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응답하라 개혁신학
▲이경섭 목사.
급전직하(急轉直下)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하루 아침에 신세가 급격히 몰락한다는 뜻이다. 최근 영어의 몸이 된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이 단어를 더욱 실감한다.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된 것도 급전직하(急轉直下)한 경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 형상을 닮은 고귀한 인간이 타락하여 비참한 지경에 빠뜨려진 것은 급전직하(急轉直下)의 전형이다. 아담이 "먹으면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을 때, 바로 영적 죽음이 왔다. 범죄 후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벗은 모습이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하체를 가린 것과(창 3:7),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나무 뒤에 숨은 것은, 영적 죽음(하나님과의 단절)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가 급전직상(急轉直上)이다. 하루 아침에 신세가 급격히 격상된다는 말이다. 강화도 산골에서 나무나 하던 강화도령이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의 임금이 되는 경우이다.

이신칭의(以信稱義)가 그러하다. 범죄로 급전직하(急轉直下)했듯, 칭의(稱義)도 숙성 과정이 필요 없는 급전직상(急轉直上)이다. 칭의에는 소극적인 '죄사함'과 적극적인 '의로 여기심'을 함의하는데(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 둘 다 모두 즉각적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 천사로부터 숯불이 그의 입에 닿았을 때 즉시 악이 제해졌다는 선언을 들었다(사 6:6-7). 또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발에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눅 7:47)"고 하시며, 즉각적인 죄 사함을 선언하셨다.

반면, 로마천주교의 죄 사함에는 '은혜성'과 '즉각성'이 유예된다. 그들은 죄사함에 '고해성사'나 '참회'를 포함시켜-죄 사함을 보속행위로 만들어-죄 사함의 '은혜성'을 손상시켰고, 회개를 반복적인 것으로 만들어 죄 사함의 '즉각성'을 손상시켰다.

오늘날 신구교를 망라하여 경쟁적으로 하는 성지순례는 본래 죄 사함을 위한 일종의 고행, 보속(sacramental penance)이었다. 그들은 순례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사죄의 자비를 구했다. 성지순례는 지금 같은 관광이 아니라 탁발(托鉢) 인, 말 그대로 고행이었다. 11세기 말-13세기 말에 걸쳐 200년 동안 일어난 십자군 전쟁의 발발 원인이 가톨릭신자가 성지순례 중 이슬람 지역에 들어갔다가 빚은 충돌이었다. 교황이 있는 로마 바티칸은 물론, 한국의 안성 미리내의 김대건 신부 묘소도 성지순례의 단골 코스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은 루터(Martin Luther)가 말한 대로 칭의와 중생의 예표이다. 물이 순간적으로 포도주로 변했듯이(요 2:9) 칭의와 중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예수님을 영접한 죄인 삭개오에게 "너도 오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됐다(눅 19:19)"고 하시며 삭개오를 아브라함 자손으로 즉각 편입시켜 주신 것은 죄인이 믿음으로 즉시 의인되는 원리를 예표한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이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난다(요 5:25)"고 말씀한 것은, 복음을 들은 영혼이 즉시 살아나는 중생을 뜻한다. 이는 예수님이 나사로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일어나라(요 11:43)"고 했을 때 죽은 나사로가 듣고 벌떡 일어난 것과,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고전 15:51)" 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세례의 원리 역시 칭의의 즉각성을 예표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2)."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으면 즉각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난다. 칼빈(John Calvin)도 "구원의 축복들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고 했다. 칭의의 신학자 제임스 뷰캐년(James Buchanan) 역시, 즉각적인 보증에 기초하고 있는 칭의를 받은 자는 즉시적인 약속과 현재적인 특권으로서의, '믿음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고 했다.

