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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많은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연령이나 신분에 따라 전형적인 스타일로 이해하는 일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굳어진 생각들이 연애나 결혼생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 고정관념이 빗나가는 일도 많다. 여자는 남자보다 깔끔할 거라는 생각, 남자는 여자보다 강해서 덜 울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다시금 생각은 활시위처럼 고정관념으로 되돌아오곤 한다.

남자는 폭탄 맞은 여성의 자취방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오늘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한다. 공포영화는 질색인 남자를 억지로 영화관에 데려가 놓고도 무서운 장면이 나오면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그래도 남자니까' 한다.

늘 실패하곤 하지만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다름을 잘 알고 있고, 그 다름에 잘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많은 연애서적과 심리분석서에서도 수없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이렇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필자도 그런 글을 많이 썼듯이 그것은 물론 대단히 중요한 사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 가지 돌아볼 것은 있다. 그런 많은 분석에 따른 경고 때문에, 우리는 그 특성을 너무 전형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틀에 넣고 재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물론 아무리 거친 여자도 결국 여자이고, 아무리 가냘픈 감성의 소심남도 결국은 남자다. 다만 아주 가끔은 예외도 있다. 남녀 각각의 특성이 뒤죽박죽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남자는 단순해서 말에 다른 의미를 담지 않고, 여자는 그냥 하는 말에도 뼈가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늘 그렇지는 않다. 10년 전 스치듯 했던 말도 기억하고 있으면서 엄청나게 속이 배배 꼬인 남자도 있고, 내숭을 거의 죄악시하는 여자..., 여느 남자보다 더 선이 굵은 여장부도 꽤 있다.

남녀의 감성이 뒤집힌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복잡미묘한 여인천하에서 더 편하게 잘 지내는 섬세한 남자 직원도 있고, 남자들 사이의 홍일점으로 지내면서도 동성처럼 잘 섞이는 여성도 있다. 연애 감성이 풍부한 남자도 있는 반면에, 연애편지 한 장을 못 채우는 여자도 있다. 자녀들에게 아내보다 훨씬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남편도 있고, 가정이 어려운 시기에 더 큰 책임을 지는 여자도 무척 많다.

말하자면 남자나 여자라서 그런 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지닌 다양한 특징이 모두에게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많은 경우 '남자는 이래야 한다'든지, '여자니까 분명 그럴 거다' 하는 고정관념들이 고착화되어 우리의 판단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남자는 이래야만 하고 여자는 저래야만 하는데, 이 사람은 왜 그런가' 하는 폭력적 사고방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연애는 다큐다 김재욱
▲영화 <이퀄스> 중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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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잊지 못하고, 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이것은 남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일 텐데, 정말 그럴까? 진짜 모두가 그럴까?

일단 기본적 생각의 구조 자체는 다 그런 것 같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완전히 정리가 되어야만 다른 사랑을 하는 것, 굳이 그렇게 명확한 선을 그어야만 하는 감정구조를 정확히 공감하기 어렵다. 어떻게 기억이 남아있는데, 감정이 사라질 수 있는지 말이다.

<이퀄스(equals)>라는 SF 영화가 있다. 인류의 멸망 후 재건된 미래에 고도로 발달했지만 감정이 통제된 채 획일적으로 사는 문명국과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반도국이라는 양극단의 두 나라만이 있는데, 문명국 사람들은 모두 약물로 감정을 억제하고, 이것이 잘 통하지 않으면 병자로 분류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사랑은 불법이며 아기도 계획적으로 착상해 인구를 늘린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한 청년 사일러스는 회사 동료 중 니아라는 여자도 감정 비정상임을 알게 된다. 둘은 점점 서로를 알아보고 금지된 사랑을 하는 사이가 되는데, 발각돼 강제로 치료를 받더라도 사랑을 잊지 말자고 다짐한다.

남자는 감정 비정상임이 드러나 치료를 받고, 니아는 불법인 자연 임신을 한다. 그 사이 획기적인 치료제가 개발돼 영구적 감정 치료가 가능해진다. 두 사람은 억제제를 투입받지 않으려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개한 영역으로의 탈출을 결심한다.

