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 이동주
▲발표하고 있는 이동주 박사(왼쪽에서 두 번째).
2.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웨슬리의 사회변혁 운동

현대 복음주의 '선교' 개념은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양면성을 포괄하고 있다. 그것이 선교와 전도를 동일시하던 과거적인 선교관과 달라진 점이다. 현대 복음주의 선교관과 마찬가지로 웨슬리 선교의 우선순위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고, 그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이 변화되어 이 현실속에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이 해야 할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에 관한 이해는 현대 진보주의 신학자들의 개념과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개념 사이에 차이가 있다. 우리는 웨슬리적인 개념에 비추어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좀더 명확히 천명하고자 한다.

1) 현대 진보주의적 선교관

1980년 호주 멜버른(Melbourn)대회에서 개최된 제3차 선교와 복음화대회(CWME)는 "나라이 임하옵시고"라는 제목으로 총체적 복음화론을 다루었다. 제1분과는 '선교'를 억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착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가난이 아니라 충만이며, 노예가 아니라 자유, 질병이 아니라 건강,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고 정의하면서 '복음화'의 중심 요소를 정의사회를 위한 질서와 인권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교회는 불의에 저항하여 빈자와 피압박자의 투쟁에 참여하는 일을 소홀히 했음을
반성하며(제1분과 18항), 억압을 저항하는 빈자의 투쟁에 후원할 것을 다짐했다(제1분과 20항). 또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많은 사람을 위한 신국의 표적이 되었다고 주장하고(제2분과 12항), 교회는 오늘 온 세계의 불평등의 구조를 변혁할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하였다(제2분과 20항).

그러므로 에큐메니칼(Ecumenical) 신학의 '선교및 복음화'의 의미는 더 나은 공동체를 설립할 구조적 변혁을 위한 투쟁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종족적 인종적 소수와 여성과 장애자와 도주자등을 돕는 투쟁에 참여함을 의미한다(제2분과 31항). 에큐메니칼적 선교의 관심사는 교회가 이러한 투쟁에 참여해야 할 것이냐 또는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력적으로냐 비무력적으로나가 문제라고 밝혔다.

제4분과에서는 무력에 대해 진술했는데, 기독교인들은 무력에 대한 판단  때문에 나누어지며, 이것은 피차 보충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에큐메니칼의 논쟁이라고 했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비무력의 실천을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적 순종의 일부로 강화해야 한다면서도, 기독교인들의 공동체가 무력 속에 엉킨 상황속에서는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압박자의 폭력에서 자유케 하기 위해 비기독교인들과 단결하여 자기를 정치운동과 동일시 하지 않으면서도, 무력 속에 엉킨 그들과의 단결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11항)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무력에 대하여, 무력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인가, 그리고 무력을 자기 교회나 자기기관을 위해 사용하는가, 아니면 자기희생적인 사용인가로 질문한다(13항). 즉 무력을 사용하는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질문이 아니고, 어떤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일찌기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콘(James Cone)이 흑인 혁명을 위한 무력사용 문제를 '백인의 무력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흑인의 무력에 대한 것인가'가 바른 질문이며, 우리가 어떠한 무력 사용에 원조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역설한 것과 병행된다.

과테말라의 참석자 줄리아 에스퀴벨(Julia Esquivel)이라는 여인은 이 멜버른 대회에서 "내가 죽임을 당해도 살바도르 민중 가운데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외친 로메로(Romero) 주교의 말을 인용하며, 부활의 놀라운 경험은 니카라과 민중의 승리와 함께 시작됐다면서 "길거리에서 땀을 흘리는 하나님, 자유를 원하는 민중을 통해 소리치는 하나님(니카라과 찬송)"과 함께 교회가 민중 편에 서서 혁명투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반면 그는 복음주의적 전통은 개인적이고 내세적(미래적)이며 기회주의적(정치적으로)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회 위원장 우루과이 목사 에밀리오 카스트로(Emilio Castro)는 '나라이 임하옵시고'라는 대회 주제에 대하여 복음주의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영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우선적인 것과 책임성에 직접 관심하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총체적 구원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중심은 생의 모든 면을 위한 것(정의, 평화, 이웃과의 화해)이라고 했다. 그가 의미하는 총체적 구원이란 물질적 달성과 해방의 성취와 안전의 회복이며, 이를 신국의 도래라고 설명하였다.

