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49장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3)

정신에서 환상은 의식에 해당되어 상당한 역할을 한다. 이런 현상은 정신에서 환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식의 세계를 자극하는 일, 넓혀주는 일, 그리고 에너지를 주는 일이다. 다만 환상이 지나치게 그 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의식과 상관없이 무의식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병리학적인 차원으로 간주한다. 이런 시각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이 중요해진다.

1. 무의식에서 환상의 변화

무의식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무의식이 정신에서 하나의 존재로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점, 무의식의 역할에 따라 의식의 상태가 달라진다는 점, 그리고 무의식의 상태는 지나치면 정도에 이르면 정신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정신의 문제가 진정으로 치료되는 상태로까지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치료를 우리는 가볍게 인격의 변화로 지칭하기로 한다.

1) 인격의 본질적인 변화

정신치료는 그 성격상 본질적인 변화로서 진정한 인격의 변화이다. 무의식과의 대결로 목표가 되는 이 변화를 융은 정신에서 초월기능(trans- zendente Funktion)으로서 제시하였다. 인간 심혼에 대한 특이한 변화력이 초월적 기능으로 명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력은 유명한 연금술 상징을 통하여 명시된 중세 후기의 연금술 철학에서는 최대의 연구대상이었다.

질베러(Herbert Silberer)는 심혈을 기울인 저서에서 이미 연금술의 심리 내용에 대하여 상세히 제시하였다. 물론 우리가 항간의 견해에 따라 '연금술'의 정신흐름을 증류기와 용광로로 축소하고자 할 때는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오류일 것이다. 분명히 연금술의 정신흐름 역시 이러한 측면, 즉 정밀 화학에 대한 어설픈 초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흐름은 또한 과소평가될 수 없는 측면, 아직도 심리적으로는 완전히 충분하게 평가되지 못한 정신적 측면을 갖고 있다. 이는 바로 현대의 심리학이 주저하는 '연금술 철학'이 존재해 온 것을 의미한다. 연금술 철학의 비밀은 초월된 기능의 사실, 귀인과 비(非)귀인의 구성부분의 혼합과 연합을 통한 인격변화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연금술 철학의 비밀은 구분되어진 열등적인 기능의 사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실이다.

연금술은 화학적 성질과 연관된다. 연금술의 화학적 성질이 심리학과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과학적으로 화학의 초기는 환상의 생각과 자의성으로 인해 왜곡되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연금술 철학 역시 여전히 조야하고 발전되지 못한 정신이라는 불가피한 구체화로 인해 심리학의 공식화에는 형통하지 못한 상태였다.

활발한 예감이 중세기 사상가의 정열을 연금술 문제로 사로잡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무의식의 동화에 대한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연금술 과정을 통하여 가장 심오하게 이해되고 변화된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신에서 단순한 환상은 단순히 환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측면의 환타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환상의 작용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경우에는 환타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게 된다. 초월기능과 현저한 작용이라는 문제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다.

반면 환상에 대한 사례의 인용도 때로는 전문가의 호의적인 이해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사례는 사실상 개인적이며 또한 주관적으로는 인상이 깊고 의미를 가진 인정해야만 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에 주관성과 객관성은 거의 일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 반드시 객관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고려하면 개인의 고유한 심리적 특성이 타인의 심혼으로의 이동은 완전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작용은 실로 드문 예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최상으로 안다고 억측하는 사람, 그리고 그를 남김없이 이해한다고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는 전혀 다른 우리에게는 본질적으로 낯선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최고와 최상의 것이란 적어도 이런 색다른 것에 대한 앎을 존중할 수 있으며, 이를 행하고자 하는 압도적 편협성에 대한 방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분석자는 확신하는 것, 즉 가장 고유한 체험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확신시키는 그 어느 것도 산출할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일단 우리 스스로 경험한 것을 가지고 그 유추를 믿어야만 한다.     

