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7장 내적인 인격으로서 아니무스(2)

아니무스는 남성적 특성이다, 특히 여성 안에 있는 남성성이다. 그래서 아니무스라는 인격 원형은 아니마와는 비교되거나 대립된다. 여성에게 어느 정도 남성적 특성이 정신에 반드시 있고 본래 있는 특성으로 내재된다는 점에서다. 그럼에도 아니무스는 남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건이 되기 때문에, 여성 속에서 이성적인 작용이나 용감한 부분이라고 해야 한다.

1. 아니무스의 긍정적 측면

무의식적인 아니무스는 개체의 인격발전에 대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아니무스의 긍정적 특성과 부정적 특성이 그것이다. 긍정적 특성으로는 주로 남성이 장점으로 지니는 정신적인 성격들이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모두 그런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없듯, 이는 잘 분화된 아니무스의 몫이다.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진취적인 정신, 용기, 진실성, 그리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유도하여 생각하게 하는 힘 등을 발휘하게 만든다. 우리가 때로 "저 여자는 남자처럼 대담한 데가 있다"든가, "남자 몇도 그 여자를 못 당한다", "그녀는 남자 이상으로 성격이 강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경우에서 잘 분화된 아니무스의 특성을 보는 것이다.

1) 여성의 창조적인 생각과 행동으로서 아니무스

여성이 남다르게 창의적인 생각을 하여 창의성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여성은 남성 이상으로 창의적인 생각으로 남성을 압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말했다. "아니무스는 여성적 조상의 남성에 대한 모든 경험의 침전과 같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아니무스는 또한 생산하는 창조적 본체이다. 물론 남성적 활동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아니무스는 우리가 '생산해내는 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내보낸다. 남성이 자기의 업적을 하나의 전체적 창조물로서 내적인 여성성으로부터 나오게 하는 것처럼 여성의 내적인 남성성은 남성의 잉태시킬 만한 창조적인 싹(Keime)을 생성한다."

이런 경우는 실제 현실에서도 경험된다. 어느 여성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거나 심지어 모두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불안 발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여성이 한 밤의 꿈을 통하여 자신을 발견하고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다면, 그녀는 분명 긍정적인 아니무스의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예로서 프란츠 여사는 45세의 한 여인의 꿈을 소개한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었는데, 자신이 그런 재능이 있는지를 몰라서 살리지 못한 사람이다. 그녀는 어느 날 밤 한 꿈을 꾸었다. 그 꿈은 복면을 한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와 그녀의 여동생을 고문하며 괴롭힌 꿈이었다. 그녀는 꿈에서 한 복면한 사람이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림을 참 잘 그리네요!"하고 칭찬할 때, 그가 예술가의 고상한 머리를 가진 것처럼 "음, 그렇고 말고" 하며 응수한 것이었다.

이 꿈은 바로 그녀의 아니무스가 창의적인 인격화로 나타냈다고 분석된 것이었다. 의식할 수 없는 무의식의 아니무스의 존재가 그녀로 하여금 창의력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꿈에서 복면을 한 두 사람은 그녀의 아니무스의 양면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여동생은 실제로 예술적인 재능이 있었으나 살리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꿈에서 본 도둑들은 현실과는 다른 가장(假裝)을 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재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꿈은 그녀의 재능을 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그러면 그녀의 꿈에서 왜 두 사람이 나타났는가? 이러한 의문은 아니무스의 특성으로 해결된다. 아니무스는 그 특성상  꿈에서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이런 집단적 아니무스의 특성 때문에 곧잘 '사람', '그들' 또는 모든 사람이라 말하고 '항상', "...을 해야 한다", 또 "...임에 틀림없다" 등의 사고와 행동에 관련된 발언을 하는 것은 여성의 긍정적 아니무스가 발언을 한 것이다. 이 꿈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면, 우리는 여성에게 창의력을 암시하는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특성을 경험한 것이다.

