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6월 28일자 최갑종 교수의 개혁신학회 기조발제 '강한 윤리적 메시지 담은 칭의 강조할 필요 있다'는 본지 기사를 읽고, 독자들과 필자가 담임하는 교회 성도들이 갖게 될 칭의에 대한 혼란을 덜어주려는 목회적 관점에서 쓴 것이다. 최갑종 교수 개인에 대한 신학적 비판이 아님을 전제한다. 필자가 언급하는 내용은, 기자가 본지에 올린 내용에 제한됨을 밝혀둔다. 기사(따옴표 내)에 대해 조목조목 논평하는 형식을 취할 것이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1. "바울에게 있어 칭의는 하나님 나라처럼 '이미'와 '아직'의 양면성을 가진 종말론적 실재이다. 사실상 바울은 여러 곳에서 최후에, 행위에 따른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칭의의 윤리가 '이미' 주어진 칭의와 장차 주어질 최종적인 칭의와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 칭의를 정의함에 있어 '이미와 아직'이라는 변증법적 용어롤 동원해, 현재적 하나님 나라와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로 빗댄 것은 부적절하다. 교회 공동체(눅 17:21)와 성도 안에서 성령으로 경험되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롬 14:17)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부분적인 맛봄(tasting)이고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진 칭의는, 맛보기나 그림자가 아닌 완전하고 또한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적 칭의를 받은 자가 종말에 기대하는 것은, 그가 말하는 또 다른 칭의가 아닌 칭의의 만개(full bloom), 곧 영화이다(glorifing, 고전 15:51; 요일 3:2). 재삼 강조컨대, 현재적 칭의의 종말론적 구현은 칭의가 아닌 영화(glorifing)이다.

2. "사실상 바울은 여러 곳에서 최후에, 행위에 따른 심판이 있을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칭의의 윤리가 '이미' 주어진 칭의와 장차 주어질 최종적인 칭의와 무관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 칭의유보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여기서 상급 심판(마 10:42; 갈 6:9)은 말하지 않고, 윤리(행위)를 기준으로 한 칭의 심판에만 주목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선행이 칭의에 소용돼야 하기에, 상급을 유발할 잉여선(剩餘善)의 축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종말에 칭의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와, 고급 칭의를 받느냐 저급 칭의를 받느냐에 한정돼 있다. 이는 개신교의 상급론이라기보다 로마가톨릭의 상급론에 가깝다.

3. "칭의의 과거와 미래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것처럼, 칭의의 현재(윤리)도 인간의 일이나 신인협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그분의 사역이다."

→ 그는 처음에 '칭의가 신인협력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그분의 사역'이라고 말함으로써, 앞의 말을 즉시 부정해 버린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간다'는 말은 칭의를 '미완료'형의 현재진행형, 신인협력형으로 만든다. 이는 성령을 통해 칭의가 사람 안에서 이뤄질 때 사람의 반응과 협력이 필수불가결하게 되고, 그 반응과 협력 여부로 칭의의 성공 실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기존 개혁주의 신학에서 칭의에 대한 성령의 사역은 칭의의 적용에 관한 것이지, 지속적 협력 개념이 아니다.

4. "바울에게 있어 칭의는 이미 주어졌고 이뤄진 과거의 사건인 동시에, 지금 여기서 계속해서 주어지는 현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장차 주어질 미래적인 사건이다.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후계자들이 바울서신에 나타난 칭의의 과거적이며 단회적인 측면을 발견하고 강조한 것은 분명 칭찬할 만 하지만, 바울이 신자의 삶 전체와 관련돼 있는 칭의의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강조하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의 단회성과 즉각성을 말한 것은, 칭의의 근거인 단번에 성취된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속 때문이다. 칭의가 종말 때까지 지속되지 못한다면 칭의의 기반인 구속은 영원한 것이 못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계속 피를 흘려야 한다. 만약 그의 말대로 구속의 열매인 칭의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칭의만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칭의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구속도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칭의의 효력이 일시적일 수 없음은, 칭의의 기반인 그리스도의 구속이 영원한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구속이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가 구속을 위해 흘린 피가 영원하기 때문이다(히 13:20; 10:12; 9:12).