칭의의 즉각성을 반대하는 자들은 비단 칭의 유보자들만이 아니고, 신불신을 막론하고 진화론적 역사관에 세뇌된 모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느 민족, 사회, 개인이든 오랜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하지, 급작스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야만 중의 야만인이었던 게르만족(Germanic peoples), 앵글로색슨족(Anglo-Saxon)이 장구한 시간에 걸쳐 오늘날 신사 나라가 됐다 는 예를 즐겨 든다. 그들이 좋아하는 경구도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생물학적, 문화적, 도덕적 발전에는 즉각성이 적용될 수 없다. 어린 아이가 하루 아침에 어른이 될 수 없고, 오래 야만적인 생활을 한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교양 있는 문화인으로 바뀔 수 없으며, 평생 범죄만 일삼던 흉악범이 하루 아침에 선인으로 바뀔 수 없다.

1. 즉각적인 죄 사함과 칭의의 원리

죄 사함과 칭의의 즉각성은 법적 선언에 의거한다. 죄인이 의인 되는 칭의는 생물학적, 문화적, 도덕적 발전 원리가 아닌 법적 원리에 따른 것이다. 칭의의 법적 선언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사형수가 특사로 사면되는 것에 견줄 수 있다. 그가 사면되는 것은 죄가 없어서도, 행실이 완전해서도 아니다. 여전히 형기(刑期)가 남아있고 재범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대통령 직권으로 특별히 사면해주는 것이다.

이 사면의 효력은 즉각적이며 어떤 숙성 과정도 필요치 않다. 법적인 칭의 선언이 이와 같다. 그가 실제로는 의롭지 못하고 여전히 범죄의 가능성이 있지만 하나님이 그의 자비와 주권으로 의롭다고 선언해 주니 즉시 의인이 되는 것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가 칭의의 법적 선언은 속속들이 의인이 아닌 자에게 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지적한 것은 옳은 지적하다.

"만일 그가 이미 속속들이 완전히 의롭게 됐다면 일부러 법적 선언을 하면서까지 의롭다고 인정해 줄 필요가 없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게 의로운데 굳이 그에게 의롭다는 법적 선언을 해줄 필요가 없다. 죄가 있음에도 의롭다고 인정해주려고 하니 법적 선언이 필요한 것이다. 전가(imputatio) 개념은 법정적인 칭의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둘째, 칭의의 즉각성은 '의의 전가(imputatio)' 교리에 의거한다. 로마교의 '의의 주입(infusio)' 교리는, 사실상 즉각적인 칭의가 불가능하다. 의의 주입 교리는 몸에 의를 주사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주사를 맞으면 주사액이 몸에 들어와 그의 몸의 일부가 되듯, 의의 주입을 받으면 의가 그 사람의 몸에 들어가 그의 몸의 일부가 된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주입된 의를 보전 확장시킬 책임이 생겨날 뿐더러, 그것이 그의 일생의 과업이 된다.

이렇게 될 때 사실상 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이 된다. 나아가 칭의는 종말의 확정 때까지 현재진행형의 미완료 상태로 남고 즉각적인 칭의 완성은 불가능해진다.

반면 '의의 전가(imputatio)'교리는, 옷 입듯이 의를 입는 것이기에, '의의 주입(infusio)' 교리 처럼 의가 내 몸속에서 나의 일부가 되거나 실체가 되지도 않는다. 이는 옷과 사람이 섞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의를 내 관할에 둘 수도 없고 내가 관여할 한계 밖의 일이다. 그리고 전가받은 의(義)는 율법의 마침인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니(롬 10:4), 그 의를 전가 받는 사람은 즉시 의롭다 함을 받는다.

루터가 "이신칭의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의(義)의 거래가 끝났기에 평안히 먹고 마시며 잠든다. 그에게는 평안히 쉬고 잠자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의 일이 되고, 그의 남은 여력은 이웃을 위한 봉사에 드려진다"고 한 말도 칭의의 완전성과 즉각성을 잘 표현한 말이다.