2) 여성의 주도권과 용감성으로서 아니무스

여자보다는 남자가 주도적이고 용감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이런 생각을 뛰어넘어 어떤 여성이 남자도 하기 어려운 일을 감행하는 용맹성을 보이는 경우를 본다. 국가를 위기에서 구출한 앞장 선 여성지도자나 민족 투사 중에 종종 여성들이 있다. 프랑스의 잔 다르크, 한국의 유관순과 같은 인물이다. 여성이 남성보다도 더 용감한 모습일 보일 때 "저 여자는 남자 몇도 못 당할 만한 사람이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융은 "여성이 아니무스에 강하게 사로잡힌 경우로 본다. 아니무스에 강하게 사로잡힌 여성은 언제나 그녀의 여성성, 즉 그녀의 적응된 여성적 페르조나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마치 남성이 동일한 상황하에서 여성화의 위험에 처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이유이다. 이런 현상은 정신적인 성(性)이 전환된 것으로 전적으로 내부에 속한 기능을 외부로 옮기는 데서 나온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가 굳이 도착의 현상으로 본다면, 그 원인은 물론 외부 세계에 자동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내면세계에 대한 인식의 부족 또는 결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적응의 문제에서 외부 세계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요구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용감한 측면은 특수한 경우에서만 아니라 일상의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여성이 일상생활에서도 여성의 남자다운 용기나 주도성을 발휘하는 경우이다. 이런 현상은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 여성이 남자의 문제를 타개하는 경우이다. 여기에는 대개 부부생활에서 경험된다. 부부생활에서 남편이 어려운 일에 봉착하여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아내가 용단을 내려 위기를 타개하는 적극성과 용기를 보이는 때다.

그런 점에서 아내가 적극적인 용단을 내려 새로운 사업을 하여 성공하는 것이나, 도저히 그 일에 뛰어들 수 없는 남편을 부추겨서 과감하게 그 일에 착수하여 일의 효과를 보는 경우이다. 그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남편보다는 아내가 주도하는 경향이나 아내가 남자 이상의 용기를 보이는 모습 등은 여성의 긍정적인 아니무스의 측면을 보는 것이다.  

3) 여성의 객관성과 영적 지혜로서 아니무스

여성의 객관성과 영적 지혜는 아니무스의 장점이다. '아니마'는 기분(Launen)이나 감정(Emotion)을, 반면에 '아니무스'는 생각(Denken)이나 의견(Meinungen)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아니무스의 '사고'나 '의견'은 주간적인 특성이 강한 '기분'이나 '감정'보다는 객관적인 특성으로 간주된다. 물론 정신적인 특성이란 어떤 뚜렷한 경계선을 긋는다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성의 강도에 따라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분류하는 것은 편의상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세계는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자매, 남편과 자녀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의 세계는 상호 신뢰하는 편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비슷한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반면에 남성의 세계는 민족, 국가, 이익사업 등이다. 남성에게 가족은 단순히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며, 국가 기초의 하나이며, 그리고 아내는 반드시 '이 여자'가 아닐 수 있다. 이는 여성이 '우리 그이'라고 말할 때 그녀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아닌 것이다. 남성에게는 개인적인 것보다는 보편적인 것이 더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다. 그래서 남성의 세계는 여러 개의 대등한 인자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여성의 세계는 남편의 저편으로 일종의 우주적인 안개의 끝에 접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다른 점은 서로 다른 관심에 있다. 남성에서는 정열적인 독점성이 아니마에 부착되어 있고, 여성에서의 불확실한 다수성은 아니무스에 부착된다. 남성의 눈앞에는 윤곽이 뚜렷한 의미심장한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위험한 마녀인 키르케(Circe)이거나 그리스 신화에서 바다의 요정인 칼립소(Calypso)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반면 여성의 아니무스는 오히려 바다의 전설에 나오는 유령 선원인 네델란드 사람이나 그 밖의 세계의 바다에서 온 미지의 나그네로 표현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하여 여성의 아니무스는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고, 변화무쌍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특히 이러한 표현들은 꿈에서 나타나며, 구체적 현실에서는 유명한 테너, 복싱 챔피언, 미지의 먼 도시에 있는 위대한 남성들이다.

남성의 성향이 주로 외부적이나 객관적으로 향하는 측면이 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려는 것이나 직위를 중요시하는 것은 남성성이 지향하는 특성이다. 여성이 의견, 법칙, 평균진리, 판단, 이성 등을 주장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이런 아니무스의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여성 안에 있는 긍정적으로 분화된 아니무스의 특성 때문이라 본다. 그 외에도 남성적인 성격에 해당하는 영적(靈的)인 지혜, 가치 있는 특성의 아니무스를 여성 안에 있어 무의적인 균형을 이룬다. 여성이 내향화로만 치우치지 않고 외향화로 눈 돌리게 함으로 정신에서 보상기능의 효과를 이루는 것이 이런 아니무스의 역할 때문이라 볼 수 있다.

