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저, 사도 야고보는 지금까지 여러분들과 선물로서의 사랑이 얼마나 많은 것을 주고도 여전이 빚을 지고 있는지 나누었습니다. 빚을 지는 것이 의무라니, 세상은 이해하기 어렵지요? 사랑할수록 더 큰 빚을 지고, 사랑할수록 더욱 채무의식을 느낀다니!

다시 말해, 선물로서 사랑을 준다는 것은 무한한 빚에 거하는 겁니다! 무한한 빚에 거할 때만 이 사랑은 살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기에 지칠 때, 지칠 수 없는 열정을 주는 것이 이 채무의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사랑이 변질되지 않도록 사랑의 빚에 거하십시오!

물론, 이 사랑은 거저 줍니다. 사랑이 주고 돌려받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여기지요. 사랑은 언제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마 6:3).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도 가진 게 없다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저의 임무는 여러분들의 그런 잘못된 생각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땅속에서 살아야 했고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한 채 죽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는 사람처럼 산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정말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도, 가장 최고의 것을 줄 수 있는 것이 긍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불평하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사람들을 돕고 싶지만, 돈이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많은 돈이 있었다면, 많은 자선도 하고 기부도 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자선이나 기부 역시 거저 주는 선물이지요. 그러나 부자의 그 손길에 '긍휼' 없는 자선, '긍휼' 없는 기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거저 준 것처럼 생각하지요.

그러나 양의 탈을 쓴 늑대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명성과 명예, 보람, 뿌듯함 같은 것들로 돌려받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자선과 기부는 선물이 아니라 뇌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선과 기부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꼭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에 큰 소리로 광고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 돈 없는 당신을 위해 이 말씀을 드립니다. 속지 마십시오. 당신은 아무것도 줄 수 없고 아무것도 행할 수 없어도, 최고의 것을 줄 수 있는 사랑의 한 행위인 긍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마치 돈 있는 사람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착각에 속지 마십시오! 오히려, 참다운 긍휼은 오직 돈 없는 당신만이 입증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긍휼한 사마리아인이 살고 있었습니다(눅 10:33-37).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이 이야기를 조금 바꾸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짐승을 타고 온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라 걸어서 예루살렘에 가는 길이었다면, 거기에 거반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면, 그의 수중에 상처를 싸맬 도구가 없었다면, 이 불쌍한 사람을 짐승이 아니라 어깨에 매고 갔다면, 가까운 여관에 갔으나 집주인이 거절했다면, 왜냐하면 사마리아인은 땡전 한 푼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이 강퍅한 주인이 긍휼할 수 있도록 구걸하는 일 밖에 없었다면, 사마리아인은 긍휼하지 않는 건가요?

아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은 인내심을 잃지 않았지요. 그는 이 불쌍한 사람을 어깨에 매고 더 멀리 갑니다. 그래서 거반 죽어가는 이 사람을 위해 쉴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면, 그의 옆에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를 살리려 했으나 죽었다면, 갑자기 경찰이 와서 혹시 그가 죽인 것은 아닌지 의심받고 있었다면, 그래서 그가 성서가 말한 대로 긍휼한 사람이 아니라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이 사람이 긍휼을 실천했다고 말하는 것에 반대하겠습니까?

헌금함에 동전 두 렙돈을 넣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와 봅시다(눅 21:1-4). 그러나 역시 약간의 시적인 변화를 시도해 봅시다. 그녀에게 동전 두 렙돈은 한 번에 얻을 수 없을 굉장히 큰 양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오랫동안 저축했습니다. 그녀는 성전에 올라갈 때, 그 돈을 가져가기 위해 작은 헝겊에 싸서 숨겨두었습니다. 그러나 사기꾼이 그녀가 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녀를 몰래 속여 돈을 갈취하고 그 대신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는 동일한 작은 헝겊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했던 대로, 성전에 올라가서 두 렙돈을 헌금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여전히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다른 모든 부자가 드린 것보다 더 많이 드렸다."

그러나 돈 없는 긍휼, 이것은 무엇을 이룰 수 있습니까? 결국 자선과 관대에 대한 세속적인 뻔뻔함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긍휼을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이미 불의요, 충분한 반역입니다. 가난한 자가 그녀의 마지막 동전 한 닢을 드릴 때, 부자가 따라와 수백만 원을 드립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수백만 원을 지켜보지요. 곧 부자의 선물이 가난한 자의 선물인 긍휼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가난한 자가 가장 많은 것을 드렸다는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얼마나 광기입니까! 더 적은 것을 준 자(부자-거대한 양)가 더 많은 것을 준 자(가난한 자-약간의 티끌)에게 그림자를 드리운다니 얼마나 광기입니까! 심지어 가장 많이 준 자에게 그림자를 드리운다니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세상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가장 많이 드린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왜 그렇게 말합니까? 왜냐하면 세상은 돈에 관해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님은 긍휼에 관해서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긍휼에 관해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과부가 드렸던 동전 두 닢에 대해 아주 정확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긍휼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고 말했던 겁니다. 혹은 더 적게 드릴수록, 심지어 더 적게 드릴수록, 더 많은 것을 드릴 수 있다고 말했던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수학문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계산법입니까! 이런 계산법은 어떤 수학책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놀랄 만한 표현이 과부에 대해 사용된 겁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가난한 중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선물의 크기가 가난의 크기에 비례하여 증가한다면, 따라서 세상의 생각(선물의 크기는 부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것)과 정반대 현상이 생긴다면, 그때 저 과부보다 더 가난한 자는 가난한 중에 겨우 동전 한 닢을 드림으로써, 과부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립니다. 모든 부자와 비교할 때, 가장 많이 드린 저 과부보다 말입니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