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8장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1)

'자기'는 분석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자기란 존재의 근본적으로서 자기의 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이나 타자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보통의 단어나 용어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이자 핵심이 된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을 때,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깨닫는 문제는 바로 자기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자기는 단순히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정체성의 문제를 더 넘어서는데, 이는 진정으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1. 자기에 대한 이해

정신의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이 분석심리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전체성을 실현하는 것이 분석심리학의 과제이다. 융은 인간의 심리 및 정신의 문제란 전체성에 있다고 보았다. 이 전체성이 조화롭게 나타날 때 인간은 인간다운 정상적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정신의 문제의 발생이란 곧 이러한 전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융은 이 전체성을 '자기'(自己, das Selbst)의 개념으로 파악하기에 분석심리학에서는 자기의 개념이 인간 본질의 문제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원형에 관련된 통합성과 관계된다. 여러 가지로 구분한 의식 및 무의식의 현상들은 결국 자기의 여러 측면이라는 점에서 보면, 인격에서는 외부와 내부를 포괄한다.

1) 자기의 정의

자기(自己, das Selbst)란 분석심리학에서는 개인의 전 존재를 말한다. 자기는 개인의 전인격이며 개인의 정신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자기는 자기 자신이며,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고유한 특성이다. 자기는 누구도 아닌 자신일 수밖에 없는 고유한 인격체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전체적 인격이기에 외적-내적, 의식-무의식을 종합한 나의 성품이요 나의 나됨이다. 이것은 가지고 태어난 본래의 '나 자신'의 존재이다. 이를 3인칭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성품이요 타고난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람 자신이요, 그 사람됨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데 문제를 갖는다. 자기를 인식하는 자기인식의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때로 어떤 사람은 "나는 내가 잘 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의 자신을 안다는 것이지 전체적인 자신은 아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모두 알기 어려운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자기를 안다고 말할 때는 자기의 일부분일 뿐이다. 여기서의 자기인식의 문제는 자기원형, 본래의 나를 안다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안과 밖 두 세계상(世界像)과 그저 막연히 예감되는, 그러나 그럴수록 뚜렷이 지각되는 세력에 매여 있는 존재이다. 이와 같은 '어떤 것'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매우 가깝고, 우리 자신이면서도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그토록 비밀스러운 체질을 갖춘 잠재적 중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동물과의 친족관계, 여러 신들, 수정들과 별들과의 친족 관계를, 이 모른 것을 요구해도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으며, 우리의 거부감을 자극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또한 무엇이든 모든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정당하게 이러한 요구에 반대할 만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 소리를 들으면 치유의 효험이 있다(『인격과 전이』, 158-159)".

이처럼 알 수 없으면서도 어느 땐가는 느껴질 수도 있는 자기의 존재란 그만큼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자기의 존재란 알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융은 그런 자기를 만나면 치유의 효험이 나타날 정도라고 하지 않는가 말이다.

2) 전체인격으로서의 자기

자기는 정신적으로 전체성을 의미한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것으로 인간의 모든 정신현상 전체를 자기(Slbst, Self)라고 부르는 점에서다. 이런 시각은 자기가 분석심리학에서는 전체인격의 통일성과 전일성을 나타낸다. 이런 것은 정신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특성이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하나가 된 인격으로서 자아의식만으로는 결코 하나가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자아의식만으로 아는 인격은 전체 정신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로 통합될 때 비로소 전체인격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안다고 해도 전체인격이 어떤 형태인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전체정신으로서의 자기는 개인이 무의식을 의식화해나감으로써 서서히 드러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개인의 무의식을 얼마나 의식화해 낼 수 있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결국 개인의 무의식이란 부단히 의식화 나가면서 전체인격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기의 개념은 경험할 수 있는 것과 경험할 수 없는 것, 또는 아직 경험되지 않은 것을 포괄하고 있다. 의식된 내용과 무의식적 내용으로 이루어진 전체성이 하나의 명제인 한, 이 개념은 초월적이다." 이런 것은 자기가 정신의 깊은 곳에 존재하기에 그만큼 알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의 전체성을 갖는 자기를 알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기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살아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처럼 자기의 존재를 알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전체정신이라는 사실이 의문으로 남는다. 그래서 자기는 다만 형이상학이나 철학이 아닌 경험적 관찰을 토대로 도출된 인간정신에 있어야 할 전제이기도 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는 분명히 자아의 크기를 넘는 존재이고,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이는 융이 자기란 우리가 의식하는 만큼 특정지울 수 없는 무의식에 존재하면서도 정신의 전체성에 해당하기에 언제나 자아를 넘어서는 크기로 남는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자기는 한 마디로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요약된다. 이런 자기는 심리학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본체, 우리의 파악능력을 넘어서는 것의 구조이며, 심지어 '우리 안의 신(神)'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갈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진정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해서 갈등하고 씨름하다가 어느 정도 자기를 발견하게 될 때에는 남이 모르는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뒤를 이은 바울은 바로 이 문제와 씨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두고 융은 바울뿐만 아니라, 엑카르트 대사(Meister Eckhart), 괴테의 파우스트, 나체의 짜라투스트라에서 이런 자기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음을 말한다. 다만 괴테나 니체는 그 문제를 자기통제적인 사고를 가지고 시도한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괴테는 마술사와 물불 가리지 않는 의지의 인간을 통하여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려 시도했는데, 그 인간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자이다. 니체는 군주적인 인간과 탁월한 현자를 통하여 악마나 신 없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시도했는데, 이때의 자기는 홀로서 있는 인간이다. 니체의 자기는 신경증적이고, 경제적으로 뒷받침되어 있고 신도 체계도 없이 있었던 그 자신처럼 가족이 있고, 세금을 납부해야만 하는 현실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결코 이상적일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런 과정을 두고 융은 어느 것이 맞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공평한 태도를 취해서 보면, 자기의 존재를 아는 일에 있어서는 다만 개인의 능력에 비례할 뿐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자신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로 귀결되고 있다. '사람이 해야 할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념은 그 자체가 초월적 명제이기 때문에 심리학적으로 정당하다고 인정된다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융은 자기란 원자구조의 가설처럼 하나의 가설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우리가 그 속에 포함된 하나의 상(像)일 것 같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격의 전체성으로서의 자기는 필연적으로 의식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처럼 완전히 하나의  한계개념이라는 것이다.

