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인간의 선행이 칭의에 기여하느냐 못하느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쟁거리이며, 그 논쟁의 중심에 다음의 야고보서 말씀이 자리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1, 24)."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에서, 행함(doing)을 칭의의 '원인적 증거(causative evidence)'로 보느냐, '결과적 증거(resultant evidence)'로 보느냐에 따라 견해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원인적 증거(causative evidence)로서의 행함'이란, 칭의를 받는데 행함이 원인(조건)이 된다는 엄격주의를 표방하고, '결과적 증거(resultant evidence)로서의 행함'이란, 행함을 통해 칭의를 유추한다는 너그러운 추정주의를 표방합니다.

야고보서의 행함을 칭의의 '원인적 증거'로 본 루터(Martin Luther)는 행함을 엄격하게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이신칭의와 배치되는 것으로 보아, 지푸라기 서신으로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칼빈(John Calvin)을 위시한 개혁주의자들은 행함을 '결과적 증거(resultant evidence, 결과지상주의와는 다름)'로 받아들이므로 루터가 버린 야고보서를 살려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이 칭의 받은 것은 그의 행함이 칭의의 조건을 충족시킨(원인) 때문이 아니고, 그의 칭의를 추정하게 할 만한 행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개혁주의자들이 결과론(the resultive)을 지지하는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만약 행함이 결과가 아닌 원인적인 것이 되면, 행함(doing)을 열매로 규정하는 성경의 원리와 정면으로 부딪히고 수많은 성경 내용들을 왜곡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22)"는 말씀도, 행함이 천국 입성의 원인(조건)이 되고, 뿌리에서 열매가 맺히는 형국이 되어 자연법(natural law)에 저촉됩니다.

성경은 엄연히 행함(doing)을 뿌리에서 연원한 열매로 규정합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렘 12:2)",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사 37:31)". 만약 행함(doing)이 칭의의 원인(뿌리)이 되면, 열매에서 뿌리가 나는 기괴한 꼴이 되어 자연법을 거스립니다.

행함(doing)을 원인적인 것으로 파악하면, 다음의 하나님 자녀론도 왜곡됩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 5:9, 39-45)".

풀이하자면, '화평케 하는 선행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요 1:12)',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는 성경이 부정돼야 합니다.

반면 행함(doing)을 결과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면, "화평케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고 ... 오른편 뺨을 칠 때 왼편을 돌려대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보니 천국입성자로 보인다"로 해석됩니다. 행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됨이 유추된다는 뜻입니다. 비판자들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다(결과론)'와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원인론)'가 뭣이 다른가? 애써 둘을 구분 지으려고 하는 것은, 칭의에서 행위를 배제시키려는 논리 놀음(logic playing)"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논리학에서 원인론은 결과론보다 적용에서 엄격하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원인론은 결과를 불문하고 당위성만을 말합니다. 어떤 결과를 염두에 두거나 추정하지 않습니다. 일률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의 부응만을 요구하며, 변수나 예외는 아예 상정되지 않습니다. 적용 분야를 보면, 변수나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는 원인론(the causative)이 중용(重用) 되고, 변수나 돌연변이의 도출이 가능한 생물학, 화학, 경제학 같은 데서는 결과론(the resultive)이 중용(重用)됩니다.

칭의와 행함의 관계는 '엄격한 원인론'을 채택하는 자연과학 쪽보다는, 생명과 삶을 다루는 '너그러운 결과론'을 채택하는 생물학, 경제학 쪽에 가깝습니다. 당위성에 초점을 맞춘 원인론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들이 아니고 행함이 없는 자는 천국에 못들어간다'로 못박아버립니다. 여기에는 일절 변수나 예외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추정(assumption)을 특성으로 하는 결과론은 열매를 보고 미루어 뿌리를 추정하는 것이기에, 원인론에 비해 덜 엄격합니다. 평가받는 자가가 처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으며, 예외와 변수가 끼어들 여지도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는 말씀도 했지만, "극상품 포도나무에서 들포도를 땄다(사 5:2)"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는 좋은 나무라고 반드시 좋은 열매만을 맺는 것이 아니니, 열매만을 보고 함부로 이 나무 저 나무로 단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을 두고 한 말씀이었으며, 고린도교회에도 해당됩니다(이들에게만 해당되겠습니까?) 고린도교회 교인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범하지 않은 말도 안 되는 죄들이 있었음에도, 구원받은 자로 인정됐습니다(고전 5:1- 5).