2.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측면

아니무스에는 부정적인 특성도 있다.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특성으로는 여성적인 성격을 뛰어넘는 특성으로서 대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들이다. 여성이 때로 "남자 이상으로 잔인하다"든가, 무모하고, 과묵한 특성을 보이거나, 더 나아가 안하무인(眼下無人)식으로 집요하게 몰아 부치는 일방성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여성 안에 있는 아니무스가 미분화된 특성이 노출된 것이다.

어느 여성이 세간을 놀라게 하는 끔직한 사건을 저지른 것을 두고 우리는 "여자가 그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바로 그녀 안에 있는 아니무스가 발휘된 실례이다. 이런 특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1) 여성의 무자비한 마녀의 모습으로서 아니무스

여성에게서 미분화된 아니무스가 잔인성, 무모함, 그리고 과묵하고 일방적인 타당성을 강요하는 등 저해하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이런 미분화된 아니무스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녀의 정신세계에서는 종종 자기도 모르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아니무스의 양면성을 더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도 잘 경험되지만 신화(神話)와 민담에 더 많이 녹아 있다.

신화와 민담에서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파괴적인 특성을 보이는 것으로 대개는 '죽음의 신(神)'으로 등장한다. 여성의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대개 아버지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면 여성이 아버지와 긍정적인 관계에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인 영향으로 채색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에 아버지는 자신의 딸의 아니무스에 대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참된 확신이라고 하는 색조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 확신은 그 여성이 진정으로 '있는 그대로'인 자기 자신의 현실을 결코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그 때문에 아니무스는 때로는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화신이 된다.

집시의 민담에서 한 외로운 여인(女人)이 사자(死者)의 왕(王)이라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이런 경고 후에 한 멋진 청년을 맞아들인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자 그녀는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 달라고 조르지만, 그 청년은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되면 그녀가 죽게 될 것이라고 거절한다. 그러나 그녀의 집요함을 뿌리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었다. 그가 '죽음 그 자체'라고 털어 놓자 그녀는 곧 공포에 질려 죽고 말았다.

이를 두고 신화적인 관점에서 그 멋진 청년은 이교도의 아버지상(像), 신(神)의 상(像), 또 이 민담에서는 페르세포네(Persephone)를 유괴한 하데스(Hades)처럼 '사자(死者)의 왕(王)'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기에 등장된 남성은 심리학적으로는 다름 아닌 여성 안에 있는 아니무스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런 아니무스는 여자들로 하여금 모든 인간관계, 특히 현실의 남자들과의 모든 접촉을 기피하도록 유혹하는 특수한 형태이다.

이런 형태는 이른바 여성을 삶의 현실로부터 단절 및 격리시키는 인격성이라고 볼 수 있다. 신화나 민담에서 때로 여자가 무서운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것은 여성 안에 있는 아니무스 때문인데, 이는 아니무스가 때로 죽음의 귀신이 되는 이유이다.

2) 여성의 도둑이나 살인자의 역할

신화(神話)와 민담에서 여성이 도둑이나 살인자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실제로 아니무스는 신화나 옛날이야기에서는 도둑이나 살인자의 역할을 맡는다. 이런 형태의 아니무스는 거의 정신이 나간 냉혹하고 파괴적인 행동이 인격화 된 것이다.

《푸른 수염》의 예는 이를 입증한다. 그는 숨겨진 방 속에서 모든 아내를 은밀히 살해한다. 이 형태에서 아니무스는 모든 반의식적인 차갑고 파괴적인 생각을 인격화하고 있다. 그것은 특히 그 여성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을 작가하고 있지 않을 때 단시간에 여성 속에 침입한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집의 유산에 같은 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심술이나 음모(陰謀)에 의해 채워지고, 그녀로 하여금 타인의 죽음을 바라도록 하는 계산적인 생각뿐이다.

