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다큐다
▲ⓒ사진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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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여성 연예인이 생방송에서 남자 아이돌 그룹 가수들의 주요 부위를 만지려는 것처럼 보이는 짓궂은 장난을 하다, 성추행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아이돌 그룹 팬들에게 고소당해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됐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런 사례를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폭로>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나왔을 때, 그야말로 먼 나라 이야기로 들렸다. 과거 연인이던 여성 상사가 직위를 이용해 남성 부하직원을 유혹하고도 오히려 당했다고 누명을 씌우는데, 남자가 재판을 통해 그 부당함을 밝혀낸다는 내용이다.

우리나라 남성들의 인식으로는 여자 상사의 직위 남용이나 인격 모독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고, "그게 왜 부당함이지? 소문나면 아무리 상관이지만 여자 손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

이런 영화가 말하는 것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겐 낯설다. 남자가 여자에게 짓궂은 일을 당하면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일 여자 연예인이 나왔는데 남자가 신체를 만지려 했다면, 훨씬 큰 사회 문제로 떠올랐을 것이다. 아니, 감히 그런 일은 녹화 방송에서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이번 사건을 저지른 여성 연예인도 '반성했으면 됐지, 고소까지 하는 것은 팬클럽의 과도한 대응'이라는 반응이 많다.

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간 남자가 여자에게 저지른 것과 똑같이 처벌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조금 관대해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남자의 수치심이라 해서 무게가 덜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남자가 남자를 과하게 접촉하는 것은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동성애가 늘어나는 요즘에는 오히려 더 기분이 나쁠 수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도 사제들이 직위를 이용해, 이른바 합의된 성폭행과 성추행을 저지른 대상도 남자아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것은 평생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남았다.

이런 것을 보면 수치심과 피해는 당하는 사람의 기준이 되어야 하므로, 사회적 통념상 남녀에 따른 차등을 둘 이유가 없다. 장기적으로 인식을 바꾸고 법 감정도 개선할 필요가 있는 문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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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법이라는 것은 그대로 적용할 때 항상 맹점이 발생한다. 원래 법이란 정말 필요한 자에게는 늘 등을 돌리고, 힘을 가진 사람 편에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법이 평등하면 여성들에게는 도움이 될까?

얼마 전 모 대학에 붙은 대자보가 뉴스에 나왔다. <잘 살 것이다>라는 제목의 대자보 내용은, "너는 성범죄자임에도 잘 살 것이다. 나처럼 소화불량과 불면증에 시달리지도 않을 것이다..." 등인데, 성폭력 가해자와 함께 다시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 여학생이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붙인 것이었다.

법원은 술자리 후 만취한 여학생을 택시에서 강제 추행하고 모텔로 데려가려 했던 남학생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과 사회봉사를 각각 80시간씩 명령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벌금 700만 원에 치료 프로그램 40시간으로 형량이 줄었다. 피고인이 피해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의무경찰 입대를 신청했다는 것이 감형의 참작 사유였지만, 남학생은 입대하지 않고 다시 복학했다.

두 학기 정학 기간에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등 학교를 오가며 피해자와 마주친 남학생은 2년 동안 피해자에게 심각한 스트레스를 주었다. 아마 그 여학생의 가족들도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정이 어떻든 남학생은 죗값을 치르고 최소한 법적으로는 정당하게 복학을 했다.

법이란 이런 것이다. 피해자와 여학생위원회는 재심의와 퇴학을 요구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적당히 하라는 여론이 나오고, '모텔까지 가서 당한 것도 아닌데 뭘 그러느냐'라든지, '그러게 애초에 왜 술을 많이 먹었느냐', '왜 택시를 같이 탔느냐' 등 본질과 상관이 없는 의견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어느새 가해자는 캠퍼스를 당당히 활보하고, 피해 여학생은 트라우마에 사람들의 손가락질까지 더해져 오히려 학업을 포기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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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어디에도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약자를 위한 나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을 바꾸고 인식을 개선하는 노력으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게 현상이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바꾸고 인식을 계몽하고 노력할 필요가 우리 모두에게 있지만,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요즘 양성평등에 대한 요구가 많아서, 이렇게 말하면 어떤 차별적 마인드나 남성우월적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다. 남자들이 훨씬 잘못됐고 개선할 점이 많다. 다만 법과 실리를 따졌을 때, 타인들과 법률이 나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결국 자기 안위를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구조를 방해하고 방치하고, 원인 조사도 방해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각자 알아서 살 길을 도모하라는 거다.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걸 경찰이 해결해 주리라 기대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원전이 터지면 법적 처벌과 피해 보상금 지급이 피해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어떤 재난에 대한 위기가 닥치면 사람들은 라면을 사재기하는 등 소동을 벌이는데, 국가 시스템이 자신들을 살려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과 원칙도 중요하지만 여성에게 우선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남성이 우세하니 손해 보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하라는 식의 유치한 엄포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법이나 처벌로는 갚아줄 수 없는 '구조적 불평등'이라는 거다. 작고 힘이 없는 남자가 힘센 덩치와 다투다 얻어맞았다. 법에 호소해 치료비와 합의금을 받았다 해도 성이 풀리지 않을 수 있다. 만일 팔 다리를 잃거나 목숨을 잃는다면 돈으로는 해결조차 되지 않는다.

똑같이 술을 마셨는데 여자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한다든지, '왜 진즉 조심을 하지 않고 따라갔느냐'라든지, '왜 더 저항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런 천박한 인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얼마 전 터키에서 친구 집에 갔다가 친구 할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법정 증언 압박에 시달리다 재판 이틀 전 심장마비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법이 훨씬 가해자에게 엄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왜 조심성이 없었느냐'는 말은 잔인한 고문과도 같다. 사고가 생기면 무조건 피해자 위주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얼마든지 조심하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조언을 사고 후의 부당한 질책과 혼동하면 안 된다.

여자에게 남자는 태생적으로 강자이다. 남녀 간에 문제가 생겨 서로의 약점이 공개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여자를 손가락질한다. 심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처럼 남녀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기 쉽다. 그래서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범죄는 법과 처벌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평등에 대한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여성에 대한 더 많은 배려와 사회적 장치가 보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치로도 당장 해결되지 않는 부분은 스스로 지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진심으로 여성들의 피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많은 남성들, 어머니와 아내와 딸과 여동생을 가진 모든 남성들의 간곡한 당부임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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