1968년 WCC 제4차 총회와 1975년 제5차 총회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인도인 M. M. 토마스(Thomas)는 교회가 민족들의 자유투쟁(Freiheitskampf)에 참여할 사명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1961년 제3차 뉴델리(New-Delhi) 총회에서 "우리 시대에 교회를 혁명들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은 교회의 사명이 아니"라며 "교회는 세속 이념들로부터 억제된 것이 아니라, 세속 이념들을 증거의 도구로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데올로기(Ideologie)들을 '신적 언약의 도구'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또 1973년 방콕(Bangkok) 대회에서 '인간의 영성(menschliche Spiritualität)'에 대해 "기독교 선교는 경건주의이거나 개인주의적 고립에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물질적이고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혁명들에 대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회가 창조적 문화운동과 사회적 해방운동을 하는 선지적 소명이 있는 "새로운 이단이 되는 것"이 인도의 조직적인 교회가 더 큰 게토(Getto)가 되려고 모이는 것보다 더 나은 선교라는 것이다.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에 살며 마르크스주의와 가까운 단체인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사회(ISAL)의 일원으로 활약했던 리처드 숄(Richard Shaull)은 1962년 이래 미국 프린스턴(Princeton)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좌익과 연결돼 있었다. 그는 1966년 창립한 WCC의 '교회와사회협의회'에서 강연하며 혁명신학을 주창하면서, 주로 혁명과 게릴라 투쟁과 무력 사용에 관한 질문을 교회에 던졌다.

이 '교회와사회협의회'의 문서(Document)는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입장을 밝히면서, 사회변혁(Wandel)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이라 하며, 혁명계획을 위한 동역의자유를 추구하고, 기독교인들은 힘의 구조(Machtstruktur)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말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다.

또 "우리의 목적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schaffen) 있다"면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그 역사에 참여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한다. 이들은 무력(Gewald) 사용에 대해 언급하며, 방어 방법으로는 비폭력이 합당하지만, 문제는 수백 만을 억압하고 희생시키고 불의한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불가시적 무력에 있고, 무혈의 무력으로 온 백성을 영원히 절망시키는 것 보다는 차라리 유혈 혁명이 더 작은 악(ein geringeres Übel)일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질문했다.

이를 통해 결국 비폭력적인 입장이 기독교인의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은 절대 비폭력을 고집할 수 만은 없다는 상황에 이를 수 있는데, 특수 상황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WCC '교회와사회협의회'는 이처럼 유혈혁명 가능성까지 제시하면서 기독교인들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1960년대의 WCC의 신학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1966년 교회와 사회에서 혁명신학을 주창한 리처드 숄은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사회'에 소속됐던 해방신학자였고, 1968-1975년 WCC 중앙위원장 토마스도 공산주의 운동가였으며, 1972년 WCC 총무이자 '세계 선교와 복음화위원장'이었던 P. 포터(Potter) 역시 공산주의자였다. 그 뒤를 이어 세계 선교와 복음화위원장이 된(WCC 총무가 된) E. 카스트로 역시 해방신학자였다.

이와 같이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진보주의적 이해는 시대적으로 구 소련 붕괴 이전의 이데올로기와 병행되는 사상으로,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는 복음적이고 웨슬리적인 선교관과는 대조된다. 카스트로가 발표한 것처럼 이들의 우선순위는 복음전도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혁명적 행동에 있다.

이러한 진보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의해 사회·정치적인 변혁을 일으키려는 행동주의 신학(Doing Theology)이며, 성서가 신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먼저 사회적인 맥락(Kontext)에서 출발하여 성서(Text)를 사용하는 신학이다. 이러한 상황신학의 문제점은 새 사람이 되지 못한 구습적인 인간의 한계에 부딪치는 것이며, 구조적인 악을 파괴할 수는 있으나 새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자라지 못하는 데 있다.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행 1:8, 2:38).