때로 여인이 이러한 파괴적인 성격을 은연중에 품어 남편과 자식, 그리고 다른 원한(怨恨)에 맺힌 사람들을 질병이나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을 결심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것은 여성의 무의식에서 나온 생각이 의식으로 떠오른 악(惡)의 형태이다. 만약 어떤 어머니가 27세의 아들이 익사한 사건을 두고 "이렇게 된 것이 차라리 다행이다. 그 편이 다른 여자에게 아들을 뺏기는 것보다 낫다"고 말했다면, 이미 그녀의 무의식에는 아들이 죽는 것을 원했던 무의식이 자리했었음을 드러낸 경우이다. 이처럼 여성에게 나타나는 인격 파괴적인 행위는 부정적인 그녀의 아니무스의 발현 때문이라 본다.

3) 여성의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으로서 아니무스

여성이 절망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색한다. 이것은 모든 감정의 복잡 미묘한 수동성과 불안정, 감정의 마비와 허무감에 이르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부정적인 아니무스는 여성 안에서 절망감을 발동시킨다. 때때로 여성이 존재의 심연에서 "너는 절망적이다. 다시 시도해 보아도 결국 소용이 없다", "무엇을 해도 의미가 없다", "생활이 결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등의 소리를 듣는 것은 부정적인 아니무스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무의식적인 '아니무스 의견'(animus opinion)이라 한다. 여성이 이러한 아니무스에 사로잡히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생각은 곧 행동을 산출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생각이나 감정은 결국 파괴적인 태도나 행동으로 이어진다. 은밀한 파괴적인 태도를 키우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써 아내는 그 남편을, 그리고 어머니는 그 자식들을 병이나 사고, 혹은 죽음으로까지 몰아넣고야 만다.

여성이 파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에는 그녀는 자식들의 결혼조차도 막아버릴지 모른다. 그것은 여성에게 매우 깊이 숨겨진 악의 모습으로서, 어머니의 의식의 표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이는 때로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으로 자아가 무의식의 부정적인 아니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와 동일시한 결과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의 기묘한 수동성이나 마비, 혹은 자기의 존재를 거의 느끼지 않을 만큼의 깊은 불안정감은 때로 무의식인 아니무스의 의견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때로 생활 속에서 그런 경험을 하는 수가 있다. 부정적인 무의식을 떨쳐 버리고 바른 의식의 현실에서 "내가 왜 그랬었던가,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었지?"하고 전혀 다른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3. 인격의 원형으로서의 아니무스

원형과 관련한 아니무스의 특성은 아니마에서 기술한 것과 같은 특성이 나타난다. 원형이 심리 및 정신에서는 후천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기에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태어난 정신적인 특성이라고 전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원형의 특성은 쉽게 인식할 수 있다든지 깨닫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대개는 신비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원형과 아니무스의 관계는 인식에 있어서 상당한 전문지식이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성질은 아니다. 이러한 특성이 투사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1) 인물이나 작품에 투사되는 아니무스

아니무스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투사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다. 신비한 원형으로서의 아니무스 특성은 아니마에서처럼 이성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킬 때, 위대한 영웅이나 현자(賢者)로 인식될 때 등의 신비한 감정의 촉발을 통해서 드러난다. 반대로 강렬한 혐오감, 공포감, 불쾌감 또는 외경의 마음에도 나타난다. 원형과 관련된 이러한 특성은 일상적인 감정보다 더욱 강렬하고 강박적이고 마력적인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원형은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이는 신흥종파나, 인기가수에 대한 집단적인 열광, 지도자로 각광을 받는 자가 군림하는 형태 등은 모두 아니무스 또는 정동이 일어난 결과이다. 이것은 여성의 마음속에 있는 초인적인 것을 희구하는 원형적인 특성이다. 이러한 원형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아니무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원형으로서의 아니무스는 인물에 투사됨으로 인해 경험이 가능해진다. 아니무스의 투사는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인물에 투사된다. 인물에 투사된 원형은 인물에 대한 숭배 및 경외로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는 상대방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무슨 특별한 현자(賢者)나 영웅으로 인식되는 것, 상대방의 말을 대단한 신앙심처럼 신뢰하게 되는 것, 그리고 이성간의 사랑에서 강렬한 황홀감을 일으키는 것 등이 해당된다. 그것은 이미 아니무스의 원형의 투사가 일어난 결과 때문이다.

이때 여성은 그 남자에게서 한 남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무의식에서 투사된 영웅의 상(像), 성자(聖者)의 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히틀러가 독일 여성들의 지지를 받아 전격적으로 정치를 행사하여 독일의 독재자로 군림한 것, 인기연예인들에 대한 열광이 일어나는 것, 특히 종교에서 교리적인 문제와 상관없이 신흥교주(敎主)를 따르는 여신도(信徒)들의 경우도 같은 유형이다.