셋째, 칭의의 즉각성은 하나님의 이적(異蹟)으로 말미암는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이적들, 예컨대 즉각적인 질병 치유, 죽은 자의 부활, 무화과나무를 즉시 마르게 함, 풍랑을 즉시 잠잠케 함, 물이 포도주로 변함 등은 시간과 과정이 생략된, 순식간에 일어난 이적이었듯이, 이신칭의 역시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이적이다. 그리고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죄인을 즉시 의인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이적을 믿는데 어려움이 없다. 개혁주의자들은 칭의의 즉각성을 이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이신칭의의 즉각성을 하나님의 능력에 속한 이적이라고 했다. "죄 있는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일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 이적이다. ... 하나님은 신성의 무한한 주권과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의로운 자가 아니라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일을 맡으셨다. ... 불의한 자를 의롭다 하는 것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만 되어진다."

아더 핑크(A. W. Pink)는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자비의 이적으로 정의했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는, 신성한 이적을 알려주고 오직 하나님이 해낼 수 있었던 이적을 선언한다. 복음이 선언하는 이적은, 하나님은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의로운 자비를 가지고 다가가시며 경건치 않은 자들이 그 부패와 반역에도 불구하고(그리스도의 의를 근거하여) 믿음을 통하여 새롭고 복된 관계를 하나님과 맺을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치유, 축사(逐邪), 부활 같은 이적을 믿는다면 죄인이 즉시 의인이 되는 칭의의 이적도 믿을 수 있다. 만일 누가 예수님의 이적을 믿지 않는다면 그를 기독교인으로 인정할 수 없듯이, 칭의의 이적을 안 믿는다면 그를 기독교인으로 간주할 수 없으며, 더 이상 그와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공유할 것이 없다.  

2. 칭의의 즉각성이 가져다 준 결과

칭의의 즉각성은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 선언에서 비롯되며, 법적 선언과 실제에는 당연히 갭(gap)이 생긴다. 법적 선언으로 된 칭의의 즉각성이 실제로 즉각 완전한 의인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터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고 말한 것에는, 칭의의 '법적 선언'과 '실제' 사이의 갭(gap)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죄인 됨과 의인됨의 모순을 긍정하며 둘 사이의 갈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 밖의 나 자신 안에서 나는 죄인이다. 나 자신 밖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죄인이 아니다.' 이 이중적 특성은 평생에 걸쳐 계속된다. 이 둘은 항상 동시에 나에게 사실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위대한 역설이다... '부분적으로 의롭고 부분적으로 죄인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히 죄인이고 완전히 의인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4-8:2)"는 바울의 말에도, 자아의 이중성과 갈등이 표출돼 있다.

바울과 루터는 모두 '법적 선언'과 '실제'의 갭(gap)을 인정했지만, 그 갭을 인위적으로 없애고자 김세윤 박사가 동원한 '이미(already)' 와 '아직(already)'같은 변증법을 고안하여, '부분적으로 의인이고 부분적으로 죄인'이라는 괴짜 인간상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즉각적 칭의가 갖다 주는 결과는 첫째로 성향(nature)의 변화이다. 로마교나 칭의 유보자들은 칭의가 갖다 준 가장 중요한 변화를 도덕성에 둔다. 그들은 예수 믿고 의롭다함을 받으면 무엇보다 도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칭의 유보자들이 한국 기독교에 대해-세월호 사건을 비롯해 기독교 지도자들의 타락-그렇게 날선 비판을 가하고 이신칭의의 재고를 촉구한 것도, 그들의 모든 관점이 도덕성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으로 한국교회의 이신칭의의 강조가 한국교회를 부패시킨 주범이라고 공격했다. 물론 도덕성이 기독교의 중요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칭의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각 사람들의 교육(교양)의 수준과 그들이 처한 환경의 상이함이 일관된 도덕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기독교인과 미국 기독교인의 단순 비교는 무리가 있다. 기독교를 건국이념으로 하여 세워졌고, 200년 간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 체득된 미국의 기독교인과 샤머니즘적인 기복신앙에 오래 길들여져 왔고, 헬조선(Hell-朝鮮)이라는 말이 생길 만큼 취업 경쟁, 대입, 교통난 등 스트레스가 하늘을 찌르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단순 비교할 수 없다.