그들은 좋은 나무였음에도 들포도를 맺은 것이며, 이는 엄격한 원인론이 아닌, 변수와 예외가 인정되는 결과론을 적용할 때만 인정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 것이 상례이지만 때론 전혀 닮지 않은 돌연변이도 나올 수 있고, 지표상으로는 10을 투자하면 12가 나오도록 돼 있는데 실제로는 10도 안 나오는 경제적 변수가 돌출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원인론을 채택하는 수학과 물리학처럼 행위를 칭의의 원인으로 삼는다면 일체의 변수나 예외가 인정되지 않기에, 들포도를 맺은 이스라엘이나 중범죄를 지은 고린도교회는 칭의받은 자들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칭의에 있어 행위가 결과론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의롭게 된 자만 의롭게 살 수 있는 의(義)의 속성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의롭게 살려고 한다면, 이는 그가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이 의의 속성대로라면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자는, 의를 알지 못해 의롭게 살 수가 없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칭의가 종말까지 유예돼, 아직 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칭의유보자들이 의롭게 살려는 것은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미증유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지 못한 그들이 가진 의(義) 개념이라야, 기껏 세상의 개인 윤리나 공동체의 선 개념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개념에 미칠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우선적으로 말하는 의 개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울은 이 의를 세상 사람들이 가진 율법적 의와는 전혀 다른, 새로 나타난 미증유의 의로 규정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갈 3:20-21)'.

그리스도인이 우선적으로 추구하려는 의가 바로 이 믿음의 의이고, 바울이 평생의 사명으로 삼아 전력투구했던 것도 이 믿음의 의였습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이 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의를 위해 살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곧 의에 부어진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육체를 의지하지 않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빌 3:3)'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의를 위해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의롭게 된 자 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의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칭의유보자들은 이신칭의론자들처럼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으면 의의 가치를 몰라 의롭게 살려 하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인간의 게으른 본성은 이미 도달해버린 목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 논리는 상식 수준에서 나온, 성경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논리입니다. 성경은 의롭게 된 자만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며(마5:6), 의로 중생한 자만 의를 위해 살 수 있다 고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하나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 지고의 관심사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가 우선사가 되는 것은(마 6:31-33),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게 하는 원천인, 의와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행위를 반추하고 검토할 때 원인론자들과 결과론자들의 판이함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행위를 구원의 원인으로 삼은 원인론자들은 자기 삶에서 선한 행위가 나타나지 않으면, 자신의 구원 여부부터 먼저 떠올리며 '아 큰일났네. 이러다 구원에서 탈락되는 거 아냐?'라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에게는 원천적으로 '하나님 사랑' 개념이 결핍돼 있으며, 온통 구원의 인과법칙만이 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으며, 그들을 움직이는 동력도 오직 구원의 여부입니다.

그러나 결과론자들은 먼저 구원받은자로서의 자신을 반추합니다. '아 나는 독생자의 공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 자녀답게 살지 못해 송구하구나'라는 회한을 먼저 갖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회개와 열심을 내게 하는 일차적 동력도 하나님 사랑의 강권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직면해도, 그들 안에 부어진 하나님으로 사랑으로 인해, 절망하거나 공포심에 빠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의를 보태는 것을 망령된 짓거리로 여겨 거절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댑니다. 그는 미성숙한 성도들을 권면하고 힘을 북돋울 때도 절대로 구원탈락 같은 공갈로서가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일깨움으로 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