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24장 개인무의식으로서 콤플렉스(2)

콤플렉스는 의식과 무의식에 두루 관여되지만, 무의식에 더 많이 작용되는 측면이 있다. 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조절이 가능하지만, 무의식에서의 조절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콤플렉스는 인격의 내면의 깊은 데서부터 특이한 존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 콤플렉스를 다시 무의식의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개인적인 것이 더 많이 관여된다고 볼 수 있다. 콤플렉스는 후천적인 특성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측면에서다.

1. 콤플렉스의 긍정적인 측면

콤플렉스에는 전술한 대로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콤플렉스가 인간 내면에서 긍정적으로 정신을 자극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산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콤플렉스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할 수 있다.

1) 창조적 신생으로서 콤플렉스

콤플렉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창조적 신생(新生, Neubildungen)의 내용을 말한다. 이는 콤플렉스가 의식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율적으로 활동하는 특성이라는 데서 이해된다. 이것은 콤플렉스가 때로 예술이나 종교적 이상에 인격화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내면에 내재된 강한 잠재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자극 받을 권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블로그나 공개세미나 등 홍보를 위한 배너 이미지를 만드는 것을 자신이 직접 하거나 이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포토샵(Photoshop)을 이용한다. 이는 꼭 필요한 사용법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배너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디자인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 또 색상이나 폰트 그리고 이미지의 배치 등등을 위해 수많은 디자인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것들은 이미지를 스크랩해 두어 필요할 때마다 보고 이를 통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배너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는 형태이다.

이것과는 달리 콤플렉스는 내면의 자극원이 정신에 작동하여 의식의 영역으로 투영되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융의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융은 콤플렉스의 창조적 신생에 대하여 "마치 어머니가 그녀의 아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오직 인내와 고통으로 이 세상의 밝은 곳으로 보낸다. 이처럼 그렇게 창조적인 내용도 의식의 수용적 준비태세에도 불구하고, 결코 억압됨 없이 오랫동안 무의식 속에 버티고 있게 되는 것이다"고 표현한다. 자유로운 창의성이 무의식에서 자연스럽게 의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2) 창의성의 원동력으로서 콤플렉스

일반적으로 창의성을 논할 때는 대개 자신만의 생각을 해야 하고 이를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통한 다양한 미디어들과 인터넷을 통한 수많은 영상만을 보게 되는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단 기간 내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자신만의 깊은 생각을 할 기회를 잃을 수 있게 된다고도 말한다. 따라서 책을 가까이 하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책들을 읽고 스토리를 상상하여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위적인 창의성을 말하는 것이다.

반면 콤플렉스는 깊은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로 비유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의 깊은 곳에서 발원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콤플렉스는 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콤플렉스는 억압된 것이기에 의식되기 쉽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의식되기 쉬운 이질적 내용일 수도 있다. 이런 콤플렉스는 의식과는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때로는 개인은 이러한 콤플렉스의 특성에 자극받아 남다르게 창의적인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위대한 업적이나 훌륭한 작품을 남긴 사람, 종교적으로 뛰어난 모본을 보인 사람이 모두 이러한 콤플렉스의 창조적 영감과 충동의 근원에 사로잡힌 경우가 된다. 이 완전한 충동은 강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적으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의 경우도 이와 같다.

3) 예술작품을 가능하게 만드는 콤플렉스

인간은 좋은 영감을 얻으려 노력한다. 물론 영감을 얻는 것은 공부만을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들 말한다. 물론 기본적인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현실에 가장 잘 맞는 것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분야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에서 창출됨을 강조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가급적 많은 것들에 대해 부딪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일반적인 창의성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런가 하면 창의적 발상을 위해서는 일정한 틀이 없다는 것도 주지시킨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모든 틀을 깨야만 한다는 것이다. 고정관념 또한 깨끗이 버리고 머리를 비우고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것들을 그냥 쏟아내라고 한다. 그 가운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만들어 낼 것이며, 이 결과물로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것은 어느 정도 내면에서 나오는 콤플렉스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에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콤플렉스는 정신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숭고한 미(美)와 그에 상응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고자 주변과의 접촉을 단절한 채 의식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마지막 몇 해 동안을 예술에 바친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좋은 예가 된다. 고흐는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건강, 생명까지도 그림을 위한 희생으로 삼았다. 융은 예술가의 이러한 특징을 '무자비한 창작충동'이라 말한다. "예술가는 여느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을 보람 있게 살게 하는 모든 것과, 모든 행복을 희생으로 삼을 운명을 걸머지고 있다." 아름다운 미(美)에 사로잡힌 예술가들, 이를 테면 문학가, 미술가, 음악가들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2. 꿈과 병리적 증상에서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꿈을 만드는 요소로서 꿈의 생성과 관련되고 있다. 이것은 콤플렉스가 꿈을 만드는 주체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할 수 있다.