그리고 그는 칭의가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삶 전체와 연관지어져있기에 미래의 칭의에 대해 낙관할 수 없다는 점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미래의 칭의가 연약한 성도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말한다(고후 1:10).

개혁신학회
▲최갑종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안명준 교수 제공
5. "칭의 안에는 신학적인 문제만이 아닌 윤리적인 문제도 포괄하고 있다."

→ 칭의가 신학적 문제를 포괄하고 있다 함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반한다는 뜻이고, 칭의가 윤리적 문제를 포괄한다 함은 칭의에 인간의 윤리적 책임이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가 칭의가 신학적·윤리적 문제 모두를 포괄하고 있다고 한 것은, 칭의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인간의 윤리로 완성된다는 말로써, 신인협력설의 전형이다.

6. "바울에게 있어 칭의는 법정적인 동시에 관계론적이다. 바울서신에서 칭의라는 어휘는 법정적인 면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예수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관계론적인 면도 있다."

→ '칭의는 법정적인 동시에 관계론적'이라는 말은,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화)로 완성된다는 뜻이며, 이는 칭의를 지속적이고 신인협력적인 것으로 만든다.

'칭의는 예수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관계론적인 면도 있다'는 그의 말에는, 칭의가 믿는 자를 하나님 자녀로 나게 한다는 '출생' 개념보다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킨다는 '관계' 개념을 설정한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 자녀됨을 관계 개념으로 몰아가는 인상을 받는다. 하나님 자녀는 그리스도를 믿어 단번에 거듭남으로 되는 것이다(요 1:12; 갈 3:26). 하나님의 자녀됨은 관계 속에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출생에서 확인된다.

7. "이런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 칭의와 성화를 서로 구분해 마치 서로 별개의 것처럼 말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즉, 구속은 성부의 사역, 성화는 성령의 사역, 칭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등식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구속, 성화, 칭의 모두가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한 구원사역이라는 것이다."

→ 개혁주의에서도 구속, 칭의, 성화를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말하지, '구속은 성부의 사역이고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며 칭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이라고 구분짓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구속, 칭의, 성화를 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와 다르다. 그가 칭의를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성도 안에서의 성령의 현재적인 사역이라고 말하는 배경에는, 앞서 언급했듯 칭의를 지속적인 미완료 현재진행형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전통적인 '구속, 칭의, 성화'의 순서를 무시하고 '구속, 성화, 칭의'의 순서를 취한 것에서도, 성화를 칭의의 조건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8. "그러면서 그는 바울의 칭의와 성화를 다음에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했다. 바울은 칭의와 성화 어휘를 엄격하게 서로 구분해 마치 별개의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용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동일한 구원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즉 칭의는 구원의 법정적인 면을, 성화는 구원의 제의적인(cultic) 면을 말하고 있다. 즉, 둘 다 바울 복음의 구원의 특징을 설명하는 그림언어이다."

→ 그가 칭의를 성화와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그에게 이 둘이 엄격하게 구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화가 칭의를 이루는 수단 혹은 칭의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칭의와 성화가 하나로 믹서 돼 버렸기에, 둘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것은, 칭의는 뿌리이고 성화는 열매라는 두 지위의 특수성 때문이다. 성화(열매)는 칭의(뿌리)로부터 나오고, 칭의(뿌리)는 성화(열매)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가 언제나 칭의를 성화에 앞세우게 한다.

