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치 있고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의 죽음을 나를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죽음이 목적을 달성하고,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사 53:5)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의 죽음이 죄인의 죽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자기 죄 때문에 받은 징벌이 되고(사 53:4), 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피로 만들고, 그 피를 증거하는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만듭니다(히 10:29).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받아들여, '주님의 죽음은 내 죄 값입니다'라고 고백하며 그의 죽음을 영예롭게 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상관없는 보통 사람 곧 죄인의 죽음으로 만들어 그의 죽음을 욕되게 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자기의 전 재산 3백 데나리온 상당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고 그의 장사(葬事)를 준비한 것은(마 26:12),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죄 값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신앙고백적 행위였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의 장사(葬事)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어도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와 상관없었다면 그의 장사(葬事)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부을 이유가 없었고,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무의미한 소모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그녀의 환대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영화롭게 한 그녀의 행한 일을,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함께 전파되도록 하셨습니다(마 26:13).

이는 그리스도의 장사를 예비한 그녀의 행한 일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말하는 복음이 잘 매치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돋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하나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로운 일을 구제나 봉사가 아닌 복음 전파에 두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과 무관했던 가룟 유다(Judas Iscariot)는 당연히 그리스도의 장사를 위해 옥합을 깨뜨린 그녀의 행위가 못마땅했고, 그는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구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그녀를 타박했습니다(마 26:9).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했던 그에게는 이런 태도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얼마 후 그는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아니 배반하고 떠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무관했던 그는 아예 처음부터 그리스도와 상관없었기에, 배반하고 떠나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중생(벧전 1:3)의 경험이 없는 이들이, 한때 교회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은 구원받았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미중생한 가라지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가인(Cain)이 양(洋)으로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Abel)과 달리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드리고 동생을 살인한 것도(창 4:3-8), 믿다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상관없던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일견 가인의 제사가 믿음의 행위인 듯 보이나, 그의 제사는 오늘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종교 행위와 흡사합니다.

예수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은 오직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자 하고만 관계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 신앙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사안이고, 그것에 의해 우리의 운명도 갈립니다(요 6:53-54).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가 지옥 갈 악한 죄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죄 값으로 취하지 않아 그의 죽음을 악인의 죽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죄값을 대신한 죽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의 죽음이 무흠하신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인정되는 것이므로,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영예롭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신앙의 향방, 구원과 멸망을 가르는 분깃점이 되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죽음에 대한 양단간(兩端間)의 선택을 요구합니다.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인의 죽음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십자가의 강도처럼 의인의 죽음이 되게 하든지(눅 23:41) 할 뿐이며, 제3의 선택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입에 '하나님 영광'을 달고 살았고, 바리새파(Pharisees) 유대인들의 율법적 의는 흠결이 없을 만큼 완전하여(빌 3:6) 하나님 영광에 도달했지만,-그들의 주장대로라면-예수님으로부터는 오히려 마귀의 자식으로 정죄받았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숨겨진 무슨 도덕적인 죄가 발견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인의 죽음으로 만든 때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사랑하는 수제자 베드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스승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류했을 때, 그는 그 순간 마귀였습니다(마 16:23).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부정과 왜곡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귀적이라는 뜻입니다.

지옥 판결을 받을 죄 역시 무슨 흉악한 도덕적 불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죄인의 죽음으로 만드는 죄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을 악인의 죽음으로 만드는 불신만큼 악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불신을 악심(an evil heart of unbelief, 히 3:12)이라 한 것도 같은 연유에서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믿음만큼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어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하는 것도(롬 3:25), 죄인이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도(요 6:4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롬 4:20)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요 11:4, 롬 5:2).

우리 믿음의 관건도, 우리 믿음의 가치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지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죽음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품고 하나님을 신앙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성경은 예수로 말미암안 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행 3:16). 믿음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빠져 있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고난주간에나 슬쩍 한 번 기념하고 지나갈 주제가 아니라, 매일의 신앙 주제이고 고백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의 죽음은 매일 먹고 마셔야 할, 일용할 양식이요 음료입니다(요 6:55). 바울이 그의 만년에 여생의 존재 이유를 '나를 사랑하사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빌 2:20)'이라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닙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