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역사란 무엇인가?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와 문체부 장관의 유사역사학 논란
반일 이데올로기 합리화 위해 부패·전근대적 조선 미화하기도
세계 어디에서도 폐쇄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이념 승리 못해
우리나라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철 지난 이념에 목 매야 하나
대통령의 가야사 복원 지시와 도종환 문체부 장관 후보자의 유사역사학이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E. H. 카)'라거나, '과거를 기억 못하는 이들은 과거를 반복하기 마련이다(조지 산타야나)'라는 등, 근엄하고 위선적인 경구들이 많이 있지만, 한국에서 역사란 진영 투쟁의 무기에 불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앎-권력의 철학자 푸코는 이미 역사란 객관적인 과학이 아니라 한 계급, 혹은 한 세력의 이데올로기 투쟁의 도구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전쟁 또는 여러 세력들 간의 싸움을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현재의 힘의 관계를 수정하는 틀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적 담론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은 현재 자기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고, 역사의 진실을 독점하는 것은 현실 파워 게임에서 결정적으로 전략적인 고지를 점유하는 지름길이다. 국가의 정통성을 밑바닥에부터 갉아 허물어뜨리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도 역사다.
현재 우리 사회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는 386세대가 1980년대 초 골방에서 읽고 탐독했던 반(反) 자본주의적이고 친(親) 북한체제적 이념들이 지금은 어엿하게 교과서 속으로 들어와 학생들에게 공개적으로 교육되고 있다. 다만 그 때의 핵심 개념이 식민지 수탈론이었다면 지금은 친일파와 종군위안부 문제로 무게 중심이 바뀌었을 뿐이다. 친일파 논쟁은 역사 문제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무기다.
그러나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 일제시대 한국인들은 신분제가 폐기됐고, 근대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임금과 소득이 높아졌고, 상업 거래가 활발해 졌다. 상업의 발달은 당연히 도시의 발달을 재촉하여 서울, 부산 등의 대도시와 군산, 원산 등 항구 도시가 발달하였다. 사람들은 더 부지런해졌고, 신용의 개념도 생겨났다. 비록 일본이 식민지 경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펼친 정책이었다 해도 영민한 한국인들은 이것을 기회 삼아 근대적 의식을 싹 티운 것이다.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인데, 좌파가 경련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것은 발설하기만 하면 집단 린치를 당하는 위험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러나 친일을 문제 삼기 전에 조선말의 학정과 수탈을 생각해야 하고, 과거보다 나아진 생활 조건 속에서 일제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내면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식민지 경험을 근대화의 기회로 삼았다는 것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일 뿐, 결코 모욕적인 이야기가 아닌데 말이다.
반일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부패하고 전근대적이었던 조선을 미화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도 일어난다. 구한말의 왕과 지배 세력이야말로 나라를 빼앗긴 책임이 있는 사람들인데, 안중근 의거를 고종이 배후에서 도왔다느니, 안중근의 변호사 선임 비용으로 고종이 거액을 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이어지고, 민비는 일본에 의해 희생된 '조선의 국모'로 추앙된다.
그러나 자료에 의하면 당시 일본 총리대신의 연봉이 1만엔 수준이었을 때 조선의 마지막 왕실은 일본정부로부터 연간 180만엔의 품위유지비를 받았다. 180만엔으로도 부족하여 왕실은 자기들 소유의 임야를 팔고,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개조해 연(年) 4만-5만엔 수준의 입장료 수익을 챙겼다. 백성에 대한 죄의식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는다.
해방된 지 어언 72년, 좌파 진영은 아직도 <친일인명사전>을 바이블처럼 뒤적이며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가 단 한 군데서도 채택되지 못하도록 그들이 얼마나 끈질긴 물리력을 행사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반미, 반(反) 국제주의, 자주국방 등을 표방하는 그들의 모습은 한없이 퇴행적이고 폐쇄적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좌파의 뿌리가 구 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 수구파(守舊派)에 있다는 강규형 교수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하지만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폐쇄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이 승리하는 곳은 없다. 우파의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념이 당당하게 세계사적 흐름을 타고 있다. 프랑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사회당은 처절하게 몰락했다. 신당을 창당하여 노동시장 유연화와 법인세 인하(33%에서 25%로)를 약속했던 마크롱 대통령의 정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우리만 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철 지난 이념에 목을 매고 있을까?
박정자(상명대 명예교수)
사학자·철학자·번역가. 이화여고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불문학 박사를 받았다. 한국에 처음으로 푸코를 소개했고, 푸코의 전기 『미셸 푸코』를 비롯해 푸코의 저서를 여러 권 번역했다. 조선일보 기자, 상명대 불어교육과 교수와 사범대 학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상명대 명예교수이다.
주요 저서로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빈센트의 구두』,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시선은 권력이다』, 『마그리트와 시뮬라크르』, 『이것은 Apple이 아니다』, 『마이클 잭슨에서 데리다까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