2) 정신자원의 한계로서 인격의 변화

인격의 변화는 정신에서 자원의 고갈과 관계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원이 한계점에 이르게 될 때 정신에서 변화가 가능해진다는 점에서다. 환자에게 모든 것이 결여될 때 최후의 결과, 즉 인격의 변화가 의심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예외 조건하에서 융은 한 여성으로부터 다른 환상부분을 제시한다. 이 사례는 앞에서의 사례와 비교하여 특이하게 다른 점은 경험의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관찰자는 인격변화의 과정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통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 사례는 대체로 인격의 엄격한 변화에서 최고점에 도달된 자료를 갖게 만든다. 그 부분은 융의 연구에서 인격발전의 후기 과정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는 또한 인격의 중점에 도달하는 목표를 갖는 일련의 변화에 대한 옛 관련물이라는 유기적인 부분이다. 이는 인격의 중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물론 '인격의 중점'이라는 개념 아래 생각돼야 할 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에 관해서는 최소한의 단어로 윤곽잡기를 모색하여야 한다. 의식이 자아와 더불어 무의식의 중심에 위치한 것으로서 생각하고 무의식의 동화라는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대한 일종의 접근이 가능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전체 인격의 중심이 더 이상 자아와 더불어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간에 어떤 점이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것은 새로운 균형의 점이며, 전체 인격의 새로운 중심점을 이루는 것이며, 아마도 어떤 잠재적인 중심일 것이다.

그 잠재적 중심이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중심적 위치 때문에 인격에 새롭고도 더욱 확고한 기반이 인정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가시화는 꾸밈없는 정신의 무모한 시도 그 이상의 것이 아니며, 거의 묘사하기 어려운 심리적 사실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다.

이와 동일한 것이 융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고 있다"는 바울의 말을 대신하여 인용한다. 그 뿐 아니라 융은 공자의 도(道, Tao)를 차용하기도 한다. 공자의 중심의 길과 모든 창조적 중심의 길이라는 도(道, Tao)개념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융의 이런 관점이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학문적 양심을 가진 심리학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정신적 특성은 정신작용에서 나온 심리적 요소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정한 법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 법칙에 따른 원인과 작용을 갖고 있는 특정한 심리적 결과인 것이다. 이는 수천 년 전부터 오늘까지 다양한 민족과 종족에서 그 심리적 요소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 정신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 아는 일은 실로 중요하다. 그것은 일단 정신이라는 실체의 확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무의식에서 환상의 중단과 정신치료

정신에서 환상은 의식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정도에 이르면 환타지로 인정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병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친 환상의 정도가 중단되는 것이 치료에 해당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시각에서 우리는 환상의 지나친 정도를 중단하는 작업이 치료에 해당되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1) 환상의 중단과 인격의 변화

인격의 변화, 즉 정신치료는 환자에게서 환상이 중단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술했다. 앞의 한 여성의 사례는 강렬한 가시적인 특징의 환상과 관계되는 것이다. 그 환상은 '꿈의 상'이 결코 아니며 하나의 환타지이기 때문이다. 그 환상이란 단순히 강력한 집중으로 인해 의식의 배후에서 장기간 연습이 선행되어 왔다면 발생이 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그 여성 환자는 그녀의 환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산에 올라가 어떤 장소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앞에 7개의 붉은 돌, 양편에 7개의 돌과 뒤편에 7개의 돌을 보았다. 나는 그 사방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돌들은 계단처럼 판판했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돌을 들어 올리고자 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 돌들의 축받이는 거꾸로 땅속에 묻혀진 4개의 신상(神像)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신상을 파내어 나를 둘러 똑바로 세웠다. 그래서 내가 그 중앙에 선 것이다. 그 신상들이 갑자기 서로 내려앉기 시작하더니 머리끼리 접촉하였다. 이제 그 신상들은 내 위에 어떤 텐트처럼 형태를 이루었다. 나는 땅에 쓰러져 '너희가 그렇게 해야 된다면 나에게 쓰러져라. 나는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저편 네 신들 주변에 불타는 원형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나는 다시 땅에서 일어 났고 그 신상들에 던져졌다. 이윽고 그 신상이 쓰러진 곳에서 네 그루의 나무가 자라났다. 불꽃의 원형에서는 나무의 잎이 불사르기 시작하는 푸른 불꽃이 솟아 나왔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불은 멈추어야만 된다. 나는 나무 잎이 타지 않게 되도록 불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한다.' 그때에 나는 불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무들은 사라져 버렸고 그 불의 원형은 땅에서 나를 들어 올렸던 하나 밖에 없는 큰 푸른 불로 수그러들었다."