탈출 직전 니아는 임신 사실이 드러나 수용되는데,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수용소 내 자살자와 바꿔치기돼 수용소를 빠져나온다. 니아는 사일러스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사일러스는 수용소를 찾아가 니아라는 여자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방황한다.

다음날 집에 와 보니 니아가 와 있었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니아의 죽음에 너무나 실망한 사일러스는 사랑의 감정을 잊으려고 영구 감정 억제제를 투여받고 온 길이었다. 니아는 사일러스에게 매달리며 우리 사랑의 느낌을 잊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그는 이제 무표정이다. 그는 '기억은 다 하는데 느낄 수가 없는' 상태였다. 물론 함께 탈출하기로 한 것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 그게 우리 계획이었지...."

약속을 기억하는 사일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절망에 빠진 니아와 열차를 타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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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아는 사일러스가 어떤 약도 소용없는 예외적 돌연변이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기억은 하는데 아무 느낌 없는 것.... 영구 감정 억제제를 맞은 사일러스의 마음이 여자들이 새로운 사랑을 만난 뒤에 이전 남자를 바라보는 마음이 아닐까..., 예외인 여성도 있을까?

아마 없지는 않을 것 같다. 기본적 기질 때문이 아닌 다른 변수들, 충격적 경험이나 부모를 통한 기존 관념에 대한 반감, 특별한 사연, 연애 대상의 차이 등으로 인한 감정적 예외가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결혼해서 잘 살지만 옛 연인을 모임 같은 데서 만나면 애틋하고 아련하고 흐뭇하다는 여성도 본 적이 있다. 그게 예전과 같은 종류의 감정은 아니라도.

사람의 마음은 불변의 물리학 법칙과는 달라서, 첫사랑을 깨끗이 잊은 남자도 얼마든지 있고, 지금 연인과 잘 지내도 과거의 강렬했던 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도 있을 것이다.

남녀 작가가 차례로 연재한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여성 부분을 쓴 에쿠니 가오리가 묘사한 여자 주인공은,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훌륭하고 좋은 사람으로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지만, 예전 그 남자는 별도의 존재로 더 깊은 곳에 남겨 두었다. 한 마디로 그녀에게는 대체불가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지금의 남자를 떠나 옛사랑을 찾아 나선다. 소설이지만 여성이 이런 감정을 묘사한다는 자체가 스스로도 느끼고 독자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뜻이 아닐까....

남자는 정리가 다 안 돼도 다른 상대를 받아들이고, 여자는 지난 관계를 깨끗이 잊어야만 사랑의 새 페이지를 연다는 특성은 분명히 두드러지는 남녀의 차이가 맞다. 하지만 그 반대로 행동하는 사람도 가끔 발견하게 된다. 한 사람밖에 모르는 순정파 남성도 있고, 이 사람 저 사람 사이에서 방황하는 여자도 있다.

우리는 복잡한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너무 단순화시켜서 판단할 때가 많은 것 같다. 남녀의 특징을 잘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은 간단한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거다. 남자 혹은 여자라는 틀을 넘어, 돌연변이라서 더 괴로운 예외적 성품을 지닌 사람들도 고려해야 한다.

사랑은 섬세함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는 상대방의 아픔과 특이함을 알아주는 것이 배려이고 세심함이다. 그것을 알려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긍휼이 필수다.

'예외의 법칙'은 겸손한 자에게 위안을 주고, 교만한 자를 걸려 넘어지게 한다.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람들이 완전하기만 했다면 우리 모두는 절망뿐이겠지만, 그 훌륭한 의인들의 삶에도 오점과 옥에 티가 있어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를 준다. 지능은 개나 돼지보다 떨어지면서도 예외적으로 사람과 흡사한 생김새를 지닌 침팬지 같은 유인원은, 교만한 자들을 '진화'라는 어리석은 함정으로 이끌어 스스로 무너지게 한다.

고정관념으로만 섣불리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입체적 사고로 예외의 법칙을 고려하면, 사랑하는 연인과 배우자에게 위안이 되는 참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획일적인 방식으로만 판단하고 연약한 예외적 부분을 묵살하셨다면, 우리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짜 사랑은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볼 수 있는 속 깊은 시선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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