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이신칭의는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해주시므로 하나님 자신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신칭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단지 예수를 믿는다고 누구를 의롭다 해주시면, 자신의 공의를 손상시키는 자해 행위를 하는 것이기에, 결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은혜의 종교라지만 믿음으로만 의롭다 해주는 것은 종교적 통념으로도, 일반의 상식과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지적이 전혀 일리가 없지만은 않습니다. 성경도 믿는 자를 의롭다 해주는 것은 사람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 점이 기독교가 세상 종교와 구분 되는, 기독교만의 독특한 구원 경륜이기도 합니다.

이신칭의가 하나님의 공의를 손상할 수 없음은, 이신칭의를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주셨다는 사실 때문이며, 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세운 칭의 언약은(고전 11:25), 이신칭의를 합법적으로 만듭니다.

오히려 만일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칭의 언약에 인간의 의가 더해진다면 오히려, 그것은 이중과세가 되어 불법이 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주시는 일이 가능했고, 이신칭의가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내게는 영원한 의가 있다(The Everlasting Righteousness)』는 저서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청교도 설교자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7)도 같은 논조로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의 죄책을 용서하고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취소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 만일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받아 주시는 것은 의롭지 못했을 것이며, 죄인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이 사실은 불의하고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을 보여 줌으로써 죄인의 양심을 만족시킵니다."

바울은 더욱 강경한 어조로 오직 복음에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롬 1:17),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해 주실 때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롬 3:26)고 말씀했습니다. 『생명으로의 초대(This we believe)』라는 저서로 잘 알려진 케빈 밴후저(Kevin J. Vanhoozer)는 이 바울의 말을 더욱 구체적으로 풀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당신 자신도 의롭게 하시는 것이다. ... 십자가의 그림자를 통해 예수님께서 근거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셨던 것처럼(롬 4:1-8) 당신의 온전함을 손상시키지 않고도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게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예수님의 죽으심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롬 3:26)'이다."

다음으로 믿음의 의가 완전한 의(義)가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받으시고 의롭다 해주신다는 것은,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믿음에 약속돼 있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으시고 의롭다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義)를 수납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수납하실 때 만족하시고 분노를 푸십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Horatius Bonar, 1808-1887)가 믿음이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유대관계를 맺어주고, 믿음에 약속돼 있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우리를 참여시킨다고 말한 것은 '믿음과 칭의'의 관계에 대한 진일보된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가 비록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의 믿음이 비록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의를 행한 자로 여긴다. ... 믿음은 일로서, 도덕적인 행위로서, 하나의 선행으로서, 혹은 성령의 은사로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우리와 대속자 사이의 유대 관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한다. ... 믿음이 결코 우리의 의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의로우신 분과 하나로 엮어 줄 뿐이다. 그리고 우리를 그분의 의의 동참자로 만들어 준다."

이처럼 믿음의 의가 율법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우리는 믿음의 의(義)를 고집하고, 유대인들처럼 행위에 의지하여 걸려 넘어지거나(롬 9:32), 저주에 빠뜨려질까(갈 3:10) 노심초사합니다.

바울이 과거 유대교인이었을 때 자신이 그렇게 소중히 여겼던 율법적 의(義)를, 그리스도를 믿은 후 배설물로 여긴 이유도, 율법을 의지하다가 '믿음으로 난 하나님의 의'를 놓칠까 해서였습니다(빌 3:8-9).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진 의(義)의 언약은(고전 11:25) 인간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순간, 파기되고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끊어집니다(갈 5:4).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배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는 것처럼(마 9:16) 하나님의 의를 무산시킵니다. 율법적 행위를 의지하는 순간 율법 전체를 준수할 의무가 그에게 지워지고(갈 5:3)-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자가 없기에-정죄에 빠집니다.

칭의유보자들은 이신칭의를 버리고, 윤리를 칭의의 조건으로 내걸므로 스스로 율법의 정죄 아래 들어갔습니다. 5백년 전 루터(Martin Luther)가, 로마천주교가 인위적인 경건을 만들어 낸 이유를 이신칭의를 버린 때문이라고 책망한 것은 오늘 칭의유보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이신청의를 없애 버리지만 않았다면, 교회는 수사단이니, 성지순례니, 미사의식이니, 성인에게 드리는 기도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제 교회가 다시 한 번 본분을 잃어버린다면(그러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런 우상들은 또 다시 찾아올 것이다." 물론 5백년 전 로마천주교는 의식(ceremony)을 첨가했다면 오늘 그들은 윤리를 첨가했습니다.

믿음의 의(義)는 칭의유보자들의 주장대로 우리에게 단지 의의 기초만 제공해 준 것이 아니라, 루터의 말처럼 우리를 하나님처럼 만들어주는 완전한 의를 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받은 의가 완성된 의가 아닌, 나머지는 우리 손으로 완성시켜야 할 기초적(basic) 의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실은 의를 받은 것이 아닌 심판을 떠안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을 완성할 육체가 없기에(롬 3:20), 율법의 지배아래 들어가는 순간 정죄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의를 말할 때 '율법적(행위적) 의'와 '믿음의 의'로 구분 짓고, '율법적(행위적) 의'를 심판의 의로, '믿음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지칭한 것은(갈 3:21-22), 율법은 정죄를 낳고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갖다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의를 거부하고 율법적(행위적) 의를 주장하는 자는, 의롭게 되려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소가 푸줏간으로 들어가듯이 어리석게 스스로 형벌의 자리로 들어간 것입니다.

또한 이신칭의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전하다는 것은 증거한다는 것을 말하고싶습니다. 즉 믿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을 때 보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완성자 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역설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바울은 여기서 이신칭의와 율법의 완성을 직결지웠습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것은 칭의유보자들의 공격처럼 구원을 값싸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완성자 되심을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루터는 종교개혁 당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자신의 '이신칭의'교리가,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자주 곡해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을 붙여-"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라고 말하게 하므로-믿음이 칭의의 공로가 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루터의 이신칭의가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며, 그리스도만을 높이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이신칭의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함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누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지 못하고, 자신의 의가 첨가돼야 한다고 강변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가치롭게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높이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바울도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갈 2:21).

그리스도가 대속자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의를 첨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표리부동입니다.    

조엘 비키(Joel R. Beeke)는 "만약 내가 심판 날에 값없이 주신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지 않는다면, 친구들이여,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그분의 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으면 나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의의 심판의 기준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취하실 때만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 죄인의 의는 "낡아지는 옷" 같아서, 그것에서는 하나님이 취할 영광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닌 오직 믿음의 의만을 드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의가 사람들 보기에는 대단할지 모르나 하나님께 내어놓기 민망할 뿐이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의만을 내어놓습니다.

조엘 비키는 하나님이 믿음의 의만을 취하시는 이유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신칭의는 단지 내 구원의 문제가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성령께서 주신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영광을 다시 찾으십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위대한 특징은, 오직 은혜로, 오직 그리스도로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네번째 이자 마지막 주제 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전문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이신칭의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