2. 자기의 행동양식

자기는 일정한 행동양식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인격의 원형에서 내부와 외부에 작용하는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자기의 개념이 외적인 행동양식은 페르조나(Persona)로서 외부세계에 대한 개체의 외적인 인격(外的人格, exteranl personality)이다. 이 외적인 인격에 대립하여 정신에 존재하는 것이 내적인 인격(內的人格, interanl personality)인데, 이를 '심령'(Seele)이라 부른다. 융은 페르조나의 상태에서 인간존재의 의미와 심령의 상실을 보기 때문에 상실한 인간의 전체성(Ganzheit), 또는 전일성(全一性)을 찾고자 시도한다.  

1) 인격의 중심으로서의 자기

자기는 인격의 중심이 된다. 자기는 전체인격인 동시에 또한 전체인격의 중심이다. 전체인경의 중심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격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으로 어떤 구조에서는 가장 중심점에 자리하는 것을 상정한다. 이런 중심의 문제에서는 존재하며 살아 있는 어떤 것, 두 개의 세계상과 그저 어렴풋이 예감되는, 그러나 그럴수록 분명히 느껴지는 심리학적 세력들 사이에 걸쳐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어떤 것'은 낯설고도 너무나 가까이에. 전적으로 우리 자신 가까이 있으면서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너무도 신비한 구성을 하고 있는 하나의 잠재적 중심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를 놀라게 함이 없이, 물론 우리의 비난을 자극함도 없이 동물과 제신(諸神)과 결정(結晶)들과 별들과의 친족성을 요구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치유력까지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비한 힘을 가지는 자기의 존재는 어떤 베일에 싸여 있다. 그래서 자기의 존재는 사람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거나 오해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자기를 인식하는 사람이 마치 큰 도(道)를 깨달은 것으로 자처하는 가하면, 인생의 비밀을 알아내었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그 진위여부를 가릴 수 없어서 단언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정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 현상은 모두 마치 코끼리의 어느 한 부분을 만지고서 코끼리를 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융이 자기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을 인용하여 살피기로 하자. "나는 이 중심을 자기(das Selbst)라고 불렀다. 지적인 면에서 자기는 하나의 심리학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것이라고 포착할 수 없는 인식 불가능한 본체를 표현하게 될 하나의 구조이다. 이 구조는 벌써 그 정의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체 정신생활의 여러 시발(始發)은 피할 수 없이 이 중심에서 뿜어 나온 것이다. 또한 모든 최상의 그리고 최후의 목표는 이 중심을 향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역설은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이해능력을 넘는 어떤 것의 특색을 나타내려 할 때에는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다."

인격의 중심을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구조학적인 상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태양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구를 위시한 모든 우주의 별들이 태양계를 중심으로 운행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융은 이런 원리에서 자기와 자아를 이런 태양계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자기와 자아가 태양과 지구 사이만큼이나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무의식의 중심 되는 자기와 의식의 중심이 되는 자아는 결코 혼동될 수 없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간적 오성(悟性)의 저편에 있는 것은 어차피 오성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기에 만약 우리가 신의 개념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그저 특정한 심리학적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다. 물론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방해하고, 의식을 압박하고 기분과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어떤 정신 내용의 독자성과 위력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때로는 상당히 신비한 특성을 갖기 때문에 인간이 과학을 이유로 들어 잘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실제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시된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그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려 한다. "사람들은 아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나 신경성 장해, 혹은 심지어 통제할 수 없는 악덕이 일종의 신의 표명이라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낼 것이다. 만약 그런 고약하다고 할 만한 것들을 인위적으로 자율적 정신 내용의 숫자에서 떼어낸다면, 그것은 바로 종교 체험에 있어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하나의 손실일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무엇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설명으로 제쳐놓는다면, 그것은 귀신을 쫓는 완곡어법이라 할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는 그것들이 단지 억압될 뿐이며, 보통 그저 겉보기의 이법, 즉 약간 수정된 착각을 얻게 될 뿐이다. 인격은 그렇게 해서 풍부해지지 않으며 오히려 빈곤해지고 정체된다."

