관련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기도 하면서 이 둘은 혼동될 수 없는 것이다. 자기와 자아의 관계는 인간의 신격화나 신의 품위저하에 대한 문제는 아닌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해의 저편에 있는 것은 이에 대하여는 어차피 도달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신의 개념을 사용한다고 한다면 심리학적 사실을 공식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공식화는 인간의 의지를 관철하고, 의식을 사로잡으며 기분과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일종의 정신 내용에 관한 독립성과 초능력이다. 인간은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나 신경장애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부담이 일종의 신의 표명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분노한다.

그러나 만약 그런 고약한 것이 인위적으로 자율적 정신 내용의 수와 분리된다면 신의 표명이란 종교 체험에 있어서는 하나의 변상할 수 없는 손실일 것이다. 신의 표명이란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설명과 관련시킨다면 귀신을 쫓는 완곡어법이다. 그런 방법으로 정신 내용은 단순히 억압될 것이며, 또한 일반적으로는 단순히 그런 방법으로 외관상 장점 및 어떤 변화된 환상이 획득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인격은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빈곤해지며 황폐하게 된다.

오늘날 경험과 인식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또는 적어도 의미 없는 것과 가치 없는 것으로서 보이는 것은 최상의 원천보다는 더 높은 경험단계와 인식단계로 보일 수 있다. 그 최상의 원천이란 물론 일곱 귀신의 사용으로 만드는 것에 모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를 의미 없는 것으로 설명함은 그에 일치하는 그림자의 인격을 빼앗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그 형태를 상실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형태'는 조형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심오한 그림자를 필요로 한다. '살아 있는 형태'는 그림자 없이는 이차원적 환영(Trugbild)이나 다소 잘 교육받은 아이로 남는다.

이로써 융은 더 의미 있는 문제를 암시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가 그 근본에 있어서 심리학적으로는 여전히 유아상태에 있다는 비약될 수 없는 단계이다. 더 나아가 대다수는 권위, 지도(指導) 그리고 법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데, 율법에 대한 바울적인 극복은 다만 율법을 이해하고 양심대신에 심혼을 두는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는 점에서다. "많은 사람이 부름을 받았으나 선택된 자는 적으니라"는 소수를 지칭함에서도 그런 소수는 고통을 언급하지 않기 위하여 내적인 필요에서만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길은 칼의 날과 같이 좁기 때문이다.

여기에 융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자율적 정신 내용으로서의 신의 개념은 도덕 문제에 이르는 신을 만드는데, 이는 매우 불편하게 승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신(神) 역시 현실적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데, 신이 우리의 생활 어디에서도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융은 신(神)이란 역사적 개념의 바보이거나 철학의 감상적 기분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신적인 것과 떠나서 논하기 어려운 개념을 갖고 있다. '신적인 것'의 관념을 완전히 버리고 자율적 내용에 관해서만 논한다면 지적이고 경험적인 것에까지 잔존할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함으로써 심리학적으로 결여되어서는 안 될 곤경을 무마하는 것이 된다.

반면에 '신적인 것'의 관념을 사용한다면 자율적 내용의 작용을 경험하는 것처럼 특이한 방법을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디엔가 자신의 소원과 관념에 어김없이 동의하는 구체화된 신을 예비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고 한다면 융은 '악마적인 것'의 표현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3) 자기의 발견을 통한 초능력 환상의 해소

인간의 지적 마술은 때로 악마적인 초능력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의 지적 마술은 세상이 인간의 기대에 편하게 되는 것보다도 인간이 바라는 신의 실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율적 내용의 작용을 '신적인 것'의 속성과 함께 둔다면, 상대적인 초능력을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이러한 초능력은 매 시대마다 인간을 압박해 왔다. 그 초능력은 모든 작용이 올바로 되기 위해서 인간에게 가장 생각 없이 고안되어 대단히 과중한 짐까지 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굶주림과 죽음의 불안처럼 현실적인 것이다.

자기(自己, das Selbst)는 역할에서도 이해된다. 내부와 외부 사이의 갈등에 대해 일종의 보상으로서 특징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화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점차적으로만 증가되었고 많은 노력으로 경험되었던 결과와 도달된 목표라는 특징을 갖고 있을 때이다. 그러기에 자기 역시 삶의 목표인데, 자기가 개인을 지칭하고 있고 또한 자기는 개별적 인간만이 아니라 완벽한 상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전체 집단 운명의 연합이라는 완벽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자아의 관계, 개성화의 목표에 이르는 중요한 길이다. 개인은 개성화를 이룰 때 이미 자기에 도달된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 노력, 그 자기에 도달하는 결과는 결국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요, 그 자기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개성화의 관계에서 이해된다. 개성화는 자기에 도달될 때 이룩되며 개성화의 목표는 다음과 같을 때 도달된 것이다. 자기가 자아와 대립되거나 종속된 것이 아니라 속해 있고, 그리고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공전하는 비합리적인 어떤 것으로서 지각되고 정의될 수 없는 것으로서 존재할 때이다. 융은 자아와 자기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러한 관계에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란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자기의 내용에 관하여 아무것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자아는 우리가 아는 자기의 유일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개성화된 자아는 알지 못한 상위의 주체라는 대상으로서 지각된다. 우리의 심리학적 탐구가 여기에서 그 정점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 같다는 점에서다. 자기의 관념(Idee)이 심리학적으로 정당성이 인정되지만 학문적으로는 입증될 수 없는 초월적 요청(Postulat)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관념이 학문을 뛰어넘는 걸음은 여기에서 제시된 심리학적 발전이라는 필연적 요청이다. 이러한 요청이 없이는 경험적으로 일어난 심리학적 과정을 내가 충분하게 공식화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는 적어도 원자구조의 가설에 상응하는 가정의 가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어떤 상(像)에 연계된 상태이어야 한다면, 이는 그 해석이 언제나 가능성에 이르지 못한 초능력적으로 생동하는 어떤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상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담고 있는 하나의 상이라는 것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앞 장에 이어서 마나-인격의 해석기법에 대하여 기술했다. 인간은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데, 자신이 타인보다도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여 발휘하고자 하고, 또 그런 능력의 존재임을 보이고자 한다는 점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마나-인격의 개입을 수용하게 되는데,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한에서는 언제나 마나-인격이 개입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마나-인격의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안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분석에서 마나-인격을 해석하여 치료해 나가는 과정이 가장 어려운 이유였다. 이런 점에서 마나-인격의 해석기법은 자아와 자기, 그리고 의식과 무의식, 더 나아가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아우르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