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계절이 가고 오는 것은 시골 산촌, 농촌, 어촌에 사는 사람이 먼저 느낀다. 도시인은 인공 사회에 살기 때문에 별도, 꽃도, 바람도 느끼기 못한 채 세월이 간다.

①"내 손주가 그린 가을 그림, 하늘은 파랗고 산은 빨간색, 길은 노란 은행잎을 그린 뒤에 강아지랑 뛰어 노는 동화이다/내 딸아이가 그린 가을 그림은 하늘은 하얀 구름, 둥실 떠가고, 감나무에 잘 익은 감이 주렁주렁, 벼슬 긴 잘생긴 장 닭 이상을 / 우리 어머니가 그린 가을 그림은, 거무스름한 해지는 석양에 노을, 나뭇잎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가 있는, 언덕 위에 서서 회오(悔悟)하는 자화상/나는 무슨 그림을 그릴까, 그리다가 지우고 다시 그려본다. 추억을 그릴까, 희망을 그릴까, 그냥 내 이름만 써 놓고 만다"(김순옥/가을그림)

②"그동안 사랑 없이 산 사람이나, 그동안 사랑으로 산사람이나/공평하게 시간을 나누어 주시고, 풍요로운 들녘처럼, 생각도 여물어가게 하소서/9월이 오면 인생은, 늘 즐겁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슬플 뿐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하시고, 가벼운 구름처럼 살게 하소서/고독과 방랑의 날이 온다 해도 사랑으로 살면 된다 하였으니 따가운 햇살과 고요히 지나는 바람으로/달콤한 삶과 향기를 더해 아름다운 생(生)이게 하소서/진실로 어두운 밤하늘, 빛나는 별빛과 같이, 들길에 핀 풀꽃처럼/마음에 쌓여드는 욕심을 비워두시고 참으로 행복하기만 하소서"(좋은 글에서)

③"좋은 일도 험한 일도 지난일 마음에 담아두지 않나니(險夷原不滯胸中) 뜬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네(何異浮雲過太空) 고요한 밤바다에 이는 파도는 삼만리에 이르고(夜靜海濤三萬里) 밝은 달빛아래 석장 휘두르며 하늘에서 내려오네."(月明飛錫下天風) 출렁이는 바다(泛海) 明나라 王守仁(1472-1528)

④"너와 나 가까이 있는 까닭에, 우리는 봄이라 한다. 서로 마주하며 바라보는 눈빛, 꽃과 꽃이 그러하듯.../ 너와 나 함께 있는 까닭에 우리는 여름이라 한다. 부벼대는 살과 살, 그리고 입술, 무성한 잎들이 그러하듯.../아, 그러나 시방 우리는 각각 홀로 있다. 홀로 있다는 것은 멀리서 혼자 바라만 본다는 것, 허공을 지키는 빈 가지처럼.../가을은 멀리 있는 것이 아름다운 계절이다"(오세영/가을에)

⑤"하늘에 그려진 하얀 그림은 파랑 물감 뿌려 놓은 듯 곱기만 한데, 시간은 수많은 수다를 늘어놓고, 세월이 지나가는 터널에 가을이 오나봐요/초록나무그늘 소곤거리는, 풀벌레 소리는 평온함을 주고, 빨간 옷을 입은 노을을 바라보면, 외로움의 색을 찾아 맴도는 그리움으로 가을이 오나봐요/길가에 코스모스 허리를 잘라서, 투명한 음료수 병에 꽂아 낡은 책상 한쪽에 놓고, 턱 괴고 앉아서 노트한쪽 찢어놓고 어색한 詩 한 편, 마음에 들지 않아 구겨버리던, 추억으로 돌아가는 가을이 오나봐요 / 바람 따라 세월이 흐르고 마음 따라 새 옷을 갈아입는 가을이 오나봐요/(안성란/가을이 오나봐요)

⑥"때론 눈물 나게 그리운 사람도 있으리라/비안개 산허리 끌어안고 울 때, 바다가 바람 속에 잠들지 못할 때/낮은 목소리로 부르고 싶은 노래, 때로는 온몸이 젖도록 기다리고 싶은 사람도 있으리라"(목필균/가을비).

옛날엔 잠수함의 중앙에 토끼를 2-3마리 길렀다고 한다. 함정 안의 공기가 탁하거나 독가스가 생기면 사람보다 7시간 먼저 토끼가 죽거나 졸도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위기에 대한 예고편 바로 메타였던 것이다.

게오르규(1916-1992년)는 이 토끼가 현대사회의 시민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앞서서 우리 사회의 공기와 분위기와 생기를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살기에 불편하면 머지 않아 일반사람이 살기에도 불편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옛날 동화에 새 옷 입기를 탐내면 한 임금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시가행진을 할 때 한 어린이만 "임금님 발가벗었네" 하고 진실을 말했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