2) 현대 복음주의적 선교관

진보주의적 선교 신학이 하나의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것과는 달리, 사회적 책임에 관한 복음주의적인 입장은 복음전도를 우선 순위에 두고 사회적 책임을 복음전도의 동반자적으로 간주한다. 독일의 피터 바이어하우스(Peter Beyehaus) 교수가 현대 모든 사회봉사의 65%가 복음주의자들이 행하는 것이라는 타임지(Time)의 보고를 저서에 인용한 것처럼,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봉사에 관한 한 진보주의자들을 훨씬 능가하지만, 그들의 우선적 목표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하는 데 있었다.

1974년 약 150개 국에서 2,700명의 복음주의 대표들이 스위스 로잔(Lausanne)에 모여 세계선교를 위한 국제대회를 개최했다. 그 대회를 개최한 이유는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연설에서 표명한 것처럼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복음화의 사명'이란 의미는 온 세상이 다 개심하게 되기 위함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게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로잔 대회 참가자들은 복음주의에 헌신적이어야 하고,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충실하고, 복음전도와 구원, 회심에 대해 성서적 견해를 고수해야 한다고 했다. 대회에서 작성된 로잔언약 제5항에서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성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해 왔고,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해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찌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우리는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번역: 조종남 박사)."

위와 같이 설명하면서, 이어지는 제6항에 바로 기독교인의 첫 번째 헌신적인 봉사는 세상에 복음을 갖다 주는 것임을 명시한 점이 바로 복음주의자들의 소명을 고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복음화와 사회봉사 내지 사회적 책임의 양면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적 입장은 1973년의 시카고 선언과, 1980년 '검소생활에 대한 국제대회', 1976년 스위스 바젤(Basel) 모임으로부터 1979년 독일의 바트 리벤젤(Bad Liebenzell), 1983년 미국의 휘튼(Wheaton), 1986년 싱가포르(Singapore)에서 개최한 세계복음주의협의회(WEF)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싱가포르 대회에서 복음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사회·정치적인 참여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으로 샬롬 왕국이 건설되리라는 낙관주의적인 세계관과 에큐메니칼적 자기실현의 가능성을 경계했다.

1982년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에서는 WEF와 로잔위원회가 공동으로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그들은 복음화와 사회적 활동의 관계가 불가분의 동반자임을 강조했다 특히 '사회봉사와 사회활동'의 개념을 구별해 정의하면서, 기독교인들은 봉사와 자선과 자비의 행위인 '사회봉사'뿐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고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정치 경제적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뜻하는 '사회활동'의 불가피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나 현대 복음주의는 비판적인 자기성찰과 아울러 위와 같은 이념화된 진보주의적 선교관에도 비판을 가해, 에큐메니칼 운동과 해방신학 등이 성서적인 바탕으로 돌아오길 촉구하고 있다.

복음주의가 이처럼 에큐메니칼 운동과 대립되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세속화 신학이 절정에 달한 제4차 스웨덴 웁살라(Uppsala) WCC 총회에서였다. 이 대회에 불참했던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제2분과 제목인 '선교의 갱신(Erneuerung in der Mission)' 강연 초안에 대해 "제2분과는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나 20억에 대해, 그리고 메신저(Messengers)를 보내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며 "웁살라 대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알아야 할 20억의 인구를 배신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또 웁살라 대회는 성경적 선교관을 배반하고, 수평적 관심에 집중하며, 영적 기아 상태의 무리를 그릇 인도하고, 영 대신 육으로 대치했다고 통탄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존 스토트(John Stott)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직도 복음화되지 못한 수백 만의 영적 기아에 대해 염려하는 바를 이 대회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다만 육체적 갈망과 기아와 가난과 불의에 대한 이야기만 있었을 뿐"이라고 고백했다. 또 "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 없이 멸망하는 수백만 명이다. WCC는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한다. 그 주님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교회를 보내시고 제자를 삼도록 하셨다. 나는 이 모임에서 이러한 분부를 따르려는 노력을 찾아볼 수 없다. 주님은 그를 거절한 회개치 않은 도성을 향해 우셨다. 이 모임에서는 이러한 울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탄식했다.

