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 시간에는 사랑이 선물일 때 이 세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무한한 빚 가운데 머물게 되는지 조금 더 나누고자 합니다. 사랑은 무한히 거저 주고 무한한 빚 가운데 머물 때만 변질되지 않고 고이 간직될 수 있지요.

그렇다면, 서로 사랑의 빚 가운데 남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부가 물고기를 산 채로 보관해야 할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즉각적으로 물고기를 물 속에 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물고기의 생존 요소는 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어야 하는 모든 것은 생존 요소 속에 간직되어 있어야 하죠.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사랑의 생존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한한 것, 다함이 없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사랑을 간직하기 원한다면, 빚의 무한성의 도움을 받아 사랑이 지속적으로 그 생존요소 속에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무한한 채무의식 가운데 있지 않는 한, 사랑은 말라 비틀어져 죽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잠시 후 죽는다든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한한 빚 가운데 있지 않는 한, 사랑은 즉각적으로 죽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것이 사랑이 완전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무한한 것에서만 생존 가능합니다.

사랑의 생존 요소가 무한한 것, 다함이 없는 것,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니까요.

사랑을 자로 잴 수 있을까요? 사랑을 다른 사람의 사랑과 비교하여 계산하는 순간, 사랑을 측정하는 순간, 사랑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사랑이 거래될 수 없는 이유는 측정할 수 없고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죠.

보수를 받고 일하는 가정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는 집안일을 도와주지요. 어떻게 보면 그녀는 아내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깨끗하게 집안을 관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내의 행위와 보수를 받고 일하는 가정부의 행위를 비교하려 하는 겁니다. 아내도 가정부처럼 밥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바닥도 쓸고 닦습니다. 가정부 역시 같은 집안일을 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겉으로 보기에, 가정부가 하는 노동과 아내의 노동의 총량은 같습니다. 그들은 같은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일과 봉사에 있어서는 눈곱만큼의 차이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한한 차이, 헤아릴 수 없는 차이가 남습니다. 한 경우에만, 언제나 덤이 존재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덤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내는 언제나 사랑을 덤으로 주지요. 사랑은 언제나 "덤"으로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아내가 목숨을 버릴 만큼 대단한 행위를 한다 해도, 사랑을 덤으로 줍니다. 아내가 작은 수저 하나를 닦는다 해도, 사랑을 덤으로 줍니다. 그러니까, 행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내는 행위와 상관없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을 언제나 "덤"으로 제공하고 있는 것과 같지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아내의 가장 사소한 행위 속에서 무한한 가치,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들어 있다니! 세상에, 이런 가치 있는 것이 "덤"이라니! 따라서 이런 사랑이 선물인 겁니다. 이것이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의 개념입니다. 이런 사랑은 계산할 수 없고 장부에 기록할 수 없지요. 말로 설명하기에는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다른 사람이 온갖 최대의 희생을 한다 해도, 아내의 가장 사소한 행위가 그 일보다도 무한히 더 많은 일을 하는 겁니다. 아내가 온갖 최대의 희생을 다 한다 해도, 자신이 지고 있는 사랑의 빚에 비하면 무한히 하찮은 일을 한 것뿐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렇듯 무한한 빚에서 모든 것은 평등을 이루지요.

제가 사도의 권위로 당신께 당부 말씀 드립니다. 사랑하는 자가 되어, 사랑의 무한한 빚을 지십시오. 바로 이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늘에서 여러분들을 지켜보니,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축하하고 있군요.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는지 많이 연구도 했지요.

그래서 상품의 진열장에 있는 마네킹처럼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신을 꾸미고 치장했지요. 어쩌면 이것이 당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특히 취업도 힘든 요즘 같은 시대에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몸값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랑의 빚 가운데 거하며,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는 당신, 사랑의 빚을 지려 하지 않는 당신, 사랑의 빚을 지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사는 당신, 감히 말씀드리건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사랑을 찬양하는 이방인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사랑을 찬양하는 데만 바쁘고 정작 사랑을 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신은 사랑을 찾기 위해 어두움 가운데 더듬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수많은 도깨비불이 떠돈다 해도, 당신 주변이 밝아질 수 있을지 그게 의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께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되십시오. 무한한 빚 가운데 사랑을 고이 간직하십시오. 당신의 행함으로 이것을 보이십시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