1) 꿈에서 인격화되는 콤플렉스

꿈에 나타나는 어떤 인물은 자신의 콤플렉스의 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콤플렉스는 우리의 꿈에 나타나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꿈에 나타나 행동하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콤플렉스가 인격화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개인의 무의식에서 잠재하던 콤플렉스가 인격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때 콤플렉스는 꿈에서 현실의 갈등을 그대로 나타내주며, 반영하는 거울로서 갈등의 소재를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꿈에 나오는 여러 상(像)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무의식적인 콤플렉스'이며, 심지어는 꿈속의 나(dream ego)조차도 하나의 콤플렉스이다.

꿈은 무의식을 표현하는 통로이다. 꿈이란 무의식의 표출이자 현실의 반영이다. 이는 꿈이 콤플렉스의 표출이라고 하는 점에서 본다면, 꿈에 나타나는 사람은 자신의 반영일 수 있다. 누가 꿈에 "돈을 헤프게 쓰고 공연히 자기를 내세우고 남을 무시하는 소위, 휘두르는 태도나 행동을 취하는 친구"의 꿈을 꾸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것은 그 친구의 일면일지 몰라도 동시에 꿈꾼 사람의 무의식 속에 있는 그런 특징을 가진 자기 자신의 콤플렉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분석심리학에서는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가 꿈의 자아에 대하여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으로 표현한다. 나의 자아에 손을 내미는 것은 곧 나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인데, '나'는 이를 거절하거나 외면하고 있음을 나타냄이다.

2) 외계의 실체로 인정되는 콤플렉스

융은 심리학적 실험으로 꿈과 콤플렉스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는 원시인의 예를 들어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콤플렉스는 심리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외계의 실체처럼 여기며 그들은 이를 악령(Daemon)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꿈에 나타나서 자기를 찾아오며, 심지어는 자기를 헤치려는 어떤 움직이는 형체는 악령의 일종으로 본다. 이는 실로 무의식속에 잠재하던 것이 꿈에 나타나 행동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정신적인 사실과 현실세계의 구별을 못하는 데서 오는 결과인 것이다.

그러기에 수많은 귀신으로 가득 찬 원시인의 우주관은 바로 콤플렉스로 가득 찬 그들의 무의식계를 반영하고 있다. 융은 '콤플렉스론'에서 이를 혼령신앙이라 명명하고 그리고 이 "혼령신앙은 무의식의 콤플렉스구조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진술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원시인들이 혼령의 세계, 즉 악마가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믿는 이런 세계를 꿈에서 경험한다. 그것은 때로 악몽이 되어 잠을 깨우기도 하며, 그 꿈은 사람의 인격 속에 영향을 주어 괴로움과 불안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리고 교인과 귀신의 꿈에 시달리는 경우처럼 사람을 시달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치료 시에 꿈을 분석하고 해석해내는 과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이와 깊은 관련을 갖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런 꿈으로 불안증세가 심화되면, 정신병의 일종으로 취급된다. 다만 환자들은 이런 콤플렉스를 원시인이 크게 소리를 내어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를 꿈에 어떤 소리를 듣는다는 환청(幻廳)이라 일컫고 있다. 이 환청은 융에 의하면 무의식에서 잠자던 콤플렉스가 소리를 낸 것이다. 아울러 꿈에 무엇을 보았다는 인상이 강하게 그를 붙들어 영향을 주는 환시(幻視) 역시 콤플렉스의 형상화인 동시에 외계로의 투사라고 본다.

3) 병리적 증상의 요인으로서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노이로제와 관련된다. 콤플렉스의 노이로제와의 관련성은 그 증상의 유발원인과 관계된다. 노이로제의 증상을 만드는 것도 콤플렉스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신경증(神經症, Neurose)이란 융에 의하면 알 수 없는 마음의 고통, 즉 그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마음의 병고(病苦)이다.