아니무스의 원형은 예술적인 작품에 투사된다. 문학, 미술, 음악, 조각 등의 예술적인 작품에 아니마처럼 아니무스 역시 형상화 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사람의 어떤 특성이 사물에 비유되어 나타나는데, 이는 이름 모를 새, 비둘기, 학, 혹은 태양이나 달 속에 아니마, 아니무스의 원형을 그려내어 독특한 작품의 특색을 이룬다. 문학가의 경우는 책속에 어떤 인물을 등장시켜 자기의 아니마, 아니무스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국의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e)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1847)에 나오는 주인공 히드크리프(Heathcliff)는 부정적이고 악마적인 아니무스의 상(像)인데, 이는 브론테 자신의 아니무스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아니무스의 병리적 현상

아니무스는 병리적인 현상과 관련되는 측면이 있다. 아니무스는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병리적 현상에도 나타난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아니마처럼 아니무스 역시 애정망상(erotic delusion)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의 아니무스는 아니마처럼 질투하는 애인이다. 이런 현상은 실제적인 사람 대신에 그 사람에 관한 의견을 내세우는데 이러한 의견이 절대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근거는 한 번도 비판에 부쳐지지 않는 편이다. 이런 경우의 아니무스의 의견은 항상 집단적이며, 개인과 개인적 판단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마치 아니마가 감정을 선취(先取)하고 감정을 투사하면서 자신을 남성과 여성 사이에 세우는 것과도 같다. 이때 아니무스의 의견들은 만약 여성이 예쁘다면 남성에게는 눈물겹도록 어린애다운 특면을 보일 수 있다. 그래서 남성에게 인자스럽고 아버지 같이 가르치려드는 태도를 취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의 감상적인 측면을 건드리지 않고 남성의 마음을 흔드는 절망과 어리석음이 여성으로부터 기대되지 않는다.

다만 이때 경쟁심만 눈에 띄게 된다면, 여성의 아니무스의 의견은 남성에게 자극적이 된다. 그것은 그녀의 논거가 주로 치졸하고 그녀 자신을 위해서 많은 의견에다 최소한 나도 의견을 가졌었다는 식의 의견을 위한 의견이기 때문이다.

융은 아니무스의 병리적인 특성과 관련하여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표현의 하나로 '남녀신의 쌍의 주제(Syzygienmotives, Paarungsmotive)'에 주목하였다. 이런 종류의 여성의 마음속에는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는 사랑뿐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아니무스가 속삭인다. 애정망상은 정신병리적인 치료에 어려운 점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기간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부정적인 특성에 연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때의 아니무스는 예외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아니무스의 의견은 의식에 의해 거의 반대되기가 어렵다. 그것은 아니무스의 의견이 개별적인 상황에 적절하지 않고 비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식이 일반적인 타당성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데는 상당한 정신적 기능만이 가능한 것이다.

3) 아니무스와 아버지 상

아니무스는 최초로 아버지에게 투사된다. 여성이 남성의 투사를 필요로 할 때 여자아이에게서 최초의 투사는 언제나 아버지에 대해 행해지게 된다. 아버지의 남성적인 상은 딸에게 중요하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 아버지의 상이 긍정적이면 딸에게는 남성관이 긍정적이게 된다. 그 반면에 아버지의 상이 부정적이면 딸은 남성관에 대하여 부정적이게 된다. 이는 가족이 함께 생활하면서 이성에 대하여 투사되는 영향이 큼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아버지가 아니어도 오빠나 남동생의 경우에도 유사한 결과가 일어난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반드시 옳은가에 대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상태에서 여성이 인지하는 아버지의 상(像)은 아니마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풍부한 환상에 의해서 채색된 것이다. 이 환상은 정신적 현실로서 일종의 신성(神性)이 덧입혀진 아버지의 현실적인 상(像)이다. 여성은 남성상을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무의식적으로 일정한 기준을 만들고, 영향을 받아 특정한 남자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융이 남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를 우리는 여성으로 대치할 수 있다.

