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나라 말에 '인사치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특히 명절날 인사치레로 선물을 주고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정말로 주고 싶어 준다기보다는 억지로, 마지못해 주는 것이지요.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연말이 되거나 절기가 돌아오면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아마도 인사치레가 가장 많은 교회 절기 행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인 것 같습니다. "매년 선물을 주었으니 올해도 기대할텐데, 무엇을 주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기꺼이 주는 선물은 하나의 안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마지못해 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닙니다. 이름만 선물이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런 선물은 '역병'이요 '저주'라는 겁니다. 마지못해 주는 선물이 왜 저주에 가까운지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못해 주는 선물은 선물이라기보다 주는 자가 얼마나 재물에 매여 있는지 입증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암탉이 알을 품고 있듯 재물을 품고 있는 겁니다. 아니, 더 심각하게 말하면, 마지못해 선물을 주는 자에게 위선자의 설명은 오히려 구원에 가깝지요. 왜냐하면 그게 재산을 지키는 방법이니까요.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하나님께 드린 선물(고르반, 막 7:11)"이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부모님께도 주기를 꺼려했습니다. 이런 거룩한 선물로 인해, 그들이 주기를 꺼려하고 재산을 지킨 것을 거룩한 행동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위선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지못해 주는 자에게는 이런 위선자의 설명은 굉장한 희소식이요, 복음에 가깝습니다.

주기 싫은 것을 억지로 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키에르케고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재물은, 당신이 섬기는 신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몰랐습니까? 당신은 재물의 생각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때 재물이 당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은 재물을 보호하는 데 바쳐졌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선물일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마지못해 주는 선물은 그가 섬기는 신이 '재물의 신'임을 입증할 뿐입니다.

영적 선물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은사들을 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기 원하지요. 통변의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등 온갖 신령한 은사를 다 받기를 원합니다. 마치 구두쇠가 재물을 끌어모으듯, 온갖 신령한 은사들을 다 끌어모으기 원합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은사는 하나님께 거저 받는 선물인데, 거저 베풀었는지요? 현실은 좀 막막합니다. 조금이라도 신령한 은사를 받는 사람들에게 기도를 받으러 가려면, 언제나 헌금을 준비해야 하지요. 하나님은 거저 주셨는데, 우리는 언제나 돈으로 환산하지요. 헌금이라도 말입니다!

정말로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거저 은사를 베푼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의 시험은 바로 이겁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영적 권위를 누리기 원합니다. 누구보다 영적 권위 있는 자라는 것, 심지어 '사도'라는 칭호로 대우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 권위를 누린다 한들,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 책망들을 만한 일만을 저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분명 이 말씀은 독자, 당신의 의도가 정말로 선했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의도가 기쁨의 표현이 아니었다면, 당신의 선물이 '재물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만을 입증한다면, 차라리 당신의 선물을 갖다 버리십시오. 당신의 영혼을 지치게 하고, 당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던 그 재물을 갖다 버리십시오. 왜냐하면 그 값은 저주니까요.

그리고 이 땅에서 당신의 처지가 바뀔 때까지, 당신의 상황과 당신의 주변 환경이 바뀔 때가지 그리 하십시오. 그리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서 구걸하고 있는 유일한 자가 될 때까지 그리하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온갖 좋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온다(약 1:17)"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주고받는 어떤 선물도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선물만이 선하고 완전합니다. 우리가 주고받는 어떤 선물도 선과 완전성을 창조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선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위에 있는 선물만 활용할 뿐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재물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당신의 재물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마음 먹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열두 명이나 더 되는 천사를 보내어 인간들을 섬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마 26:53).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재물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마치 욥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거저 주었던 것을 다시 가져가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과는 전혀 다른 지혜를 배웠습니다. 즉 선하고 완전한 선물은 위에도 아래에도 없다는 것, 선물은 주는 자와 받는 자의 차이만 발생시킨다는 겁니다.

당신의 선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선물은 선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당신의 선물은 차이와 차별을 제거하지도 못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재물을 나눈다 하더라도, 거저 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평등을 획득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키에르케고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당신이 가진 것이 불의한 재물이라면, 당신의 손이 더렵혀졌다면, 당신의 선물은 신성모독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장물아비입니까? 당신은 훔친 것을 거저 주었습니까? 불의한 재물을 소유한 당신은 정확히 재물이 누구에게 가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모릅니다. 아마 당신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의 것을 주는 방법을 모르는 당신, 당신은 어떻게 좋은 선물이 위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키에르케고어의 저 말은 기꺼이 주지 못하는 자의 상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가진 모든 재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인정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거저 준다 해도 이런 인정이 없다면, 불의한 재물, 훔친 재물로 선물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주는 자의 의무로, '돌려받지 않는 선물'에 대하여 나누겠습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