김세윤 박사가 이런 차이를 간과한 채, 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혹시나 이것이 한때 유행하던 "똥도 미제가 좋다"는 미국 사대주의, 아니면 미국우월주의 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만일 꼭 그렇게 한국 기독교를 비하하고 싶다면 그에게 말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잘못된 점이 많아도 미국같이 한 사람이 한자리에서 사람을 70명씩 살해하는 그런 범죄는 아직 없소이다" 라고.

도덕성을 칭의의 절대적인 결과물로 삼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높은 도덕성이라 해서 반드시 칭의의 열매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본래 행실과 품행이 단정한 유교인이 기독교에 입문했다면, 그는 기독교인의 덕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평소대로 행동했을 뿐이지만, 즉시 훌륭한 기독교인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한 에피소드가 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변증학교수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박사의 저서 <종교심리학>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Scotland) 목사와 주당(酒黨) 교인의 이야기이다. 목사는 늘 술에 절어있는 성도에게 술취함은 성경이 금하니 단주하라고 오랫동안 권면해 왔으나, 그야말로 우이독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가 "당신은 위대한 스코틀랜드(Scotland)인으로서 그까짓 술 하나 끊지 못하느냐"고 하자, 당장 술을 끊었다 는 내용이다. 말씀의 권고로 결행하지 못했던 단주를 스코틀랜드(Scotland)인의 자존심에 호소당하여 한 것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반 틸(Van Til) 교수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어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단지 단주(斷酒) 같은 외형적인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는 꼭 기독교가 아니라도 다른 교육이나 동기부여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아무리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중생의 열매가 아니면, 세리가 바리새인으로 바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으로 책망한 것도 그들에게 중생은 없이 겉치례의 모범적 행위만 있었기 때문이다. 작금의 칭의 논쟁에 있어 도덕성을 칭의의 조건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기저에 인간의 도덕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계몽주의 가치관이 자리한다.

칼빈(John Calvin)도 성화를 매우 중시했지만, 인간 행위를 절대적인 칭의의 표준으로 삼지는 않았다. 그가 재세례파(Anabaptists)를 비판한 것도 참된 교회의 표지를 인간의 경건에 둔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칼빈은 전적 타락한 인간의 경건에 대해 크게 신빙성을 두지 않았고, 사람의 눈으로 성화의 진위를 판단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다. 참 성도이지만 성화되지 못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고 거짓된 성도이지만 훌륭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 둘의 상반된 예가 고린도교회 성도의 패륜(고전 5:1) 과 바리새인의 경건이다(마 23:25).

성경은 칭의와 중생의 결과물이 도덕적 변화 이상임을 말한다. 곧 육신의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의 성향(nature) 변화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죽어,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과 적개심으로 일관하던 자가 중생하여 하나님을 향해 산 소망을 갖게 되고(벧전 1:3),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게 된다(히 9:14). 비록 그에게 도덕적 연약성이 묻어있음에도 말이다.

성향 변화의 대표적인 구절이 이사야 11장 6-7절이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는 것은, 성향이 바뀌어 도무지 좋아할 수 없는 것을 좋아하게 됨을 뜻한다. 예컨대 거룩한 복음을 발로 밟고 그것을 준 사람을 상해하던 자가(마 7:6), 복음을 좋아하게 되고 자랑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 것도 같은 경우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가 중생을 의미하는 육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의 변화를 정의한 다음의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영적인 사람들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것을 영혼이 의식하게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마음에 전적으로 새로운 지각이나 감각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 참된 성도는 새로운 영적 지각과 감각의 원리가 생긴다, 그리고 참된 성도는 이 새로운 감각으로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알게 된다."

존 오웬(John Owen, 1616-1683) 의 견해는 더욱 핵심을 찌른다. "영적인 사람의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자세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 상태이다." 사람 속에 일으키는 이러한 성향의 변화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히 9:13-14)"로 말미암는다.

3. 즉각적인 칭의와 즉각적인 화목을 반대하는 자들

그리스도를 믿어 칭의를 얻으면 즉각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하나님과 화목해진다. 화목제물을 뜻하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은 만족(propitiation)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법적 칭의, 전가적 칭의와 연관된다. 그리스도가 화목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져 하나님이 만족을 얻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법적인 칭의를 얻으면, 즉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그러나 칭의 유보자들에게는 칭의가 즉각적이지 못하니, 하나님과의 화목도 즉각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화목의 요건이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에만 있지 않고, 인간의 성화적 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협력의 정도에 따라 화목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니, 이들에게는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화목이 불가능하다.