피터 바이어하우스는 웁살라 대회가 끝난 후 1969년 '인간화'라는 책을 출간, WCC의 선교개념 변동으로 일어난 선교의 원인과 목적에 대해서 선교학적으로 정립했다. 이것이 1970년 발표된 '프랑크푸르트 선언문'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는 WCC 신학이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 사상으로 변한 것과, 하나님 찬양 없는 이웃사랑, 인간 스스로 구원을 실현하려는 그릇된 에큐메니칼 선교관을 지적하고 교정하고자 했다.

그는 존 스토트가 웁살라 대회 제2분과에서 제시한 선교관, "즉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전파하고 봉사하기 위해서(to proclaim and to serve)"임에 동의하며, 선교란 우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의 통치를 선포하고, 신앙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교회 공동체안에서 영적인 새생명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표시(beglaubende Darstellung)가 되며, 더 나은 사회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변화시키는 능력이 동반한다(begleitet)고 했다.

이로써, 먼저 그리스도 중심적인 존재(Sein)가 되어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기능(Funktion)이 나타난다는, 선교의 복음적 관심과 봉사적 관심을 표명하고, 복음과 봉사의결합은 선교와 반식민주의 투쟁 또는 적십자운동과 같은 가장 경건한 복음주의 전통과 일치한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과 이웃과 화해하는 사람만이 구조변혁을 의미있게 한다고 했다.

위와 같이 복음화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양면성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보고 있는 복음주의적 입장은 그 우선순위에 있어 진보주의자들과 반대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존 웨슬리적 복음주의 전통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3) 웨슬리의 사회변혁 운동

18세기 웨슬리 당대의 영국은 공업화및 산업화로 인한 저임금 노동, 실직과 좌절, 국교의 영적 침체, 종교적 타락, 도덕적 부패 등으로 인해 사회변혁이 강력하게 요청됐다. 이때 웨슬리는 설교를 통해 악을 샅샅이 드러나게 하고 회개케 함으로서, 술주정꾼, 매춘부, 도둑 등의 죄인이 거룩한 습관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사실상 웨슬리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활동은 그의 회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대학 시절 그는 '규칙쟁이(Methodist)'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는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별명에 대해 그는 "우리의 할 일은 독서와 금식, 기도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교회 참석, 성찬식 거행, 빈민 구제, 병자와 수인의 방문, 무학자의 교육, 악인의 회개를 전하는 것 등, 그들의 구원을 위해 지나치게 했다는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웨슬리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만 각성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범적인 생활을 하여 사회에 본이 되었다. 그의 활동에 소요된 기금은 1년 간 3천 파운드 이상이었으나, 그 자신을 위해서는 1년 간 30파운드 이상도 이하도 받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난한 자와 함께 보냈고, 하루에 100-150명의 극빈자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한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토끼를 쏘거나 어린 나무를 자르는 일, 5실링의 도둑질 등으로 목매달고 공개 처형당하는 형벌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지옥 같은 감옥, 불공정한 변호사, 전쟁 죄수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등을 폭로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죄수와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해 회개로 이끌며, 믿음과 내적 평화를 심어준 전도자였다. 웨슬리는 감리교 신도회가 교도소를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Thoughts Slavery'라는 논문을 통해 노예의 인권을 위한 기독교 윤리를 단호히 제시하고 적극적으로 노예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마약, 사치, 알콜중독, 국회 의석 매매 등과 같은 죄악에 대해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웨슬리를 사회의 구조적 변혁을 포기한 사람, 법률을 개정하거나 국회의 개혁을 요구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왕에 대한 비판을 자제한 '비정치적 보수주의'라고 규정하거나 그가 '그 시대 최대의 사회변혁가'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 웨슬리는 사회적 책임감이 미달되는 하나의 폐쇄적 복음전달자 였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오히려 그의 설교가 개인 회심으로 끝나지 않고, 회심자의 개인 윤리적이고 사회 윤리적인 완성과 성화를 촉구하여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사회개혁을 감행한 사람이다. 웨슬리 이후 어느 감리교인도 그만큼 사회변혁을 시도한 사람은 없다.