이런 점은 융이 경험과 인식에서 나쁜 것으로 보이는 것이나 적어도 의미 없는 것, 가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보다 높은 경험 단계와 인식 단계에서는 최상의 것의 원천으로 보일 수 있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인격에서 그에 해당하는 그림자를 빼앗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격은 그 형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의 경고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형태'가 입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내려면 깊숙한 그림자가 필요하다는 원리에서다. 그림자가 없다면, 그 모습은 평평한 헛개비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격의 중심이 쉽사리 경험되기 어렵다고 해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의 반증인 것이다.  

2) 인격의 원형으로서의 자기

자기는 인격의 원형으로 존재한다. 자기는 인격의 원형으로서 쉽게 알 수 없다고 해서 하나의 추상적인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니라 무의식에서는 그 조절자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는 자기원형으로서 무궁한 에너지를 갖고 있으며, 그 자체로 존재하며, 그리고 자율적으로 정신기능을 조절하여 전체정신을 실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자기의 존재는 무의식에 있는 조절자, 질서와 지남력(指南力, orientation)의 원형이다. 자기의 전체를 인식하는 문제는 자기원형의 문제이기에 우리가 원형의 완전한 인식의 불가능처럼 결국 자기 자신(das Selbst) 역시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이런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총망라하여 인식되어야 할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격의 원형으로서의 자기는 집단무의식에서 이해된다. 집단적 무의식을 구성하는 원형은 인간정신의 선험적인 원초적 조건으로 시공간, 인종, 문화,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가지고 있는 인간 형태의 조건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장 인간적으로 느끼고 사유하며 행동하게 되는 조건이며, 이것은 태초로부터 인류가 경험해 온 모든 것의 침전물이다. 물론 이런 원형을 생각하면, 모성원형, 부성원형,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그림자운형, 영웅원형, 어린이원형, 노현자원형, 태모(太母)원형, 여성성의 원형, 남성성의 원형 등 실로 무수히 많다.

그리고 이런 원형 자체는 원초적 행동유형의 조건들로서 인식할 수 없고 일정한 내용을 갖지 않으나 체험을 상(像)으로 나타남으로써 인식된다. 그 중에서도 자기는 인격의 원형 중에서도 무의식적인 특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자기 인식의 문제는 개인의 의식적인 측면, 개인의 무의식적인 페르조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의 존재를 모두 인식하는 것과 관계된다. 이 모두가 개인의 전체성, 즉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특성들이기 때문이다.

삶은 하나의 작용이며 행동이다. 이는 정신성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복잡한 정신의 특성은 끊임없는 작용을 일으킨다. 개인은 자신이 알 수 없어도 개인의 정신의 작용은 끊임없이 계속된다. 때로 그것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예상외의 심각한 방향으로 귀착되기도 한다. 정신의 작용력이란 전체성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른 결과를 빗는 것이 문제다. 자기인격의 분열, 자기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자기소외 등의 지양되어야 할 현상도 일어난다.

물론 여기서는 무의식적인 투사가 중요하다. 특별히 부정적 특성을 가진 비인격적인 투사는 자기 인식에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친다. 때로 혼란을 주기도 하며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기팽창을 초래하게도 만든다. 한편 비인격적인 투사는 정신에 영향을 미쳐 집단무의식의 내용을 통합하고 자아-인격에 특수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어떤 것을 지양하고 어떤 특성을 지향하여야 본래적인 통합된 자기 자신이 가능한가. 부단히 추구해야 할 자기발견의 과제라는 점에서 자기, 즉 자기 자신이란 알고 보면 간단하지 않은 존재이다.

인격의 원형으로서의 자기는 꿈과 환상, 그리고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 남겨진 상징사적 문헌에 나타난 원형상들을 통해서 원형적 조건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융은 1955년 한 목사와의 편지에서 종교적 진리를 규명하는 심리학적 과정과 그가 발견한 원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원형이 '진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이 살아 있고 내가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는 인식할 수 없는 한계개념이어서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그것이 분명히 살아있다는 것이므로 답변을 한 것이다.

융의 의도는 자기의 원형을 그만큼 쉽게 답변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고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원형의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면 인격의 원형으로서의 자기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기에 이는 마치 자기가 태양계에서 태양과도 같은 의미로 된다. 이런 자기는 무의식에 있는 정신의 조절자로서 원형들을 그 주변에 배열하여 전체정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만드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원형으로서의 자기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의식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때만 발휘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에 대하여 기술했다. 자기는 분석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자기란 존재의 근본적으로서 자기의 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자기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이나 타자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보통의 단어나 용어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이자 핵심이 된다는 점에서였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을 때,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깨닫는 문제는 바로 자기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자기는 단순히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정체성의 문제를 더 넘어서는데, 이는 진정으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