여기서 그녀의 환상은 끝났다. 그녀의 환상의 중단은 애석하게도 대단히 흥미로운 의미를 명쾌하게 입증하는 방법과 수단이 없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다. 그 부분은 어떤 커다란 관련성에서부터 갈려져 나온 것이며, 또한 그 상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전과 이후에 일어난 모든 것이 설명되어야만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면 곧바로 일종의 상승(등산=긴장, 노력)을 통하여 도달하게 되는 핵심(Mittelpunkt)을 인식하게 된다.

이로써 우리는 또한 어려움이 없이 연금술 분야에 해당하는 원의 구적법(Quadrat des Zirkels)이라는 유명한 중세기의 어려운 문제를 재인식하게 된다. 여기에 개성화의 상징표현으로서 적절한 위치도 생각할 수 있다. 전체인격은 지평의 4개의 주요점들, 즉 4기능을 통하여 제시되었다.

그 4기능이란 정신 공간에서 방향을 제시하고 원(圓)을 통해서는 전체를 연결한다. 개인을 압도하여 위협하는 4개 주요점들을 극복하는 것은 4기능, 즉 4중의 대극의 자유(nirvanda)와의 동일시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런 해방을 통하여 원(圓), 즉 분리되지 않은 전체성에 접근된다. 거기에서는 다시 계속적 향상이 일어난다.

여성 환자의 문제는 의식과정의 혼동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능동적 참여로 의식과정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의식과정에 대한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의식과정에 대한 소유를 이해한 것이다. 그녀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의식과 무의식을 결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불에서는 상승이요, 연금술의 가열에서는 변화이며, 세련된 정신의 발생이다. 이것은 대극의 통일로부터 발생되는 초월적 기능이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분석자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어떤 본질적인 오해를 상기할 수 있다. 그 이상한 환상은 그녀로 하여금 그녀 인격이 변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환상은 단순히 동일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격의 발전을 유발하는 어떤 경우들이다. 이는 모두에게 그런 발전에 대해 강요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격이라는 내적 필연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융에 의하면 환자들에게도 적지 않게 있으며 뵈메의 마을에도 잔존해 있다. 만약 그녀의 인격이 그 길을 밟는 가능성을 일반적으로 갖는다고 하면 그 길은 그녀에게 있어서는 애석하게도 잘못된 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분석자는 그녀의 인격을 저지하는 제 일인자일 것이다.

정신에서 초월적 기능의 길이란 하나의 개인적 운명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개인이 원하는 대로 작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다. 그런 경우에 초월기능의 길은 심리적 시대착오주의, 즉 생활과 세상의 괴리와 동일시적이라는 것을 수용해서도 안 된다.

그 길은 대개 그런 개인이 위치하는 특이한 세상적인 과제와 현실적으로 접촉되어질 때에만 가능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환상이란 생물체를 위한 보충이 아니라, 삶에 대해 그 기여도를 계산하는 데에 주어지는 정신의 열매인 것이다.

그러나 위험을 회피하는 비겁자는 자기의 병적인 불안 그 이상을 체험하지 못하며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잉태되지 않는다. 또한 어머니의 교회로 후퇴하는 길을 발견한 모든 사람은 이러한 길에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신비(mysterium magnum)란 그 형태에서는 폐쇄되어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비겁자는 그 가운데서 의미 있게 살 가능성이 있다. 결국 평범한 사람도 그런 학문에 의해 억압받지 않게 된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란 끊임없이 자기의 풍부한 상태에 있는 사소한 것과 만나기 때문이다.

환상과 관련되는 두 사례는 원형적인 것에서 이해된다. 원형적이란 융의 긍정적인 아니마활동과 아니무스활동에 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아니무스 또는 아니마의 인격화된 모습은 환자가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정도에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은 의식과 무의식 관계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일한 환상, 즉 무의식의 내용이 현실화되지 않을 때는 그로부터 어떤 부정적인 활동과 인격화, 즉 아니무스와 아니마의 자율성이 발생된다. 그것은 정신이상, 즉 일상의 기분과 관념에서 정신병에 이르는 정도로 사로잡힌 상태가 발생한다. 이런 모든 상태는 하나 또는 동일한 사실, 즉 미지의 어떤 것이 정신을 소유하는 작거나 큰 부분을 붙들어 왔던 것을 통하여 특징화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는 모든 통찰에 대하여 증오스럽고 방해적인 존재, 즉 모든 이성과 에너지가 방해적이지 않다는 것이 주장된다. 그런 방법으로 무의식의 힘은 의식에 대항하는 것으로, 즉 사로잡는 절대적 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사례에서 사로잡힌 심혼의 부분은 아니무스의 심리 또는 아니마의 심리이다.