신경증 환자, 노이로제 환자는 자신이 마음의 고통을 왜 당하는지, 그리고 그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나는 암에 걸린 것 같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서 자기의 할 일을 제대로 해 나갈 수 없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암이 걸렸다고 하는 공포심과 강박관념은 해도 소용없는, 불필요한 생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일소에 붙일 수가 없다. 그런 마음의 고통은 당사자인 그 사람에게는 지극히 생생하고 또한 참기 어려운 고통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런 생각이 쓸데없는, 부질없는 것임을 당사자 자신이 알면서도 이를 지워버리거나, 없이 해 버릴 수가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런 이유로 노이로제 환자는 그런 생각을 없애만 준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치료자에게 호소한다. 이런 증상을 일반적으로는 자기의 정신이 분열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으로 '정신분열증, 혹은 정신분열상태'라고 일컫고 있다.

이 노이로제에 대하여 융은 이렇게 말한다. "노이로제는 내적인 해리, 자기 자신과의 내적인 분단이다. 이러한 분단을 강화시키는 것은 모두 병을 만든다. 이것을 완화시키는 모든 것은 그를 건강하게 한다. 마치 파우스트(Faust)가 '두 마음이 살고 있다. 아, 내 가슴에!'하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이처럼 정신분열증상은 모두 마음의 고통을 수반한다. 이는 자기 자신(Selbst)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을 때 발생되는 현상인 바, 일종의 자기소외의 결과인 것이다. 자아(Ich, Ego)가 자기 자신(Selbst, Self)과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인격의 해리, 즉 분열을 일으키는 위험은 커진다. 그러기에 노이로제의 고통은 자신과 통일되게 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요, 또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곧 치료이다.

융은 이 노이로제를 심각한 병리적 현상으로서만 아니라, 오히려 인격의 변화, 성숙,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고 있다. 바울이 절규하여 영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 무엇보다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현상론적으로 본 것이다. 당사자가 얼마나 건강한 사람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이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생각이 깊은 사람이 노이로제적인 증상을 보이는 것과 건강치 못한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우울증상과 관련시켜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개 우울증상은 의식에서 이용할 만한 정신적인 에너지가 고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어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세계가 큰 세력을 가지고 의식을 압박하는 상태이다. 이때 환자가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 자살충동 같은 관념은 자아의식이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 때문이다. 이 경우 자살충동은 낡은 자아가 죽고 새로운 인격으로 재생 및 거듭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울증상은 환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자기 안으로만 시선을 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혀 밖으로 향하지 못하는 그의 시선은 끝내 내적인 증상의 포로가 되어 불쾌감에 허덕이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러므로 노이로제를 자기상실, 의식에서의 에너지 상실, 자기의 균형을 잃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본능으로 부터의 이탈이라 표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콤플렉스는 개인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하는 일상적인 심리현상에서부터 정신 병리적인 현상에 이르기까지 만든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콤플렉스의 작용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는 노이로제의 발생, 그 치료가 콤플렉스의 성격과 특징을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이유이다.

3. 콤플렉스의 종류

콤플렉스는 다양한 종류를 갖고 있다. 콤플렉스는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다. 어느 누가 대화중에 얼굴을 붉히거나 말문이 막히고, 횡설수설하는 것, 갑자기 화를 내는 것 등은 모두 콤플렉스에 자극된 현상인 경우이다. 그리고 이러한 콤플렉스는 억압된 감정이나 열등감뿐 아니라, 인간정신의 전반에 관계되어 나타난다. 인간이 갖는 희로애락의 감정과 관련되는 것이기에 깊은 슬픔에 빠져 눈물을 흘리는 경우, 너무 기뻐 웃는 것, 즐거워하는 것도 모두 콤플렉스에 해당한다. 이런 콤플렉스의 종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열등감과 관련하여

콤플렉스란 의식을 자극할 때 불쾌한 감정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대개는 열등의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하지만, 강한 정감을 갖는 심리적인 세력이라는 점에서 보면, 인간의 강한 감정은 거의 콤플렉스와 관련되는 것이다. 다만 콤플렉스의 강한 특성 때문에 열등감이 주된 특징을 갖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열등감은 주로 학력, 지식, 직위, 생활, 인물, 출신 집안, 성적, 일등인가 아닌가, 건강, 신체 등과 관련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은 학력을 중요시한다. 그 사람이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는지, 대학을 졸업했는지, 또 그 대학은 어떤 대학인지 등을 따진다. 어느 나라든 간에 이런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의 경우가 심한 편이다.

뿐만 아니라 남자의 경우에는 사회적인 지위나 출세경향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런 현상은 어느 사회든 간에 존재하지만, 우리에게는 조금 심한 편이라는 사실을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다. 개인의 가치는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때로 그런 열등감에서 결정되는 수가 많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콤플렉스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은 바람직한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며, 자기분수에 맞고 자기능력에 맞는 생활을 중심으로 살아간다.

