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16세기 종교개혁의 근간인 이신칭의(以信稱義)는, 태동 후 약 100년 어간을 풍미한 후 17세기 말에 이르러-대개 모든 개혁운동이 그랬듯이-처음 성령의 역동성 상실과 매너리즘으로 인한 화석화로 인해, 필립 슈페너(Philip Jacop Spener, 1633-1705)로 대변되는 독일의 경건주의와 18세기 슐라이어마허로 대변되는 신비주의(Schleiermacher, 1768-1834)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오늘 종교다원주의, 칭의유보론 같은 이신칭의에 대한 도전장 역시 이신칭의의 화석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이즈음 우리가 이신칭의를 새삼 조명하는 것은, 단지 이신칭의의 교리적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을 넘어, 교조화되고 화석화된 이신칭의 교리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그 안에 기독교 영성의 모든 필요 충분조건이 함의돼 있음을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먼저 제대로 각성된 이신칭의 교리는 교조화를 넘어 구원 확신의 신비를 경험시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허물에 대한 현실적 인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인됨을 확신 받게 합니다. 자기 행위를 반추할 땐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해줄 리 만무하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신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선언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공격자들의 주장처럼 이신칭의의 무율법주의(antinomianism)에 세뇌당한 자들의 이성과 양심의 마비로 생긴 착각이 아니라, 칭의받은 성도 안에서 성령이 역사한 결과이며, 모든 참된 신앙인들의 공통적 경험입니다.

일한 것이 없는데도 믿는 자를 의롭다 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롬 4:5-6). 자신에게는 도무지 그럴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믿음만 보시고 의롭다 해주셨다는 것을 믿는데 모순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죄책감에 몸을 떨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고 절망하면서도, 동시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자신의 죄를 직시했을 때, 죄의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은 의인이라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비입니다.  

반면 오직 자신의 허물진 모습만 직면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성령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율법주의자들, 신인협력주의자들, 칭의유보자들이 그들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의롭게 살고,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 자는 의롭게 살지 못한다. 고로 내가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을 보니 나는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3단 논법에 세뇌당한 결과였습니다.

종교개혁 초기 인문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개혁자들과 청교도들 중에서도 이 변증법을 뛰어넘지 못해, 구원의 확신을 갖는데 실패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다면 누구든 예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를 향해 초등학문이라고 한 것도(갈 4:3, 골 2:8) 율법주의가 이런 초보적인 3단 논법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제대로 수용된 이신칭의는 하나님을 보는 신비를 경험시킵니다. 하나님은 오감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지만, 믿음 안에서 오감 이상의 또렷한 하나님 인식을 갖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에게, 하나님과 그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담이 철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예수님 말씀은, 수양종교인들이 말하듯 마음을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이 갈고 닦으면 신을 본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 사이를 가렸던 죄가 청결케 되니, 하나님의 얼굴이 보여진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바울을 위시해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행 2:25)'. 그러나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는 시도들도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신비주의자들과 철학자들이 그들입니다. 특히 헬라 철학자들은 수백 년간 온갖 지혜를 도모하여 하나님을 만나려고 궁구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한다'는 철학(philosophy)이 추구하는 궁극적 지혜는 사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지만, 실상  철학으로 조우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전 1:21)'는 말로서, 철학의 한계를 이미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에는 자신을 계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진정한 지혜는, 오직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고전1:24)라고 정의했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촌로가 날고 기는 철학자들이 갖지 못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갖는 것은, 십자가의 그리스도 신앙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 곧 복음이 사람의 지혜로운 것보다 낫고(고전 1:25)'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을 택하여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고전 1:27)'는 말씀에 대한 성취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성도들을 중매자(고후 11:2)와 제사장(롬 15:16)으로 일컬은 것은, 그들이 가진 복음만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이신칭의 복음을 제쳐놓고 교훈적이고 율법적인 성경 내용들을 통해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의(self-righteousness)'를 배양시키게 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려고 합니다.