"모든 여자는 자기 속에 영원한 남성상을 갖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이 남자나 저 남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일정한 남성상이다. 남성상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무의식적이고, 여성의 살아 있는 유기 조직에 새겨져 있는 원시적인 기원의 유전적인 요인이며, 모든 조상의 남성 경험의 흔적 또는 원형으로서, 이를 테면 일찍이 남성이 준 모든 인상의 침전물이다. 이 이미지는 무의식적이므로,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투영되고, 정열적인 매력 또는 혐오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 때문에 아니무스는 '생각', '의견'(Meinungen)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결혼한 여자가 남편보다는 여전히 아버지의 간섭받는 것을 좋아하여 아버지의 의견을 자주 묻거나 거의 아버지에게 매달려 있는 인상을 주는 것 등은 아니무스의 투사와 무관하지 않다.

4) 아니무스의 발전단계

아니무스는 발전단계를 갖고 있다. 아니무스 역시 아니마처럼 4단계의 발전단계를 갖고 있다. 아니무스의 발전단계는 남성의 인격이 승화되는 차원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성에게서는 기대하는 마음의 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무스의 1단계는 단순한 신체적 힘의 인격화로서 나타난다. 스포츠에서의 우승자나 잘 발달된 근육질의 신체적으로 건강한 남성이다. 운동경기의 우승자나 힘살이 늠름하게 솟아오른 레슬링선수나 보디빌딩선수, 타잔처럼 육체적인 영웅들이다. 월드컵 당시 여성들이 축구경기자체보다도 오히려 축구선수들의 근육미에 관심이 모아진 것은 이런 단계를 말해주는 것이다.

2단계는 낭만적인 남성, 또는 행동적 남성이다. 여기서의 아니무스는 신체적인 건강미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남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전쟁영웅의 이미지 속에 발견되는 주도권과 계획된 행동력을 갖춘 남성들이다. 이런 남성은 신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건강하여 주도성과 계획된 행위를 달성하는 능력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3단계의 아니무스는 말(言)이 되고, 곧잘 교수라든가 목사로서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의 아니무스는 지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들로서 논리적인 특성을 활용하는 교수나 목사의 상(像)으로 나타나며, 흔히 '말씀의 사자(使者)'이다. 이는 남성이 지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어려운 추상적인 개념을 적절히 해설하거나 설명하는 능력을 소유한 것으로 정신능력을 높게 평가한 아니무스의 상이다.

4단계는 아니무스의 최상의 단계로 의미의 구체화이다. 의미를 구현하는 것이다. 의미의 구현은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다른 이끌 수 있는 지도상에 어울리는 특성이다. 여기서의 아니무스는 아니마처럼 종교적 체험의 중개자이며,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도록 영적 진리로 이끌어 가는 지혜로운 안내자이다.

이런 아니무스의 특성은 여성에게 실제적인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 여성이 외적인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갖는 것이나 심리적으로 마음에서의 지주(支柱), 영적(靈的)인 확고함을 갖는 것이 아니무스의 영향이다. 그리고 잘 분화된 아니무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그 시대의 영적 발전에 연계시켜 남성을 능가하는 창조적 관념들을 발휘하게도 만든다. 역사를 통하여 보면, 국가적 차원에서 여자들을 점장이나 예언자로 기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여성 안에 있는 아니무스의 힘이 남성들을 고무시켰다는 표현이다.

4.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내적인 인격으로서의 아니무스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아니무스는 여성 속에 있는 남성적인 특성이지만, 실제로는 남성적인 특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남성성은 여성에게는 언제나 신비한 특성을 가지는 것이요, 이러한 특성은 여성이 영원히 추구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여자와 남자란 실제로 이 둘의 결합의 조화의 문제일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여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의 비밀인 것이다. 이런 특성이 약간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서로 다르게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갈등이 있고, 그에 따른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발생한다.

아니무스의 남성성이 가지는 특성을 정확하게 알고 그에 따른 이해와 더불어 적절한 대응이 요청되는 것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여성이 아니무스의 특성을 이해하게 되면, 그만큼 수용하거나 어떤 경우에 견디는 힘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무스의 특성이 무의식적으로 여성 안에서 작용할 때 어떤 심리적 현상이 일어나며, 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단순히 아니무스의 문제로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라는 성(性)에 대한 문제로까지 연결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아니무스의 특성을 이해하는 만큼 내면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과정이나 외부에로의 대응, 그리고 자신의 심리 및 정신적인 것이 통합적으로 작용할 것은 명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