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의(義)에 맞춰져 있고, 그리스도의 의의 경륜은 그의 성육신과 죽음에 맞춰져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의(義)의 경륜은 믿음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를 간파한 사단은 택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무너뜨리기 위해, 각 단계마다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폈습니다. 큰 그림에서 보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지만, 작은 그림으로 보면 구속의 경륜을 방해하려는 사단의 역사이라고 보는 데는 신학자 간에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먼저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방해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시절, 마귀로 상징되는 바로가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들의 씨를 말리려 했던 것(출 1:16),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머물던 야곱의 권속이 기근으로 몰사할 뻔 했던 것(창 42:1-2), 복중(腹中) 태아로 있을 때 정혼자 요셉의 오해로 죽음에 처할 뻔 했던 것도(마 1:18-19), 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사단의 계책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리스도 탄생 후에는 대속의 죽음을 죽지 못하도록 사단의 집요한 방해가 따랐습니다. 40일 광야 금식기도 때 마귀가 그리스도에게 세 가지 시험을 한 것도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죽음을 죽지 못하도록 훼방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마귀에게 절하라고 시험한 것은(마 4:3-9) 고통스런 십자가 죽음으로 하지 말고 하나님 아들의 전능한 능력으로 하라는 미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베드로의 애정 어린 만류 역시-베드로 자신은 깨닫지 못했지만-마귀의 사주에 의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마 16:22).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1-23)".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죽음으로 대속을 이루는 것임을 알았기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 고백했고, 베드로 자신의 사죄도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존되어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인정(人情)으로 가장한 사단의 사주에 넘어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만류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천신만고하여 세상에 오신 목적을(마 20:28) 그는 순간적으로 부정해버렸습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막는데 올인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을 고상한 윤리 교사나 사랑의 모범자가 되기 위한 것으로 곡해하는 지성적 왜곡까지 병행했습니다. 이러한 왜곡에는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나 계몽주의자들도 동참했으며, 기독교의 목적을 이타적인 산상수훈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이해하는 정통 신자들을 향해 "당신들은 왜 맨날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적 기독교, 십자가에 달린 비참한 예수만을 말하고 그의 아름다운 삶을 본받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느냐"고 힐난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의 구원관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죽음보다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거룩한 삶에 의존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안되며, 그를 닮은 거룩한 삶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경도 성도들에게 구원받은 자로서의 성화적 삶을 요청하고, 그리스도의 삶이 그 지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의 삶은 성도가 막무가내로 쫓을 지침이라기보다는 택자를 대신해 율법을 완성시킨 대행(代行)입니다. 율법의 완성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삶은, 이상으로는 삼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따라잡기에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에 대한 강조는 좋지만 언제나 주의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고 믿는 그리스도는 언제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대속주 그리스도입니다(고전 2:2, 갈 2:20). 사도 요한이 묘사하는 천상의 그리스도는 일관되게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시며(계 5:12), 피 뿌린 옷을 입은(계 19:13) 화목제물의 모습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죽음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식 역시 대속적 방식이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이 되게 하시려고 죽을 시기, 죽는 장소, 죽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노심초사했습니다.

정한 시기에 죽으셔야 했기에(갈 4:4, 요 17:1; 8:20),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으셨으며(막 3:12), 죽음의 기회도 피하셨습니다(요 8:59). 또한 공적이고 합법적인 정죄를 받아 죽으셔야 했기에 빌라도의 판결도 필요했습니다(요 19:16). 택자를 대신해 율법의 저주를 받은 죽음으로 죽어야 했기에 골고다 해골 골짜기에서(요 19:17)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했습니다(갈 3:13).

그러나 사단은 그리스도가 그런 대속의 죽음을 죽을 수 있도록 관망만 하지 않고, 끊임없이 방해공작을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직후 헤롯이 그를 살해하려고 도모했던 것도(마 2:16), 정한 기한 전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도하려는 그의 계책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혹자는 예수가 죽으러 왔다면 애굽으로 나사렛으로 도망다닐(마 2:13-23)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는데, 죽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정한 때에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마귀는 기한 전에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자신의 계책이 실패하니, 이제는 잘못된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전략으로 대속의 죽음을 훼방했습니다. 마귀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사자의 보호로 죽지 않는 것을 보여 주므로서-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하라고 꾀인 것은(마 4:6-7), 사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살하도록 유도하려는 계책(計策)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낭떠러지로 밀쳐 죽이려 한 것은(눅 4:29), 사사로운 사고사를 당하게 하여 공적인 대속의 죽음을 죽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계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반드시 재판관 빌라도의 심판을 받아, 나무에 달린 저주스런 죽음을 죽어야 했습니다(갈 3:13). 그리스도가 이렇게 합법적이고 공적인 죽음을 죽으셔야 하는 이유는, 완전한 율법적 의(義)를 우리에게 전가해주시기 위해섭니다(요 19:30, 롬 10:4).

만일 그리스도가 율법을 충족시킨 대속의 죽음을 죽지 아니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義)를 우리가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는(롬 10:4)' 완전한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다.

마귀가 대속의 의(義)를 성취하려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집요하게 훼방했음에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의(義)는 기어코 성취됐고, 마귀의 도모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기도 합니다. 이제 사단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공격할 이유도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시 목표를 바꾸어 공격하는데, 이제 그 대상이 믿음(혹은 믿음의 의)이었습니다.

이 공격은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된 직후부터 시작됐습니다.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은 율법의 실체인 믿음의 도를 전파한 때문입니다(행 7:52-53). 복음을 전하는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고 돌팔매질로 살해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사단 그 자체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가 회심 전 유대교도였을 때 기독교를 핍박했던 핵심 내용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된다는 이신칭의였습니다.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갈 1:23)."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유대교도였을 때 핍박했던 이신칭의의를 그대로 전하다가 핍박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39, 45)". 이 점에선 아마 바울만큼 극적인 반전을 경험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신칭의를 값싼 은혜이며 기독교 타락의 원흉이라고 지목하는 이들 역시 사단의 책략과 무관해보이지 않습니다. 믿음 외에 그리스도의 의(義)를 덧입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을 아는 마귀는, 믿음이 아닌 행위를 의지하도록 부추기므로 사람들을 넘어뜨립니다. 이는 오래 전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에서도 빤히 드러났습니다.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2)".

율법적 행위가 요구되고 믿음의 의(義)가 부정되는 곳에는, 그것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게 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아무런 유익도 취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 5:2)".

그리고 율법적 행위를 의지하는 데는, 많이 의지하건 적게 의지하건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주의 하면, 흔히 100프로 인간의 행위로만 구원얻는다는 주의(主義)라는 생각들을 합니다만, 사실은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만 최소한의 인간 의무만 요구할 뿐이며, 그렇기에 자신들은 사람들이 지칭하듯 율법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로마천주교도들, 신율주의자들, 칭의유보자들도 다 그렇게 말하며, 심지어 엄격한 유대교 율법주의자들까지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성화적 행위가 첨가되는 신인협력주의가  율법주의입니다. 이는 의롭다 함을 받는데 율법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첨가되면 나머지 율법 전체에 대한 의무를 지게 되어,-자기의 의도와는 달리-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할 의무를 집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갈 5:3)".

그리고 지극히 작은 율법 하나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지켜내지 못하면 율법 전체를 다 못 지킨 것이 되어 정죄를 받기에 부지불식간에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이신칭의에 대한 거부와 믿음에 대한 평가절하는 사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의를 헛되게 하려는 마귀의 계책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거짓된 가르침의 출처는 언제나 사단과 그의 종들이라고 지적한 말씀은(고후 11:13-15) 이즈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