또 어떤 설교자들은 사람들 안에 있는 자연인의 종교적 감성으로 배양된 신비한 느낌을 하나님 조우의 경험이라 세뇌시키고, 청중들을 계속 그것에 길들여지게 하므로 정작 복음적 은혜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리게 합니다.

이는 사람들을 유해한 인스턴트 식품에 길들여지게 하여 건강한 자연 식품에 도래질치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빌 3:18) 악한 일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느낌은 성경이 말하는 거듭난 자의 신령한 체험이(고전 2:13) 아닌 자연인의 종교 감성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이 불교나 천주교를 선택한 이유를, 그 종교가 풍겨내는 신비감에 이끌려서라고-기독교에 거부감을 갖는 이유를 너무 시끄럽고 도발적이어서 신비감이 없어서라고-하는 말들을 듣는데, 이는 다 인간 안에 내재된 보편적 종교 감성의 발로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가장 심오하다는 평가를 받는 불교의 해탈, 플라톤의 이데아(idea), 신을 사람 안에 모신다는 힌두교까지도 보편적 종교 감성에 뿌리박은 심연(深淵)의 체험일 뿐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신비로운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New Age)는 다 그런 류입니다.

이런 자연인들의 심연의 메카니즘(mechanism)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려고 것은 무모한 망상이며, 이는 끝간데 없는 음부와 낙원의 거리를(눅 16:26) 섶다리(brushwood bridge)로 연결지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지울 수 있는 것은 화목케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엡 6:15, 고후 5:19)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신칭의 복음은 지고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죽은 영혼을 터치할 수 있는 것이 이신칭의 뿐이라는 점에서, 이신칭의보다 신령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의 귀에 들려져 그를 일으킨 것이 '나사로야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이었듯, 죽은 영혼을 터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신칭의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설교자가 청중에게 설교할 때마다 반드시 이신칭의 복음을 말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종교적 감성, 신비로운 느낌, 마음의 심연(深淵)으로 죄로 죽은 인간 영혼에 어필하려는 것은, 고상한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어 죽은 영혼을 살리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죽은 영혼에 도달하여 살려냅니다.

또한 이신칭의가 하나님 사랑을 체험시킨다는 측면에서 지고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지 않으면 결코 알려지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사랑이 경험됩니다. 의(義)에 하나님 사랑이 있기에, 의롭다함을 받으면 저절로 하나님 사랑이 느껴지고, 하나님 사랑이 의(義)의 사랑(롬 5:8-9)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그 내용들은 일반은총적 측면이 주를 이룹니다. 그들은 자연만물을 대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솜씨가 놀라우며, 그런 아름다운 자연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크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하나님 사랑을 개인과 연결지을 때도 주로 세상적인 복들에 한정지을 뿐, 정작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의 복(갈 3:9)에 대해선 별다른 감격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는 이신칭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신칭의가 신비한 이유는 이신칭의의 비밀스러움 때문임을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소위 자칭 타칭 신령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앉아서 구만리 장천을 보는 미래의 예지를 가졌거나,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일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구약의 사울왕(삼상 10:11)과 거짓 은사자들처럼(마 7:22), 이신칭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신통방통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최고의 신령과 영험은 이신칭의 복음에 있습니다. 설사 그가 앉아서 구만리 장천을 보지 못하고 미래를 예견하지 못해도, 이신칭의의 비밀을 안다면 그는 가장 신령한 자입니다. 이신칭의 복음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취어 온 비밀이며(골 1:26), 하나님의 최지근거리에 머무는 영물인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벧전 1:2), 오직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의 도움으로만 알려지는 진리입니다(요 15:26, 벧전 1:12).

이런 점에서 이신칭의는 가장 신령할 뿐더러, 이신칭의를 입은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영적인 필요충분조건을 가진 신령하고 복된 자들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