특히 그들이 들고 나온 소위 '관계적 칭의'는 칭의와 화목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성경은 분명히 칭의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다고 가르치는데, 그들은 화목을 통해 칭의에 이른다고 말한다. '법적 칭의'를 선언 받은 자가 그의 '행위적 의'로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할 때 칭의를 완성시킨다고 주장하여, '칭의'와 '화목'의 순서를 뒤바꿔 놓았다.

그리고 성도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여 칭의를 구현할 때, 아비가 자식에게 아비 노릇을 해주듯이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준다고 말한다.  다음은 그런 내용들을 담고 있는  '관계적 칭의'에 대한 김박사의 언급이다.

"성경에서 '의'란 기본적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복잡한 관계의 망 속에서 사는데, 모든 관계는 그 관계의 참여자들에게 의무를 지운다. 하나의 관계의 참여자들이 그 관계가 지우는 의무를 다하면 그들은 '의'로운 사람들이다.

예컨대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아비에게는 자식을 잘 양육할 의무를 지우고, 자식에게는 아비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를 지운다. 이 관계 속에서 아비와 자식이 서로에 대해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면 그들은 '의'로운  것이다. ... 그러므로 '의'를 '관계에 신실함'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고, '관계를 원만히 지탱하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관계 속에 있는 자들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면 관계가 원만해지는데, 그  원만함을 '샬롬(화평)'이라 한다. 그러므로 '의'는 '화평'을 낳는다(여기선 화평을 의의 결과로 말하면서 앞의 내용을 번복한다). 그러나 만약 관계의 참여자들이 서로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 참여자들은 '불의'하고, 그 관계는 갈등에 빠지고 만다."

그러나 아비가 자식에게 부모 노릇을 해 주는 것은 아들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 혈육으로 맺어진 천륜 때문이다. 자식이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아비는 그에게 부모노릇을 포기할 수 없다. 자식이 잘못하면 징계를 해서라도 고쳐가며 아버지 노릇을 해 줄 것이다(히 12:8). 아버지는 아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바로 그렇게 하신다.

만일 아들의 신실함에 따라 아비 노릇이 결정된다면 이는 부자 관계가 아닌 사장과 직원, 주인과 종의 관계일 것이다. 김박사가 이해하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닌, 단지 창조주와 피조물, 종교적 숭배 대상과 신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앞서도 잠시 언급됐듯, 김 박사의 '이미(already)'와 '아직(but not yet)'은 칭의의 즉각성을 미완료진행형으로 만들기 위한 변증법적 도구로 차용된 듯한 감이 있다. '이미'는 칭의의 법적 선언이고 '아직'은 성화이다. 칭의의 '법적 선언' 위에 인간의 '성화'가 덧입혀져 칭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화로 칭의가 완성되는 '아직'의 정점은 종말이고, 이 논리대로라면 당연히 칭의는 종말 때까지 유보된다. 그에게 성경의 칭의는 확정 판결이 아닌, 진행형인 1심 2심의 미확정적인 판결일 뿐이다. 1, 2심에서 무죄방면을 받아도 3심이나 헌법소원에서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는-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논리로 종말까지 칭의를 유보시킨다. 그에게 있어 법적인 칭의 선언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우른 덩어리(Cluster)가 아닌, 다만 현재적인 칭의 선언일 뿐이다.

그것의 근거 구절로 흔히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후1:10)"이다. 그들에게 이 말씀은 구원이 과거 현제 미래로 나뉘어지며, 과거와 현재의 구원이 미래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칭의의 법적 선언을 대법원의 확정판결 같은 것으로 믿는 우리의 견해와 너무 다르다.

우리는 김 박사의 '이미와 아직'을 보며, 인간 이성을 만족시키려다 오류에 빠졌던 교회사의 흔한 상흔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