2) 모성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다양한 분야에 관계된다. 이러한 콤플렉스의 부정적인 특성과는 달리 거의 모든 것에 콤플렉스란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저 사람은 돈, 성(性), 미(美), 권력, 명예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그것에 집착되어 있거나 그것이 장애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콤플렉스는 그만큼 관여하는 분야가 많은 것이다. 특히 우리는 콤플렉스의 대표적인 현상의 하나로 '모친 콤플렉스'를 예로 들 수 있다. 모친 또는 모성 콤플렉스는 어머니가 그 마음에 중심을 차지하는 현상으로서 어머니에 의해 지배되는 경우이다.

모친 콤플렉스에 관계된 남성은 어머니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에 민감하다.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머니와 관련된 것을 화제로 삼고, 소설, 영화, 사건 등이 어머니와 관련된 것을 좋아한다. 이것이 심하면 그는 어머니의 기호와 흥미를 자기 것으로 삼기에 어머니를 모방하려는 심리가 발동된다. 그 결과로 그는 어머니의 친구에게 끌리고, 같은 또래의 여성보다는 손위의 여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흔히 '마마보이'나 결혼한 어른이 되어서도 '어머니에게 쥐어 사는 사람'이다.

3) 희로애락과 관련하여

콤플렉스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다양한 감정과 관계된다. 많은 열등의식이 콤플렉스를 이루고 있지만, 그렇다고 콤플렉스가 모두 열등의식과 관계되는 것만은 아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모든 감정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여기에 해당되고 있다. TV나 영화감상을 하면서, 그림감상이나 경치를 구경하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콤플렉스의 작용효과이다. 남의 일이라면 감동의 근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잃은 애틋한 경험이 있을 때, 그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보면 그런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도 같은 작용효과이다.

4) 고향 콤플렉스

한국인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 어릴 때 놀던 고향을 차마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니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더 남다른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유달리 정(情)이 많은 민족이어서 일까?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이기에 한국인은 고향을 떠나서 살다가 죽는 것을 객사(客死)라 한다. 자신의 고향에서 죽어야 하는데, 타향에서 손님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이 "아, 나의 고향!" 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고향 콤플렉스 때문이다.

특히 시골이 고향인 사람은 복잡한 도시의 생활에서 더욱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더 할 것이다. 이들은 일상의 바쁜 생활을 하다가 문득 고향생각을 하기도 하고, 명절이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더라도 고향을 찾는 행렬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쁜 생활에서도 고향생각이 날 때면, 마음만은 고향으로 향하곤 한다. 시골의 시커멓게 탄 장판에서 자반을 뒤집듯이 요리조리 뒤집다가 잠들면, 아침에 벌겋게 화상을 입기 일쑤고, 못 생기고 누런 메주덩어리 새끼줄 묶어 달아놓으면, 잠을 자다가 나무기둥 차서 자빠지고, 혹여 살이 데이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던 고향을 그리는 것이다.

따뜻한 아랫목엔 술 단지가 이불을 덮어쓰고 익어 가는데, 그 독하기는 소주를 능가할 동동주를 한잔 훔쳐 먹으면, 엄동설한에 벌거벗고도 춥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다. 제사 때에 쓰려고 할머니가 꼭꼭 숨겨놓은 꽂감, 홍시, 쌀뒤주 손을 집어넣어 살 한 움큼 내어 주머니 속에 살짝 넣어두어 씹을수록 단맛은 나는데, 생쌀을 먹으면 엄마가 죽는다는 어른들 말씀에 조금은 편하지 않은 마음도 있고, 내 몸보다 큰 지게 지고 목이 마르면, 응달 눈 퍼먹기도 했다. 짧은 겨울 한낮 금방 어둑해진 산속 길을 나무 한 짐 지고 내려오다가 겨울 내 언 땅속에 빨간 무, 배추 뿌리의 흙을 대충 털고 소매 옷에 대충 닦아 아작아작 씹던 맛을 그린다.

밤새 물댄 논에 꽁꽁 얼어 추운 아침에 외발 스케이트를 들고 나가서 키만큼이나 높은 창을 거침없이 찍어대면, 고급승용차가 부럽지 않다는 모양으로 누가 따라 올거냐고 얼음을 지치던 시절도 그린다. 보름달 휘영청한 추수 끝난 넓은 논에 지푸라기를 쑤셔 넣은 구멍 난 축구공에 고무신 새끼 묶고 선수처럼 뛰어 다니며 놀던 어린 시절도 생각이 난다.

