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승
▲권혁승 교수 ⓒ권혁승 교수 블로그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수 5:2-3)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처음으로 진을 쳤던 곳은 길갈이다(수 4:19). 길갈은 '굴러가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애굽의 수치가 떠나갔음을 의미한다(수 5:9). 옛 길갈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 '여리고 동편 경계'(수 4:19)라고 언급한 것을 볼 때, 요단강과 여리고 사이에 있던 위치하였음은 분명하다. 여리고로부터 북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옛 길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것은 1세기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가 그의 책 「유대고대사」제 5권 1장에서 언급한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길갈로 추정되는 지역 부근에서는 지금도 부싯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자신들을 점검한 필요가 있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마지막 과정이 진행되었던 곳이 길갈이다. 길갈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할례를 시행한 일이었다(수 5:2-9). 여호와께서는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다(수 5:2). 여기에서 '다시'가 의미하는 것은 이미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한 번 더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 아니다. 애굽을 떠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었다(출 12:43-49). 그런 점에서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행한 할례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오는 동안 할례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애굽에서 있었던 첫 번째 할례와 길갈에서 있었던 두 번째 할례는 모두가 유월절 절기와 관련이 있다. 애굽에서의 첫 할례는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내는 종들과 이방 거류민들도 할례를 받고 나서 유월절 식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길갈에서의 할례 역시 유월절과 관련이 있다. 그들이 할례를 시행한 후 곧바로 지킨 절기가 유월절이었다(수 5:10).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동시에 할례를 받은 것은 출애굽 때의 할례와 길갈에서의 할례 두 차례 뿐이었다.  

할례의 기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두 가지 곧 그의 자손이 번성할 것과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후손 대대로 지킬 것과 그 언약의 표징으로서 할례시행을 명령하셨다(창 17:1-14).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큰 민족으로 성장하였고, 출애굽 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스라엘 자손이 큰 민족으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은 두 번째 약속인 가나안 땅 정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제 언약의 두 약속이 모두 이루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길갈에서의 할례는 그런 기본적인 의미 그 이상이 있었다. 그것은 길갈에서 행한 할례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행했던 할례와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이 행한 첫 할례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수용하며 그 믿음을 굳게 지키겠다는 신앙고백이라면, 길갈에서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최종적 성취를 이루기 위한 최종적 조치였다. 약속을 믿음으로 수용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일을 구체적으로 이루어나가겠다는 적극적 참여를 선언하는 결단이었다.  

가나안 땅 정복을 앞두고 할례가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은 출애굽구원과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지나간 40년의 광야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키시며 인도해주셨다. 그러나 마지막 가나안 입국을 앞두고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외적 징표인 할례를 요구하신 것이다. 형식은 쓸데없는 장식이 아니다. 그것은 내용을 담은 중요한 그릇이기도 하다. 형식은 내용과 구별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형식 자체가 중요한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모세는 출애굽을 위한 하나님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런 모세에게 남아있었던 문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의 약점을 엄중하게 추궁하신 적이 있었다(출 5:24-26). 모세는 그때의 위기를 십보라의 지혜로운 행동으로 잘 극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시행하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서 '애굽의 수치'를 떠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수 5:9). 여기에서 '수치'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겪었던 이스라엘의 낮은 신분을 의미한다.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 신분이 격상된 것이다. 그것이 가나안 정목이라는 언약의 성취를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과제였다.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