여성의 악몽은 여러 남성의 심술궂음으로 이루어지며, 남성의 악령은 곧 여성이다. 심혼(Seele)이라는 특이한 개념은 단순히 정신이나 혼이 아니라 개인의 생명체와 관련된다. 이것은 한 생명체가 갖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것은 의식의 태도에 따라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어떤 기능에서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모든 사람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영혼개념과도 그리 멀지 않은 관련을 갖고 있다.

2) 집단무의식과 관련되는 환상

환자의 환상은 집단 무의식(kollektives Unbewussten)과도 관련된다. 그녀의 환성은 집단무의식에 의해 산출되는 일종의 내용에 관한 전형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 양상이 철저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라고 해도 그 내용이 집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많은 남성에게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상과 관념이며, 개인성이 다른 사람에게 동화되는 부분이다. 만약 그 내용이 무의식적으로 잔존한다면 개인성이란 그 내용으로 인해 다른 개인성과 함께 무의식으로 사라지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개인성은 구분이 없으며, 개인적이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사람이 개인적인 것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란 바라는 것일 뿐 아니라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그 이유는 개인성이 혼란으로 인한 상태에 빠졌고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하게 만드는 행위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무의식적 혼합과 불가분리성으로부터 자신과는 별개인 것처럼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이 강요되어 온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 강요에 동의할 수도 없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질 수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 강요에 관해서는 일종의 품위가 없는, 부자유스러운 그리고 비윤리적인 상태를 느끼게 되지만, 자기 자신과 불일치의 상태는 해소되기를 바라는 신경증적이면서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이런 상태를 해소하는 방법은 마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그렇게 존재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해진다. 인간은 이러한 무의식 상태에 관하여 우선은 몽롱하고도 불확실하지만, 진보적 발전과 더불어 항상 더 강하며 명쾌하게 되는 어떤 느낌을 갖는다. 만약 우리가 자기 존재의 상태와 행위에 대하여 "그것이 바로 나이기에 그렇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방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어려운 경우에 봉착하여 이를 거역한다고 해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것도 자기 자신보다도 더 어렵게 부담을 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인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을 찾았기 때문에 가장 무거운 짐을 찾으라!"고 니체는 말한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이런 최고의 힘든 짐이란 무의식 내용과 구분할 수 없을 때에 가능하게 된다. 대개 내향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무의식 내용을 발견하고, 외향적인 사람은 인간 대상 안에 있는 투사로서 발견한다. 이 두 경우에서 무의식 내용은 기만하는 환상을 일으킨다. 그 기만하는 환상이란 우리 스스로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변조시키며 비현실적이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개성화는 어떤 사람에게는 치유의 필요성으로서 뿐 아니라 높은 이상, 즉 행할 수 있는 최상의 관념으로서도 불가피한 것이다.

동시에 분석자는 비기독교 관념이 "너희 안에 있다"는 천국에 대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을 중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 관념의 근본은 올바른 행동이란 올바른 생각으로부터 나오며, 개인성 자체에서 시작하지 않은 치유와 세계의 향상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허름한 집이나 세든 곳에서 사는 사람은 그것을 절박한 것으로 말하기 위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융의 치료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이 치료의 근본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인정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엿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세 장에서 걸쳐서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에 대하여 기술했다. 인간의 정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했다.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은 현실세계이면서 논리의 세계요, 무의식은 이상이나 환상의 세계이면서 비논리의 세계라는 점에서였다.

이처럼 인간은 삶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야 하지만, 정신에서는 의식되는 세계와 잘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살아가야만 한다. 이런 것에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건강한 정신이라면, 그 반대로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병리적인 상태가 된다는 점에서였다.

특히 정신에서 환상은 의식에 해당되어 상당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중요해졌다. 이런 현상은 정신에서 환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였다. 그것은 의식의 세계를 자극하는 일, 넓혀주는 일, 그리고 에너지를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환상이 지나치게 그 수준이 높은 경우에는 의식과 상관없이 무의식에 해당되는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고 했다. 이런 현상은 병리학적인 차원으로 간주한다는 시각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이 중요해진다고 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기법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