'칭의는 구원의 법정적인 면이고, 성화는 구원의 제의적인(cultic) 면 이란 말 역시, 칭의와 성화를 구원을 이루는 두 요소로 본다는 말이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는 구체적 방법은 칭의의 법정적 요소와 그 법정적 칭의를 지속적으로 구현해 나가는 제의적(cultic) 성화를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 역시 그의 구원론이 지속적이며 신인협력적임을 증거한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닌(롬 3:20),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은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개혁신학회
▲학회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9. "바울의 칭의 어휘는 법정적인 의미만 아니라 관계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의 관점에서 강한 윤리적인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 칭의를 '관계론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 칭의가 이루어지고, 그 칭의가 종말의 때까지 유지될 때 최종적인 칭의를 받는다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리스도의 구속(칭의)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진다는 성경 말씀을(롬 5:1; 5:10) 부정한다.

10.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윤리적 메시지를 성화 교훈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칭의 교훈에서 찾아야 한다. 사실 종교개혁 시대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해 인간의 윤리와 선행을 필수적인 요소로 부각해, 한편으로 공로주의가 득세하고, 다른 한편으로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유일성이 크게 훼손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라는 개신교의 신학이 정착될 수 있었다."

→ 그는 윤리와 선행을 칭의의 필수적 요소로 부각하는 종교개혁시대에 공로주의를 배격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임을 견지하려고 하다 보니,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라는 개신교의 신학이 정착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만한 위험 인자가 없기에 칭의 교훈에서 윤리적인 메시지를 찾아도 된다고 주장한다.

궤변에 가깝다. 신앙이 공로주의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오해의 소지를 일으킬 만한 환경 때문이 아니라, 선포되는 말씀의 내용 때문이다.

종교개혁시대건 지금이건, 칭의에서 윤리적 메시지를 찾으면 공로주의가 되고, 이신칭의를 말하면 복음주의가 된다. 이는 오해의 문제가 아닌 '팩트'의 문제이다. 칭의에서 윤리적 메시지를 찾으면서 공로주의가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한들, 공로주의가 안 되는 것이 아니다. 공로주의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칭의에서 윤리적 메시지를 찾지 말고 믿음을 찾아야 한다.

11. "이러한 종교개혁 신학을 오해 내지 오도해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윤리 없는 값싼 복음, 십자가 없는 값싼 은혜로 만들고, 신앙과 삶, 신학과 윤리를 나누는, 그래서 교회의 비윤리성과 부패를 방조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미 강한 윤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적 칭의 교훈을 새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 이신칭의가 값싼 복음이라는 말은 칭의를 모독하고, 나아가 이신칭의를 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값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한 것은, 칭의가 하찮아서가 아니라 너무 고귀해서 낡아지는 옷 같은 인간 선행을 그리스도의 의에 덧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불완전한 의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에 덧대는 것은, 생배조각을 낡은 옷에 덧대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을 망치게 한다(마 9:16).

바울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인간의 불완전한 의를 덧대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든다고 했다(갈 2:21).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신 것은 구원이 싸구려인(valueless) 때문이 아니라, 값을 치룰 수 없을 만큼(priceless)  너무나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비윤리성과 부패를 방조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미 강한 윤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적 칭의 교훈을 새롭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바울이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윤리적 강조를 해야 한다고 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그 자신이 복음의 사람이었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복음뿐이라는 것을 그는 간파했기 때문이다. 골로새교회를 향한 그의 권면을 보자.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결론

최갑종 박사의 칭의론에는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폐지되고, 성화는 칭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의적(cultic, 칭의를 구현하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의 칭의는 단회적이고 종결적인 것이 아닌 평생 동안 계속되는 관계성과 지속성을 특성으로 하고, 모든 교리를 풀어감에 이 지속성, 관계성과 연관지운다.

'칭의'와 '하나님과의 화목'도 이 지속성과 관계성을 통해 검증받는다. 그러다 보니 화목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가 자리할 곳이 없어지고, 전통적인 칭의, 화목의 순서도 뒤바뀐다. 지속성과 관계성에 과도히 몰입하는 것은, 주관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경건주의, 신비주의의 특성이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