아버지한테 꾸중을 듣고 골이 나서 집을 나오기라도 하면, 저녁밥을 굶고 집을 나왔기에 춥고 배고픈데 집 들어가긴 어려워하던 어린 자존심도 생각난다. 그러다가 논 한가운데 짚가리에 볏단 몇 개 뽑아내어 동굴처럼 구멍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면 춥지도 않고 따뜻하기는 한데, 배고픈 건 어찌할 수 없던 시절의 고향을 그리는 것이다.

5) 민족 콤플렉스

우리 민족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강한 특성 때문에 콤플렉스가 강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유달리 기분(氣分)에 좌우되는 측면이 강하다. 장사하는 사람의 경우에 물건을 팔아 이윤이 발생하는 것이 확실하다 해도 기분이 나쁘면 팔지 않는다. 그러나 기분이 좋으면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외국이 바이어들 중에는 "한국 사람은 기분이 매우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기분이 상하면 될 것도 안 되지만 기분이 좋으면 안 될 것도 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한국 사람은 기분이 나쁘면 천국도 안 간다"는 우스겟 소리가 생겼을까.

2002년의 한일월드컵(Korea-Japan World Cup)도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이 대회에서 우리는 축구의 4강 신화(神話)를 이루었다. 그것은 각종의 기록 갱신으로 이루어졌다. 48년 만에 첫 승을 거둔 것, 16강 진출, 8강 진출, 4강 진출이 그것이다. 그때 우리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가정에서 곳곳에서 응원했다. 너도 나도 빨간 티셔츠를 입고 홍해 바다가 되었다. 온갖 경기장이, 아파트단지, 온 동네가 축구응원장으로 변했다. 그 엄청난 응원열기에 세계가 놀랐다. 세계는 이제껏 그런 일사분란하면서도 정열적인 응원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열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 민족의 콤플렉스(Komplex)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강한 정서를 갖는 우리 민족은 본래 눈물이 많은 민족이다. 그 눈물은 굳이 한(恨)의 표현이라 해도 틀리지 않지만 인정이 많고 정(情)이 많은 우리네의 모습에서 비롯된다. 오랜만에 만나거나 먼 곳으로 헤어져 떠나가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유달리 눈물을 많이 보이는 민족이다. 그런가 하면 이를 열등감 차원에서 보아도 그렇게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우수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어느 나라도 지배해 본 적이 없다. 지배적 정열이 대단한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툭하면 세계의 1등을 곧잘 들먹인다. 그것은 지배력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비해 그런 선진 국가, 선진 국민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서운함을 갖고 있다. 그런 우리가 월드컵에서 한번 콤플렉스가 터져 나왔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우리는 하나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치며 응원했다. 그 열기는 실로 온 국가를 뒤덮었다. 우리는 하나 되어 목청을 높였고,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서로가 어깨동무하고 열광했으며, 때로는 서로를 껴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승리자'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월드컵이 남긴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물론 우리의 자긍심을 찾은 것이다. 세계에 한국이 소개된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심리적 평가이다. 세계사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도약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을 계기로 우리는 모두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크게 느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승리를 가져다 준 축구감독과 선수들을 '영웅'으로 받들었다. 실로 우리 모두는 이 승리로 인해 만감이 교차하는 감정 뿐 아니라 가슴 벅찬 감동을 경험하였다. 아마도 이번을 계기로 하여 이제껏 쌓인 한스러움을 다 풀어버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특히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민들의 반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지금껏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 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는 것이다. 이제 해외의 교포들은 처음으로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한국민족임을 자각하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뭔가에 눌리고 살던 보이지 않는 심리적 멍에를 단번에 벗어던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콤플렉스는 긍정, 부정의 강한 감정이 혼합되어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월드컵에서 경험한 대로, 긍정적으로 민족의 잠재력이, 부정적으로는 열등감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다른 감정이 한꺼번에 솟구치는 것이다. 단군이래로 이런 민족적 경험이 또 있을까 싶다.

4.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무의식으로서 콤플렉스에 대해서 기술했다. 콤플렉스는 의식과 무의식에 두루 관여되지만, 무의식에 더 많이 작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의식에 대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조절이 가능하지만, 무의식에서의 조절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였다. 실제로 콤플렉스는 인격의 내면의 깊은 데서부터 특이한 존재로 작용하기에 이 콤플렉스를 다시 무의식의 측면에서 고찰한다면, 개인적인 것이 더 많이 관여된다고 보아야 했다. 콤플렉스는 후천적인 특성이 더 많이 작용한다는 측면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