만일 웨슬리가 그의 정력을 회심운동에 쏟는 대신 법률 개정이나 국회개혁, 구조악의 제거를 위한 정치·경제적 해방운동에 쏟았다면 그것은 하나의 무력시위로 발전됐을 것이다. 그랬다면 웨슬리가 하나의 사회운동가는 될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가 성취할 수 있었던 사회변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성공적인 사회개혁은 개인의 회심과 변화가 뒤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 아무리 급해도 복음화 보다 앞설 수는 없는 것이며, 한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양육하고 복음전도자로 파송한 점은 기독교인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케 한다. 웨슬리는 복음화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훌륭하게 시행한 하나의 심볼이 되는 선교사역자였고, 한 세기 동안 하나님이 그 뜻대로 사용하셨던 놀라운 그릇이었다.

4) 웨슬리의 성화론

'완전'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웨슬리의 '성화' 개념은 점진적인 성화와 완전 성화의 두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웨슬리의 '완전론'도 역시 윤리적 개념으로써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완전과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완전론으로 구별된다.

토마스 아 켐피스나 J. Taylor및 W. Low와 같은 실제적 신비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웨슬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의지의 순수, 그리스도 모방,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신비주의자들의 율법주의 내지 은둔주의에 반대했고, 한편으로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완전"이라는 진젠도르프(Zinzendorf)계 정적주의적 완전론에도 반박했다. 인간은 죄성 때문에 칭의 후에도 선행 능력이 없고, 철저한 하나님 의존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실현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완전론'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령의 역사로서 믿음에 의해 현세에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완전 성화된 인간에게도 태만이나 단점, 결점이 남아있다. 웨슬리는 완전 성화된 인간도 도로 타락할 수 있다는 독특한 완전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대적인 완전개념은 웨슬리의 죄론과도 관계가 있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서 오는 죄만을 죄로 인정하는 아르미니우스적 죄관과, 인간의 실수와 결함까지 모두다 죄로 보는 두 가지의 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전자는 무의식적 범죄와 인간의 결함이 완전 성화된 인간에게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 웨슬리가 의도의 순수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게 있다.  사람을 태운 불이나 사람을 쳐죽인 돌을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에게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없는 피조물을 심판한다는 것을 모순으로 느끼고 있는 웨슬리는 범죄가 인간의 동의에 의한 행위로서, 하나님 앞에 책임있는 행위였다는 이유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후자는 스스로 완전한 인간이란 없고 그리스도인은 오직 끊임없는 그리스도와의 접촉과 의존에 의해서만 완전 성화가 유지된다. 완전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언제나 필요하고, 그의 속죄의 피가 언제나 필요하다. 웨슬리는 이러한 의존적 완전을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며, 의존의 지속성에 의해 신앙이 성숙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일 뿐"이라는 개혁주의나 루터주의-경건주의와 같은 사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외적이고 가견적인 변화로, 인간의 성향, 기질, 영혼, 행위의 변화와 인격적인 완성을 주장하는 웨슬리의 신학은 이들과 구별된다.

웨슬리의 성화론은 절대적 의존론이다. 회심 후 인간의 선행능력이 인간 스스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은혜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회심한 인간이 타락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즉 인간은 언제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이것은 반칼빈적 논리이다. 칼빈주의는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구원받는다는 사상이다.

웨슬리의 논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경고에서 명백해진다. 반(反)-정적주의(Moravian), 또는 칼빈주의와는 대조적으로 칭의 후 선행능력을 주장하는 웨슬리의 깊은 신학적 원리는 바로 '절대의존 원리'에 기초한 논리정연한 사상이다. 여기서 그의 상대적(주관적) 완전론과 절대적 (객관적) 완전론의 이중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웨슬리의 완전론과 성화론은 한국 교계의 현실에 크고 강한 도전을 준다. "말과 교리적으로만 구원을 증명하려는 칭의론은 이제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죄를 짓고도 뻔뻔해진 교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말과 더불어 성화된 모습을 지니지 않고는 영국 교회의 부패상을 재현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지만, 완전을 추구해야 한다. 웨슬리의 엄격한 청교도적인 삶, 그의 철저한 중생과 헌신적인 삶은 오늘 타협하며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에게 큰 도전을 주고 있다. <계속>

/이동주 소장(선교신학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